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때가 차매(미가 5:2-5, 갈라디아 4:1-7, 누가복음 2:8-14)

분당소망교회 2012. 1. 12. 10:44

 

 

 

때가 차매

 

 

 

 

(미가 5:2-5, 갈라디아 4:1-7, 누가복음 2:8-14)

 

 

사람들의 뇌는 두 부분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한다고 합니다. 즉 오른쪽 뇌가 하는 역할이 따로 있고, 왼쪽 뇌가 하는 역할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뇌는 대단한 컴퓨터 같은 성능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배우고 익힌 정보, 지식 또 경험들이 저장된다고 합니다. 왼쪽 뇌는 언어구사 역할을 하고 계산을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왼쪽 뇌를 잘 쓰는 사람은 말을 잘하고 계산을 잘하고 이해타산에 상당히 밝다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면도 있지만 좋지 않은 쪽으로 말하면 왼쪽 뇌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이 일이 나한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내가 좋아하는 것인가, 좋아하지 않은 것인가 오로지 여기만 몰두한다고 합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왼쪽 뇌는 아주 경쟁적이고 계산적이고 투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뇌는 용량이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왼쪽 뇌만 해도 용량이 엄청난데 오른쪽 뇌의 용량은 왼쪽 뇌의 십 만 배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 오른쪽 뇌에는 창조성이 있고 직감력이 있고 그리고 수천 년, 수만 년 세월동안 살아온 인류들의 지혜가 거기에 저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것은 오른쪽 뇌는 선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들어있기 때문에 오른쪽 뇌를 많이 쓰게 되면 사람이 건강하고 어떤 환경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른쪽 뇌를 쓰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왼쪽 뇌를 중심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왼쪽 뇌를 쓰는 것이 본능화 되어있습니다. 반대로 오른쪽 뇌는 그렇게 좋고 용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서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결과 오른쪽 뇌를 쓰면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해질 수 있음에도 주로 왼쪽 뇌를 쓰면서 살기 때문에 일마다 계산하고 일마다 따지고 일마다 이해타산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늘 긴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는 저 사람이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일을 볼 때는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를 계산하고, 어떤 일을 볼 때는 기분이 나쁜가, 좋은가만 따지기 때문에 늘 긴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긴장하면 빨리 늙고 병이 들게 됩니다.

 

인류가 너무나 오랫동안 왼쪽 뇌를 중심으로 즉 계산적으로, 이해타산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의료술이 발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병들은 더 많이 생겼습니다. 모든 환경이 풍요로워지고 문명이 발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폐되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이 황폐되었고 사회도 황폐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보시기에도 얼마나 무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까?

 

여러 가지 환경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왼쪽 뇌만 쓰기 때문에 지나치게 계산적으로 또 이해타산적으로 살게 되고 무서운 일들이 생깁니다. 건강하려면, 행복하려면 오른쪽 뇌를 자꾸 써야하는데 우리가 본능적으로 오른쪽 뇌를 쓰지 않고 왼쪽 뇌만 쓰기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여기에 우리에게 하나의 과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오른쪽 뇌를 쓸 수 있는가?’

인생이란 또 환경이란 자꾸 바뀝니다. 좋을 때도 있겠지만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안 좋은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좋은 일만 있기 바라는 것은 하나의 탐욕입니다. 욕심입니다. 정말로 제일 좋은 것은 좋은 때이든지 좋지 않은 때이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른쪽 뇌를 많이 쓰면 그럴 수 있는데, 왼쪽 뇌를 쓰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힘들다, 고달프다,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오른쪽 뇌를 많이 쓸 수 있는가는 인류에 있어서 큰 과제입니다.

 

이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이 아주 쉬운 답을 냈습니다. 그것은 왼쪽 뇌를 덜 쓰면 덜 쓸수록 오른쪽 뇌를 많이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왼쪽 뇌를 안 쓸수록 오른쪽 뇌를 쓰게 되고 그만큼 인생은 더 건강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계산하지 말고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따지지 말고 살아야합니다. 이해 타산적으로 살면 얼른 생각하면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 같지만 절대적으로 손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성경 전체에서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진리이고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이 확인한 것이 아니라 의학자들이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인생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재주부리지 말고 사십시오. 얄팍하게 살지 마십시오. 말 좀 못해도, 가끔씩 작은 것을 손해 본다고 할지라도 이것저것 너무 따지지 말고 사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사신 길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살라고 하신 길이고, 이것이 행복의 길이고 건강의 길입니다.

 

성경은 우리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인간의 모습을 초등학문 아래에 있는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대 사회의 미성년자에게 비교합니다. 지금도 상당부분 그렇지만 미성년자는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특별히 재산에 관한 것은 더 합니다. 자기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미성년자는 성년이 될 때까지는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받아야합니다. 자기가 주인이면서도 마치 종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성년자가 아니라 성년이면서 나이가 서른, 마흔, 쉰 심지어는 예순이 넘고 일흔이 넘어서도 미성년자처럼 종으로, 노예처럼 묶여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돈의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고 돈의 종노릇을 합니다. 그저 돈을 지키고 챙기고 보호하고 보관하고 더 많이 벌려고 하다가 제대로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종노릇만 하고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심의 종노릇을 합니다.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어 합니다.

