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다윗의 죽음(열왕기상 2장)

분당소망교회 2012. 2. 19. 08:10

다윗의 죽음

 

 

열왕기상 2장

 

그렇게 용맹스러웠던 다윗도 한 생을 마감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늘 죽음을 보게 되지만 그것을 우리 실존의 문제가 아닌 나와 무관한 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 순서가 오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항상 새롭게 나를 씻고 거룩하게 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 두 가지를 합니다. 먼저 솔로몬에 대해서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어라 즉 대장부 역할을 다하라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 법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의 한 평생이 얼마나 파란만장하였습니까? 좋은 일도 많았지만 ‘죽음과 나 사이는 한 걸음밖에 없다’ 하고 고백한 것이 다윗의 삶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다윗이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 법을 따르면 너는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유언을 합니다.

 

그 다음은 몇 사람에 대해서 부탁을 하는데 한 평생 그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으면 죽을 때 그 사람들을 부탁하겠습니까? 그 중 한 사람은 좋은 일로, 나머지 사람들은 좋지 않은 일로 부탁하였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고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요압입니다. 전쟁 때가 아닌 태평한 시대에 피를 흘려서 무고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 사람을 평안히 죽음에 가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음부란 지옥이 아니라 죽음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바실래 입니다. 그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 갈 때 다윗을 섬겼고 위급할 때 도와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을 도와주었던 사람은 수 없이 많았지만 그는 특별히 다윗에게 기억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내 가슴속에 가장 많이 다가오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다 기도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가슴속에 사랑으로 또는 아픔으로 와 닿는 사람입니다. 바실래는 이때 이미 죽었으므로 다윗은 그 아들들에 대해서 부탁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탁입니다.

다윗이 피난에서 돌아올 때 바실래에게 함께 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따라가지 아니하고 자기 아들들을 부탁했습니다. 다윗이 이것을 잊지 않고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귀한 일을 하시게 될 때에 악한 일이 기억되는 것과 같이 선한 일도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기억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이든 손에 쥐어 주시면 받으시는 대로 선한 일을 위해 힘껏 쓰신다면 이것은 그냥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이 서른에 왕이 되어서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지하였던 다윗이 이제 생명을 다하였습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통틀어서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추앙 받는 다윗이지만 그 다윗도 죽으니까 10절의 말씀 한 마디로 요약되고 맙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 땅의 삶은 끝이 난 것입니다.

열왕기상 2장은 상당히 긴 내용인데 간단히 말씀드리면, 먼저 아도니야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이 죽고 난 후 밧세바를 찾아와 아버지 다윗을 모셨던 동녀 아비삭을 아내로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솔로몬이 대노하게 됩니다. 지난번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용서해 줄 때 선하게 있는 동안은 살겠지만 악하게 되면 죽을 것이라는 조건을 붙였는데 비록 잠자리는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기 아버지의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한 이것이 솔로몬에게 큰 노를 불러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가 악을 행하였으므로 처형 시켜 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제사장 아비아달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 다닐 때에 그 아버지 아히멜렉이 은덕을 베풀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놉성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윗이 먹을 것과 칼도 없이 피난 다닐 때에 놉성에 가서 거짓말을 하여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갔었습니다. 이것이 사울에게 발각되어 아비아달의 아버지 아히멜렉은 처형을 당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때 아비아달은 도망 나와 다윗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그에게 충성을 다하였는데 아도니야가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 사람이 아도니야 편에 들어갔던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를 마땅히 죽였어야 했지만 단지 그를 파면시키기만 합니다.

 

여기서 솔로몬의 귀함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죽이면서 왜 아비아달에게는 조건도 붙이지 아니하고 파면만 시키고 마는 것일까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버지 다윗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때 다윗이 한 말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하나님의 법을 중요시하는 이 정신이 아들 솔로몬에게 계승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아달은 죽음을 면하게 되고 파직만 당하게 됩니다.

