소망 말씀(설교 말씀)

오실 그이가 당신이신가요?(누가복음 7:17-27)

분당소망교회 2012. 1. 12. 10:38

 

오실 그 이가 당신이신가요?

 

 

누가복음 7:17-27

 

1년 내내 눈이 덮인 히말라야 산맥의 어느 산골 마을에 낯선 아가씨가 나타났습니다. 아주 젊은 그 아가씨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 서려있었습니다. 마을에 도착한 그녀는 마을 어귀에 있는 강가로 갔습니다. 그리고 강가에 앉아서 흐르는 강을 하염없이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그녀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앉아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양을 치러나가던 목동이 강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그 아가씨를 보게 됩니다. 아가씨는 마치 무엇을 기다리는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었습니다. 목동이 하루 일을 마치고 양을 몰고 다시 강을 지날 때에 그 아가씨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한 달, 두 달, 석 달,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지나가고 또 한 해가 지나가고 두 해가 지나가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 아가씨가 어디서 왔는지, 이 마을에 왜 왔는지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아가씨의 머리에 어느덧 서리가 내리고 얼굴에 주름살이 생겨났습니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 아가씨는 그러나 여전히 변함없이 오늘도 그 강가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봄날 강물 위에 무언가 떠내려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언제나 강가에 앉아있기만 하던 할머니는 그 순간 벌떡 일어나 강물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강물에 떠내려 온 것은 놀랍게도 한 젊은 청년의 시체였습니다. 할머니는 차가운 강물에 뛰어 들어가 청년의 시신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할머니는 눈에 눈물이 가득한 그러나 이제는 너무도 편안해진 목소리로 이 말을 했습니다. “이 청년은 저의 약혼자입니다. 아주 오래전 히말라야의 산에 올라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생을 가리켜서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기다리는 것이 각각 있을 것입니다. 간절하게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특별하게 간절하지는 않을지라도 나름대로 어떤 소원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이 소원을 꼭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저 그런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막연하게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모든 사람들이 다 기다립니다.

 

지금은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은 4주간인데 한 주에 하나씩 촛불을 켜고 주님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시는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세상은 참 어둡습니다. 그리고 힘듭니다. 여러분 가운데 인생이 힘드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참 안 풀리고 힘든 것이 오래 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그렇고 가정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또 사람 관계가 안 풀려서 오래 가는 일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만 무겁고 힘들고 어두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전 세계가 다 그렇다는 것에 더 큰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더 많은 두려움이 사실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현상을 보고 그리고 세상적인 전망을 보고, 세상적인 예상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주님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힘들고 아무리 전망이 안 좋고 예상이 안 되고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천년 동안 실제 이런 일은 있어왔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없던 곳에 우리 주님께서는 희망을 주시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희망과 소망이 희망과 소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초 내가 가지고 있던 희망과 소망보다도 더 큰 것을 이루어주신 주님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이가 조금 드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아실 것입니다. 제 나이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도무지 소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한때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일어난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외국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경제 문제는 더합니다. 도저히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간혹 우리가 일본을 따라붙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연세 드신 분들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견몽(犬夢) 즉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얼마나 감사한 일들이 많습니까? 국가적으로 그러하지만 세계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습니다.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환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보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공부할 책 하나 제대로 사지 못할 뿐 아니라 선생님한테 제대로 배울 수나 있었습니까? 과외, 학원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들도 제대로 가르치지 아니하는 그러한 때에 공부해서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깜깜할수록 우리는 더 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을 켜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전망 때문에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대림절은 우리들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어떻습니까? 터널이 더 깊어지면 어떻습니까? 출구가 가깝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워지면 해가 뜰 때가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너무너무 힘들어 도무지 견딜 수 없으면 이제 그 힘든 인생이 끝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대림 3주차입니다. 이 3주차에는 세 번째 촛불까지 불을 켭니다. 많이 어둡지만 하나 켤 때보다 둘 켤 때가, 둘 켤 때보다는 셋 켤 때가 훨씬 더 밝습니다. 오늘은 대림 3주차이므로 세 번째 촛불에 불을 켜고 예배를 같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촛불을 켜면서 촛불을 켜면 밝고 좋은 것은 물론이고 초가 타서 자꾸 녹으므로 깊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면서 또 기도할 때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고 불만 켜고 기다리는지 아니면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대림절은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 계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다려야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통적인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대림절을 기다리는 동안 크게 세 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불을 켜지만 불을 켜는 것은 하나의 작은 기도이고 세상을 밝히는 것은 우리 주님입니다. 오늘 우리 예배당도 불이 제법 밝지만 밝아본들 얼마나 밝으며 얼마나 비칠 수 있습니까? 세상을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정말로 밝히는 것은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도 초를 켜는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여 오셔서 이 세상을 비쳐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이 대림절 세 주 되는 동안 평소와 다른 어떤 기도를 하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기도해야한다, 기도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기도했다는 것을 알고, 말하고 들으면서 정작 나는 다른 때와 똑같이 하거나 오히려 날씨가 춥다고 더 기도하지 않지는 않았는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자꾸 잔소리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때는 특별히 다른 때보다 더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조금 전에 잠시 말씀드렸지만 초에 불을 켜면 초가 타면서 불이 밝아 참 좋습니다. 그런데 그냥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타야합니다.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려면 녹아야합니다. 그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주머니, 내 몸, 내 시간, 내 수고를 그대로 두면서 그저 세상이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몸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성찬식에서 떡을 주시면서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고, 잔을 주시면서 내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신이 먼저 희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말로만, 상징적인 행동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희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늘 하듯이 최소한 이것 정도 했으니 나는 다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합니다. 희생이 있어야합니다. 희생이 없는 무엇은 가치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기억하지도 못하시고 그것으로 우리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일으키지도 못합니다.

