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금식(마태복음6:16~18)
온전한 금식
마태복음6:16~18
어떤 목사님에게 멋진 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멋기게 생기기는 했지만 말귀를 못 알아들었습니다. 멋지게 생기기도 하고 말귀도 알아들으면 좋을 텐데 이런 일은 사람에게도 말에게도 참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단 두 마디 말은 알아듣습니다. 말을 달리게 하고 싶을 때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하면 되고, 멈추고 싶으면 ‘아멘’ 하면 됩니다. 이 목사님이 말을 팔게 되었습니다. 말을 산 사람은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말을 팔면서 달리게 하고 싶을 때와 멈추게 하고 싶을 때 하는 말을 잘 기억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이 말을 타고 산길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위험한 낭떠러지가 나타났는데 긴장했던 탓인지 그만 말을 멈출 때 쓰는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엉겁결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말했더니 위험한 벼랑길에서 말이 달려 혼이 났습니다. 그러다가 아찔한 절벽 가까이 가서야 비로소 ‘아멘’이라는 말을 생각해냈습니다. ‘아멘’ 이라고 했더니 그 말이 멈추었습니다. 위기를 잘 넘긴 그 분은 말을 탈 때가 되면 아주 자연스럽게 ‘찬양합니다.’ ‘아멘’이라는 말을 잘 했다고 합니다.
참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필요한 몇 가지 삶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대표적으로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대표적으로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것 즉 도와주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영적인 생활입니다. 기독교 신앙생활로 대단히 중요하고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각별히 주의해야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오늘 본문을 말씀하시기 전 맨 처음 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그런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첫 번째인 하나님과의 관계인 기도, 두 번째인 이웃과의 관계인 구제에 이어 세 번째인 자기 자신과의 관계인 금식에 대해서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말라’ 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는 금식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금식을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최소한의 금식은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금식과는 담을 쌓았습니까? 나는 금식과는 관계없고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금식은 아예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최근 한국 기독교인들의 경향은 뒤의 둘인 것 같습니다. 나는 체질상 혹은 이런 저런 이유로 금식과는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거나, 요즘 같은 세상에 마음에 없는 형식적인 행위는 필요 없다, 그것은 참된 기독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이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먼저 나는 체질적으로 금식과 맞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체질적으로 맞아서 기독교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내 체질과 맞고 내 삶의 스타일과 맞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는 결단이고 이제부터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겠다는 결심이고 결의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 신앙생활이 내게 맞고 맞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내가 순종하겠다고 하나님과 약속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나하고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기 전의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금식에 대해 생각할 때, 성경이 금식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거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 뒤의 것, ‘마음에 없는 행위주의’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마음에 없는 행위주의는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지나치게 반발하다보니 아예 금식을 생각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금식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성경은 금식에 대해서 상당히 중요하게 말씀하시고 여러 군데에서 상당히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왕 여호사밧 대에 이웃의 나라들이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여호사밧은 아주 희한한 방법으로 적들을 통쾌하게 무찔렀습니다. 그가 행한 방법은 찬양대를 진영의 앞에 앞장세워 먼저 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길 수없는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예상 밖으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방법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여호사밧은 위기 때 온 백성들에게 이 나라의 위기를 위해서 자기와 함께 하나님께 금식기도하자고 선포했습니다. 금식기도한 결과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길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길을 받는 길입니다.
에스더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현대 기독교인들 가운데 에스더라는 이름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 민족들이 전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담보로 하고 왕 앞에 나가서 자기 동족들을 위해 부탁하였습니다. 당시 그것은 에스더에게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때 에스더는 왕에게 감히 가까이 나가지도 못했고 이런 저런 부탁할 정도가 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에스더는 죽음을 각오하고 왕에게 나가서 그 어려운 부탁을 하였는데 에스더를 그처럼 대단한 각오를 하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에스더는 유대민족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위기 때에 왕에게 나가서 부탁하려고 하니 여러분들은 나를 위해서, 이 일을 위해서 나와 함께 금식기도하자고 금식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금식기도가 이런 귀한 은혜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조국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기도가 막 시작하자 말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정말로 놀랍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빨리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기도를 시작하자 말자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네 기도가 응답되었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때 다니엘이 드린 기도가 바로 금식기도였습니다.