주는 것은 받겠지만 자꾸 좋은 선물을 받으려고 하다보면 욕심이 자꾸 커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미움의 종노릇을 하고, 어떤 사람은 시기의 종노릇을 하고 질투의 종노릇을 합니다.

 

또 한평생 불평하고 불만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이 똑똑하고 많이 알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많아 불평할 것이 많고 불만할 것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내가 나의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불평과 불만, 원망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보면 그렇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돈에 끌려 다니면 내가 자유를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미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치한 것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오로지 나만 생각하고, 우리만 생각하고, 나 편한 것만 생각하고, 어떻게 하든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눈을 부릅뜨고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남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얄팍한 계산만 하고 이해타산만 생각하고 내 기분에만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요즘은 어른들도 그런 경향이 좀 있지만 우리 청소들이 재미있는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을 너무 좋아하다보면 어느덧 내가 재미있는 것의 종노릇을 하고 있게 됩니다.

 

게임을 예를 들면, 게임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나 자신이 정한 어느 일정시간을 넘어서까지 하고 싶다고 하게 되면 이미 그 학생은 게임에게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잘 보아야합니다. 어린 아이나 어른 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너무나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좋고 재미있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하든 이루려고 합니다. 이러다 보니 건강하게 살지 못합니다. 행복하게 살지 못합니다. 그렇게 좋은 것이 많음에도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행복하지 못합니다. 종노릇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것이 현금의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개인 개인의 모습이고, 가정 가정의 모습이고, 이 나라의 모습인 것을 여러분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경은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해주셨다, 자유를 선포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탄절은 바로 이것입니다. 선물을 받고 웃고 놀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제는 너희들은 더 이상 종노릇하지 말고 여기저기 끌려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은,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주인이고 자유인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라, 내가 꼭 하고 싶은 것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 돈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끌려 다니지 말고 내 소원을 너무 강하게 가질 것은 아니다, 내 기분을 너무 생각할 것이 아니고 재미있는 것을 너무 밝힐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에 끌려 다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에 종노릇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인 되시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딸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시오. 여러분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들딸을 더 사랑하십니다. 종노릇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종노릇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여러분들에게 있어야할 것을 당신이 반드시 챙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6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아니하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6:25-30)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누가복음 15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너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나님께서 다 챙겨주시고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이 전부 다 여러분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계산하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 받은 정말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먼저는 우리 예수님께서 종의 아들로 살지 말고 주인의 아들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큰 집에 하인 아들과 주인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이가 비슷해서 자주 함께 놀았습니다. 어느 날 그 집에 큰 손님이 오기로 예정되었습니다. 모두들 준비하느라 바빠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손님이 오실 시간이 다 되어 화장실 청소를 하지 않았던 것을 주인이 보았습니다. 모두들 준비하느라 바빠서 화장실 청소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놀고 있는 두 아이를 불렀습니다. “얘들아, 오늘 손님이 오시는 것을 너희들도 알지? 그런데 지금 시간은 다 되었고 아무도 청소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너희들이 좀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하인의 아들은 대뜸 “우리 아버지가 하인이지 나는 하인이 아닙니다.” 라고 거부했습니다. 이때 주인의 아들은 얼른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화장실로 뛰어갔습니다. 이것이 주인의 아들과 종의 아들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종의 아들이 아니라 주인의 아들로 살아야합니다.

 

이제는 우리도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이기를 버렸노라.’ 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다 좋다고 달려드는 일이 있다면 “나는 나중에 하지요.” 라고 말해야합니다. 서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할 때는 “나는 천천히 하지요.”라고 말해야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주인의 아들이고 이 사람들이 바로 주인입니다.

 

1866년 하와이의 몰로카이 섬에 나환자 수용소가 들어왔습니다. 세계 제일의 풍광을 자랑하는 하와이의 몰로카이섬, 너무도 아름답고 풍요가 넘치는 지상낙원인 이 섬, 그러나 한 구석에 수많은 나병환자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 소외, 버림받은 아픔 속에서 가장 큰 고통은 영적인 고통입니다. 사람들이 소외하고 버렸다는 아픔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큰 아픔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의 갈급함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양소가 시작된 지 7년이 지났음에도 이 섬에는 나서는 성직자가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유럽 벨기에의 수도원에서 수도하고 있던 한 청년 다미앙이 듣게 되었습니다. 몰로카이의 나환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가서 네가 복음을 전하라.” 다미앙은 하와이 몰로카이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여려 해가 지나도록 몰로카이 나병환자들은 다미앙을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다미앙을 거절하고 심지어는 방해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6년이 되던 어느 날 다미앙이 아침에 차를 마시기 위해서 물을 끓였는데, 끓는 물을 옮기던 중 아차하는 실수로 자기 발등에 뜨거운 물을 떨어뜨리게 되었습니다. 다미앙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뜨거운 물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렇게 뜨거운 물이 발등에 떨어졌음에도 전혀 뜨겁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발의 감각이 마비되었던 것입니다. 나병, 문둥병이 다미앙에게 온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다미앙은 꿇어 엎드려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나도 저 나병환자들에게 설교할 때 ‘여러분’ 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들 나병환자들’이 아니라 ‘우리 나병환자들’이라고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 귀한 선물을 저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부터 나환자들은 비로소 다미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로 받아들이고, 성직자로 받아들이고, 아버지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선물을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도 이 길을 걸어야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오른쪽 뇌를 쓰는 것이고 이것이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건강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