 

세 번째는 자선입니다. 그저 상징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내 아픔, 내가 필요한 것을 떼어 내어, 내가 더 부족하게 되더라도, 불쌍하고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자선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특별히 이 기간에는 교회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선교팀이 에티오피아로 출발하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구제활동을 하려고합니다.

 

그들은 참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TV에서 유니세프 광고를 보면 참으로 어려운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저는 그 광고가 나오면 가슴이 아파서 잘 보지 않습니다. 아마 에티오피아나 다른 아프리카 사람들이 그 광고를 보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러했습니다. 옛날에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구조 물자를 보내줄 때 내건 사진이 언제 적 사진인지 모릅니다. 6 25 전쟁 통에 찍은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불쌍한 한국을 도와주자고 했을 때 우리 나라 사람 가운데 참으로 불쾌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번에 우리 선교팀이 가는 에티오피아도 캄보디아, 라오스 등과 함께 국제적으로 최빈국에 들어갑니다. 그 중에서도 이번에 가는 젤두라는 곳은 지난번 의료 선교팀이 갔던 곳으로 제일 가난한 동네입니다. 젤두지역으로 갈 때 버스 하나를 빌려 타고 가는데 30년 전 버스입니다. 그 버스에는 경찰관 두 사람이 함께 갑니다.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산적들이 있으므로 경찰관을 모시고 가야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도둑들이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산적이 왜 있고 도둑이 왜 들끓습니까? 그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가 힘들고 그 지역이 힘들다는 것인데 이런 지역으로 지금 가는 것입니다.

 

처음 에티오피아 극빈 가정에 갔을 때에는 잘 몰라서 과자도 사가지고 갔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양식, 먹고 살 것을 가지고 가야했습니다. 그래서 쌀처럼 생긴 곡식을 사가지고 갑니다. 한 만원에서 만 이천 정도로 다섯, 여섯, 일곱 식구 되는 가정이 한 달 정도 먹을 수 있는데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는 각 교회마다 몇 가정을 선정하여 매달 돕고 있는데 이번에 가는 곳은 우리 교회가 평소에 돕지 않은 가정들을 골라서 돕습니다. 아마 이번에 가는 선교팀은 여러 군데를 가기 때문에 계속해서 움직여야 하므로 고생이 많을 것입니다. 또 날씨는 얼마나 덥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교회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할 수만 있으면 가정적으로 이런 일을 좀 하십시오. 특별히 이 대림절에는 기도하시고 희생을 해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임하시기를 기다리는 이 대림절에 기다리는 그 분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는 그 분이 어떤 분인가를 알 때 우리 기쁨은 더할 것이고 그런 주님을 알고 기다리고 그 주님을 만나게 되면 영 다를 것입니다.