 

함께 반란군에 가담했던 요압이 이 소식을 듣고 살고자 하여 성전의 제단 뿔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시켜 죽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솔로몬에게 부탁했던 시므이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다윗의 시대가 끝난 줄 알고 그를 저주하였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힘들고 고통이 있을 때 더 많은 애정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환궁하는 감격의 날에 그를 찾아와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 때 다윗은 그에게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지만 가슴속에는 응어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솔로몬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맹세 때문에 그를 죽이지 않는 대신 예루살렘에서 집을 짓고 살되 만일 예루살렘 직영을 벗어나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다 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시므이가 도망간 그의 종 두 사람을 찾으러 갔던 곳이 예루살렘 지경을 벗어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종 두 사람은 찾아왔으나 솔로몬에게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시므이는 잔꾀로 잠시 위기에서 벗어났었지만 죽을 인생은 결국 죽을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요한 것은 죽을 길이 아니고 살길로, 저주의 길이 아니라 축복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모습이 갖추어져 있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인격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인생은 죽을 길로, 복 받지 못할 인생은 그런 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속에 복된 길을 주시고 우리가 응답함으로 말미암아 복된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뜻을 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아도니야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가 아비삭을 요구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 당시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에게는 전왕의 처첩을 자기 아내로 삼는 사람이 후임 왕이 된다 라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혹시 아도니야가 이것을 생각했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만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몰래 아비삭을 데리고 가면 될 터인데 어떻게 직접 솔로몬에게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것의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아도니야가 동생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을 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도니야가 밧세바를 찾아와서 15절 말씀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이것은 자기가 솔로몬의 형이었으므로 사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것,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착각입니다.

 

아도니야는 자기 동생 솔로몬이 왕이 된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하고 승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무시하였습니다.

자기의 처지가 어떤 상황인데 솔로몬을 찾아가서 자기 아버지 아내 역할을 한 아비삭을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22절 말씀 중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 이것으로 보아 그 때에 자기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추종자 요압이 아직까지 군대장관으로 있었고 영적 지도자인 아비아달도 아직까지 제사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아도니야는 착각하게 되었고 솔로몬을 무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죽을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있었던 것인데 마치 자기가 살만한 가치가 있어서 사는 것처럼 생각하며 자신을 너무 몰랐습니다.

아도니야를 볼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좋은 사람을 많이 보내주시고 필요한 만큼의 재물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지적해 주시고 고발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많은 은총의 뜻을 잘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아도니야가 또 하나 몰랐던 것은 하나님만이 정답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아무리 정답인 것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맞서게 되면 결코 하나님 뜻을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어야 했습니다.

 

아도니야 자신도 15절에서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승복하지 못하였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를 따랐던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큰 것을 모르면 작은 것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흐름을 잘 알고 세상의 법을 잘 알아도 하나님 법을 알지 못하면 큰 것에 실패를 합니다. 알아야 할 사람이 알지 못할 때 그에게 돌아갈 것은 불행이고 그에는 남은 것은 멸망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한 사람 더 요압을 보시겠습니다. 40여 년간 다윗과 함께 하면서 다윗에게 꼭 필요했던 사람이었는데 다윗이 죽어가면서 요압을 처형하가고 합니다. 요압에 대해서 왜 이런 유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윗이 잘못 되었습니까? 아니면 요압이 잘못 되었습니까?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본심이 드러납니다. 얼마나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이 많았으면 이렇게 하였을까요? 이것을 심각하게 보아야 합니다.

 

요압은 오랫동안 다윗에게 충성하였고 함께 하였지만 진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함께 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함께 살아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일 때 세상적으로 보면 요압의 생각이 옳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다윗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언젠가는 또 배반할지 모른다고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마저도 자기 섬기는 왕이 원하지 아니하면 그 뜻을 따라주는 것이 충성입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마음대로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과 하나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내 생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판단과는 다릅니다. 지금까지 백에 아흔 아홉 번이 맞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이 길이 맞습니까?’ 하고 다시 또 하나님께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인생은 답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답은 항상 따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충성이 무엇입니까 그 분이 원한다면 그 길로 같이 가는 것이 충성입니다. 때로는 틀렸다 할지라도 절대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함께 따라가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그에게 자기가 왕이 되려는 반역적인 마음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였다 할지라도 어떤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다윗에 대한 교만이 가득 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반역이란 나쁜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교만의 마지막은 패망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아도니냐와 요압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큰 것을 착각하였기 때문에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겸손하게 순종하며 충성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