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요한계시록 7:9-17)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
요한계시록 7 : 9~17
우리나라 올림픽 축구 대표 팀이 4강이 되었습니다. 영국을 이겼다는 사실에 특히 기분 좋습니다. 한국 축구 선수 중 누구를 아느냐는 질문에 영국대표팀 감독이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 했었지요.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해야지 어떻게 한 사람도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 교만한 소리를 했는데 우리가 이겼다고 하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안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펜싱의 신아람 선수 이야기입니다. 우는 모습이 언론에서 계속해서 보도되고, 인터넷상에도 계속 남아있습니다. 펜싱 경기장 한구석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한 시간 이상이나 앉아있었다고 합니다. 선수가 떠나면 어필이 중단되기 때문에 그렇게 앉아있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속이 참 많이 상했습니다. 왜 억울함을 받아들여주지 않느냐고 버티고 앉아 있었지만 결국 거부되고 말았습니다.
억울함에는 주관적인 억울함과 객관적인 억울함이 있습니다.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거의 다 양쪽 다 자기는 억울하다고 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거기다 재판이 끝나서 감옥에 가 있는 사람들 중 상당한 사람들이 자기는 억울하다고 합니다.
억울함에는 객관적인 억울함보다 주관적인 억울함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아람 선수의 억울함은 우리나라 사람들 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언론 중 하나인 AFP 통신은 그 일을 ‘올림픽 역사상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다섯 가지 오심 가운데 하나’로 뽑고 있습니다. 이번 런던 올림픽뿐만 아니라 전체 올림픽 가운데 다섯 가지 논란 중 하나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다른 언론은 제쳐두고 영국의 언론들만 인용해도 그렇습니다. 영국의 한 일간지는 ‘런던 올림픽 최악의 논쟁거리’라는 표현을 했고, 또 다른 영국의 한 언론은 ‘펜싱은 끝났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정은 끝까지 번복되지 않고 그대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 신아람 선수는 그 판정이 확정된 후 5분 만에 다시 다음 경기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패하고 말았습니다.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시간이나 하염없이 울고 있었으니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쳤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 한 남자 아나운서가 울먹이며 더 이상 스포츠는 신성하지 않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한 아나운서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 아나운서가 잘못 안 것이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성하지 않다’가 아닙니다, 본래 그랬습니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말은 스포츠계의 한 진리로 통하고 있는데 그것이 스포츠만 그렇습니까? 거의 다른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오죽했으면 아주 옛날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했겠습니까?
세상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그 불꽃같은 눈으로 다 쳐다보고 계시는데 이런 억울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말이 안 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있었고 또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먼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서도 상당히 많은 분이 이미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성경 맨 처음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류 첫 사람인 아담의 아들 아벨이 자기 형에게 맞아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제사는 받아주고 자기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으셨다고 형 가인이 그랬습니다. 자기 제사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가진 형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너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네 얼굴이 왜 그렇냐?” 라고 훈계하시자 그만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동생이 바른 제사를 드렸다고,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았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어쩌면 결국 하나님께서 훈계하시고 책망하신 것이 그 형 가인으로 하여금 동생을 죽이도록 한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한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무수히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구약의 최고의 선지자 중 한 사람인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엘리야 시대 당시, 세상이 깜깜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그런 시대였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 어려운 일을 부탁하기 위해서 엘리야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엘리야는 순종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일에 순종하면 죽음은 맡아둔 당상이었습니다. 왕을 찾아가 왕이 제일 싫어하는 말을 하라는 것인데, 그 일을 하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감히 나설 사람이 없었는데 엘리야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참 잘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엘리야는 하나님께 ‘하나님, 나 좀 죽여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고 대단한 일을 한 엘리야가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요? 너무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수고도 많이 했고 헌신도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상을 주시지 못할망정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을 가리켜 성경은 ‘동방 최고의 의인이다.’ 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욥은 세계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욥이 참 모진 고난을 당합니다.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갔고, 자식 열 명을 다 잃었으며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아내까지 자기를 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잘 견뎠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하나님께 단단히 야단을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야단치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야단치실 때 웃으면서 말씀하시면서도 그 속에 우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욥에 대해서는 겉으로는 단단히 야단치시면서 속으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야단치셨습니다. 욥은 아마 그런 야단을 맞아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야단을 맞았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인생 사시다가 그런 고난이 있으면 욥을 생각하시고, 엘리야를 생각하시고 아벨을 생각하십시오. 나뿐만 아니라 위대한 의인들 가운데도 그런 일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충성한 사람들, 그렇게 의로운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면 풀리기도 하는데.. 다른 집에는 대강 대강 끝나는데 나는 왜 이렇게 계속되는가?’ 라는 일들이 있을 때 성경을 보십시오. 욥이 그랬습니다. 너무 견디기 힘들어 그만 실수를 하다 하나님께 야단을 맞을 정도였습니다.