 

요즘은 선을 잘 보지 않는데 어떤 사람을 만나려고 할 때 내가 기대하고 있는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을 보면 그냥 끝내버리는 일들이 많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 알게 되면 피차 실망하게 되고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제대로 알 때 주님을 더 기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실 주님을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 구절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선생님, 우리가 지금 수천 년 동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선생님이 바로 그 오실 메시야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메시야로 오실 것으로 알고 기다려야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본래 쓰는 전통적인 히브리말로 ‘기름을 부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헬라말로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야라는 말과 그리스도는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야는 어떤 뜻일까요? 메시야는 구약에서 왕이라는 말입니다. 아무 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왕 다윗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너무나 정치를 잘하였고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큰 실수는 있었지만 백성들을 정말로 편안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어 모든 문제를 풀어갔습니다. 유대민족들은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서 이스라엘 민족들, 유대민족들에게 참 평화와 행복을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다윗 왕을 이은 왕들은 터널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듯이 점점 더 악한 왕들만 나왔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유대민족들은 왕으로는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게 됩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들은 이제 사람 왕으로서는 희망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특별한 어떤 메시야가 오셔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상황은 점점 더 깊어져갔고 절박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통치 국가의 수탈이 있었고, 나라의 지도자들의 수탈이 있었고 악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더구나 거기다 종교지도자들까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부와 명예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목회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 이름만 생각하고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점점 더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빨리 메시야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잘못 이해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로지 자기네들만을 위한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이기적인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 다른 민족을 생각하지 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라면 다른 민족이 망해도 되고, 나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이 잘못되어도 된다는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혹시 나도 그 당시 유대인들처럼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잘 보셔야합니다. 주님을 오시기 기다리면서 나도 그런 주님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잘 보셔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을 위해서라면 오신 메시야가 무력으로라도 나라의 악한 위정자를 뒤집어버리고, 다른 민족을 무너뜨리고, 자기들에게 자주독립을 주고 선한 나라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땅에 떨어져서 죽으라, 한 알의 밀알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내 십자가를 질 테니 여러분들은 각각 여러분들이 져야할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오실 주님, 이제 곧 오실 주님도 이런 주님으로 오십니다.

 

그 당시 유대 백성들은 늘 당하는 자기들은 의로운 사람들이고 자기들을 지배하는 로마는 악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은 다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 똑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우선 나는 좀 받아야하겠고, 조금은 더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 문제는 풀려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소금의 노릇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의 노릇을 하려면 자기를 녹여야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이므로 세상을 밝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되려면 자기를 녹여야합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오시면 빛이 되라, 빛을 비추라 소금의 맛을 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개선장군으로, 통치자로, 큰 소리 치면서 오시는 그런 주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신 주님은 겸손하신 주님, 아주 연약하신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찬송가 113장의 ‘그 어린 주 예수, 누울 자리 없어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큰 나팔을 부시면서 선물을 잔뜩 가지고 오셔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줄 분으로 생각하였지만 우리 주님은 줄 것이 없었습니다.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여러분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주면 될 텐데 나를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 위대한 분이 발을 씻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아무 힘없고 능력 없는 메시야처럼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대단한 분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말씀만 드리면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고 최고의 상담을 해주는 분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같이 고민하십니다. 돈 없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쉽게 만날 수 있도록 아주 초라한 분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만나실 분은 바로 그런 주님입니다. 그런 메시야로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아는 대로 이방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너희 가운데는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하고 너희 가운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너희의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네들이 다 섬김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주님만 오시면, 메시야만 오시면 우리는 섬김을 받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종으로 부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종이 되어라, 여러분들이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오실 주님도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일류를 좋아합니다. 일등, 최고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시고 난 후 한 번도 일류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일등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최고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그런 데 가치를 부여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일등, 일류, 최고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종이 되어라, 못난 사람이 되어라, 나중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모자라고 좀 시원찮은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셨고 더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를 돌아볼 차례입니다. 우리는 대림절, 기다린다고 하는데 누구를 기다리는가, 어떤 주님을 기다리는지 잘 보아야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기다린다,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주님이 아니라 주실 선물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님을 통해서 조금 더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을 이용해서 내가 더 부요하고 지금보다 조금 더 편안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그렇게 해주는 주님을 기다리는 이기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그리고 또 나는 정말로 그 주님을 기다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정말로 기다리는 사람은 그냥 기다리지 않습니다. 집에 정말로 귀한 손님이 오면 가만히 있습니까? 청소도 하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려고 모든 준비를 다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여러분들이 정말로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께서는 어떤 분이시고 어떤 것을 요구하시는지 아시고 그 주님을 기다린다면 이 대림절 특별히 성탄절은 훨씬 좋을 것입니다. 가슴으로 기분만 좋은 것인 아니라 정말로 좋은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기대하고 준비한 사람에게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는데, 이 은혜는 심정적으로만 주시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심정적으로 은혜를 먼저 주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가장 현실적인 복을 주시기에 하나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