억울한 것도 경우도 참 많습니다. 정도를 넘어 기가 막힌 억울한 일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봇입니다. 나봇에게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조그마한 땅이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 그 땅을 탐냅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자꾸 팔라고 합니다. 나봇이 끝끝내 팔지 않자 왕비가 나섰습니다.
여성 여러분들에게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성들은 보통 아주 온유합니다. 그러나 한 순간 잘못 되면 남자에게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심한 강퍅함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항상 조심해야합니다.
왕비가 나서서 왕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게 한 후, 아주 못된 일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송받는 사람 나봇에게 왕비가 일을 꾸밉니다. 많은 모아 나봇을 칭송하게 한 후, 한 사람이 나서서 저 사람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말하게 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을 모독하면 그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돌에 맞아죽습니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 그렇게 해야 하므로 한 사람을 더 나서게 했습니다. 두 사람이 증인이 되니 나봇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왕비의 음모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약의 하나님의 종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이전에 그렇게 신봉하던 유대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께 갔습니다. 그런데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돌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부도 버렸습니다. 돈도 제법 있었고 공부도 많이 해서 실력도 좋았습니다. 누리는 것이 많았습니다. 부귀영화 전부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것이었습니다. 참 힘듭니다. 힘들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은 참 힘듭니다. 특별히 좋다고 한평생 함께 살아갈 것 같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렇게 버림받았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매까지 맞고 감옥에 가서 죽을 고생을 다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전설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 대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칼로 목을 베임 받아서 죽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런 일은 오늘날 신실하고 진실하고 충성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계속 되고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교회, 충성된 하나님의 종들에게도 이런 일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성도의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 성도의 고난이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신앙하면서 ‘기독교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잘 알아야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좋지 않은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고난 속에 들어가면 그것이 얼마나 영광이고 얼마나 큰 감격이고 감사인지 다 알게 됩니다. 밖에서 구경만 하면 죽을 것 같은 고생이고 나는 절대로 하지 않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막상 경험해보면 충분히 할 만하다고, 도리어 또 경험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성경이 자주 말씀하시는 것 중 하나가 말세의 환난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되면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 환난이 어떤 것인지는 알기 힘듭니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말했지만 분명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 환난이 언제 시작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정말로 힘든 고난을 당하고 힘든 분들이 계시다면 어쩌면 이미 환난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을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문제는 그 말세에 오게 될 환난이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성도들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이것을 더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말세가 되면 환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에서 말하는 아주 중요한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핵심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자라면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환난가운데 구원받고 환난이 끝나고 나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보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견인’ 즉 끌어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자라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유혹을 받을 수 있고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끌어서 죄에서 건져내고 회복시키신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입니다. 끝까지 끌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핵심적으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들의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성도들이 왜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는가? 왜 억울한 일을 당하는가? 선하고 의롭고 충성스럽게 살아온 성도들이 그런 충성과 의로움과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결론은 기독교 신자들이 억울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절대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회복되어진다, 그리고 그동안 받았던 아픔과 고통과 서러움과 슬픔과 괴로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넉넉하게 보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큰 환난으로 성도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난 뒤,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자 하나님 보좌 옆에 있던 스무 네 사람의 장로들 중 한 사람이 일어나서 모든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 나온 성도들은 이런 복을 받는다고 발표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 볼 것은 ‘장로’라는 사람입니다. 이 장로는 물론 여러 가지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의 장로님들과는 좀 다른 부분이 있겠지만 적어도 성경은 똑같은 ‘장로’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장로의 역할을 잘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존귀한 자리에 서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옆에 스무 네 장로가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발표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흔히 말하는 대변인입니다. 누구의 대변입니까? 하나님의 대변인입니다. 하나님의 대변인을 장로가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장로 역할을 잘 감당하셔서 하나님 주변에 선 스무 네 사람의 장로 같은 장로가 되시고, 여러분들 가운데서 많은 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귀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장로가 이 고난에서 구원받은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복이 있다고 발표합니다.
그 첫 번째는, 본문 15절 맨 위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여러 번 만났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는 한 번도 못 만났습니다. 아마 지금 찾아간다고 하면 청와대사람들이 저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한 5년 정도 하면서 온갖 욕을 다 먹는 대통령도 그렇게 만나기 힘든데, 세상의 주인이신 존귀한 하나님을 만나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서는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검찰에 소환되면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외국으로 도망가는 등 별별 짓을 다합니다. 국회의원들은 국회 속에 숨는 일도 합니다. 죄가 있으면 그렇습니다.
땅강아지를 아십니까? 강아지처럼 생긴 작은 벌레인데 옛날에는 많았지만 요즘은 잘 안 보입니다. 이 땅강아지들은 해가 뜨면 땅 속으로 들어가려고 얼마나 서두르는지 모릅니다. 해를 보면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가면 그럴 것입니다. 두려워서 감히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난 받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고 싶어서 그 날이 기다려집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하나의 모습이 피하는 것입니다. 도망갑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도 도망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만나도 죄지은 사람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합니다. 쳐다보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믿음을 지키고 바르게 산 사람, 충성한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는 그 시간이 기다려질 것입니다.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의 시간을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충성한 사람들은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험 준비를 잘 한 사람들은 시험 보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첫 번째가 그것입니다. 적지 않은 복입니다
두 번째는 15절 가운데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어떻게 복이냐고요? 해 보면 압니다. 높은 사람 옆에서 일을 한 번만 해보아도 압니다. 회사의 회장님 제일 측근에서 일해보아도 그것을 알게 됩니다. 일만 합니까? 영광을 같이 누리게 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어느 당의 대통령 후보 중 대통령 옆에 있던 비서가 있습니다. 대통령 비서를 한 그 영광을 가지고 대통령 후보에 나섰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최고를 모시는 자리란 그런 자리라는 것입니다. 일만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라고 말씀하십니다.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누리는 좋은 것을 함께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15절 마지막에 있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리’ 라는 말씀입니다.
어제 캠핑 도구를 파는 홈쇼핑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도구들이 좋아졌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캠핑 장비는 정말로 열악했습니다. 홈쇼핑에서 본 것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늘막, 바닥, 위 모든 것이 정말로 탐났습니다. 몇 십만 원 하는 돈이 정말로 아깝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텐트가 좋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보호입니다. 위로부터도 보호받고 땅으로부터도 보호받고 옆으로부터도 다 보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하시겠다는 의미에서 장막을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왜 죽음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가장 큰 이유가, 죽고 난 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죽음 후에 대해 성경은 무저갱이라는 말을 씁니다. 바닥이 없는 곳을 말합니다. 끝이 없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잠깐 미끄러졌다 끝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계속 떨어지는 것은 너무나 두렵고 힘든 일입니다. 가위눌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도망가도 도망가도 한이 없고, 떨어져도 떨어져도 한이 없는 무저갱입니다. 또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말을 성경은 많이 합니다. 죽음 후에 대해 어떤 사람은 ‘지독한 고독’이라는 말합니다. 아무리 가도 사람 하나가 없고, 또 사람이 있다 해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릅니다. 외로움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십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외로움 때문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 죽음 후의 일에 대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령, 혼령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는 뱀과 벌레가 수없이 달려드는 이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장막을 말씀하시는 것은, 죽음 후 이런 것 또 죽음 이전에 우리에게 혹 어떤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철저하게 보호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충성하고 믿음을 잘 지키는 것 때문에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복을 받게 되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16절에서도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억울한 고난을 당한 성도들에게 그 은혜를 주시겠다, 그리고 16절에는 여기에 더해 ‘내가 너희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도 부족한 것 없이 채워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네 번째 17절입니다. 17절 후반부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눈물은 대표적으로 모든 고통입니다. 슬픔과 서러움과 수고, 땀 흘린 것입니다. 땀을 흘릴 때는 하나님께서 땀을 닦아주시고, 서러운 눈물을 흘릴 때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시면 땅에서 몇 십 년 그런 고난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한 순간 다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확실합니다. 이것을 경험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래 수고가 많았지?’ 라고 말씀하신다면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아무리 많은 돈을, 아무리 안락한 삶을 살아도 위로가 되지 않던 것이 하나님의 이 한 마디로 틀림없이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여러분은 ‘이럴 줄 알았다면 내가 고난을 더 받을 걸, 땅에서 수고를 더 할걸’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년은 매우 덥습니다. 열대야가 며칠간 이어지고 있는 금년에도 여름 성경학교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 수고가 참 많았습니다. 많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여름 교회학교뿐만 아니라 늘 그렇습니다. 교사들뿐만 아니라 다른 봉사자들도 수고가 참 많습니다. 오늘 차량 봉사하시는 분들도 더운데 수고가 많았습니다. 겨울에는 또 얼마나 춥습니까? 찬양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대는 그냥 앉아서 노래하는 것 같지만 참 힘듭니다. 적어도 한 시간 전에는 다 모여서 연습해야하는데, 게다가 좋은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싫은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지휘자는 또 제대로 못하면 따로 공부까지 시킵니다. 끝나도 곧바로 못가고 적어도 한 시간은 연습해야합니다. 어떤 찬양대는 회비까지 내라고 합니다.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봉사자들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얼마나 수고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다 갚아주십니다. 오늘 말씀하신 이 모든 은혜로 갚아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십시오. ‘잘 하였도다 착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19:1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깊이 기억하십시오. 특별히 봉사하시는 분들, 땀 흘리신 분들, 하나님 때문에 눈물 흘리신 분들 잘 기억하십시오.
열 고을이라는 의미가 어떤 것입니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 현실적은 복의 뉘앙스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천국에 가고 난 뒤에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챙겨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들으십시오. ‘잘 하였도다 착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19:17) 주님의 이 말씀은 반드시 말씀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