성경 최고의 평신도 지도자 느헤미야도 조국의 슬픈 소식을 듣고 땅바닥에 앉아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하나님, 내가 이렇게 슬픔을 당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안락한 삶을 사는데 이대로 있을 수 없으니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기도했더니 느헤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게 됩니다. 기도만 하고, 부탁만 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조국과 동포들을 위해서 부귀영화와 안위를 뒤로 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 계기가 바로 금식기도였습니다. 금식기도 할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 교회는 대단한 일을 하게 됩니다. 교회 기둥 같은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한 일입니다. 그때 안디옥 교회가 그런 놀라운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그 일을 지시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된 계기가 바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했던 금식기도였습니다.
우리들은 자주 길을 알지 못하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힘들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과연 그 분들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생명을 걸고 기도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그 어려움을 금식기도로 헤쳐 나갔습니다. 이만큼 성경은 금식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가정생활 30년을 마치고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에 광야에 나가서 사십 일간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었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일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좋은 모본입니다. 금식기도가 이처럼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금식을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혹은 현실에 있어서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은 크게 잘못 된 것이고 잘못 안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금식이란 무엇인가? 금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금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금식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성경은 사람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영/‘spirit’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혼으로 구성되어있다, ‘mind’ 즉 마음입니다. 세 번째는 육신/육체/몸/‘body’로 구성되어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 조심할 것은 우리 몸과 영과 혼과 육을 말할 때 구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단은 항상 여기서 나옵니다. 이 셋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특히 육체, 우리 몸은 영과 정신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이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을 추구하게 됩니다. 금식하면 배가 고프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금식입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의 금식은 단지 음식만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음료수만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것이라면 다른 것까지, 예를 들면 게임이나 오락, 놀러가는 것 등 이런 것들을 다 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금식입니다
두 번째 ‘금식의 목적이 무엇인가?’입니다.
기독교의 금식은 직접적인 응답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기도하니 나를 죽이지 않으시려면 내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 금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또 ‘어떤 일이 있어도 이때까지는 해주셔야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 금식의 목적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의 금식은 금식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합니다. 금식을 위한 금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내용 중에 금식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 금식은 금식이 아닙니다. 날짜를 정해두고 그 날은 금식해야한다고 하는 금식도 참된 금식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막2:19) 금식할 때가 따로 있지 금식하지 말아야할 때 금식하는 것은 기독교의 금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2:20)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금식은 기계적으로 혹은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금식은 직접적인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목적을 가집니다.
기독교인들은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으로 결합이 됩니다.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속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마음을 다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할 것이고 어떤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지 잘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결합되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다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따로 기도하지 않아도, 일일이 요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인도합니다. 다 허락하시고 다 내려주십니다. 하나님 마음을 다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로 결합된 사람들은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진 것이 없고 다 응답되어집니다. 하나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8장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에 대해서 ‘억울하게 묶인 사람들을 풀어주는 것이고 멍에를 끌러주는 것이다, 압제 받는 사람들을 석방시켜 주고 모든 멍에를 깨뜨리는 것이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금식이고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들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들을 입혀주고 자기 부모 형제 일가친척을 모르는 체 하지 아니하고 돌봐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금식을 하면 이런 하나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나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나에게는 놀라운 결과가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습니다. 요청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 아시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 모든 것들이 채워집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일일이 요구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챙겨주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진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야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요한복음 15장 7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자칫 잘못하면 앞의 말을 빼버리고 뒷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라는 말만 생각할 수 있는데 앞의 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라는 말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채워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치 비굴하게 애원하듯 간구하는 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냥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시는 정도가 되어야 예수님 믿는 사람 같지 않습니까? 기왕 예수를 믿으면 이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8절에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부 다 아십니다. 다만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로 결합된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십니다.
이제 세 번째입니다. 금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주님께서 주의를 부탁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금식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금식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금식은 저 사람 신앙 좋다, 믿음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과는 관계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기도도 똑 같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약 사람에게 들리게 하는 기도라면 그 기도는 당신과는 관계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금식은 평소 모습 그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6:17) 특별한 기름도 아니고 따로 얼굴을 씻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 하던 그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금식 기도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고 하나님과만 상대하여 금식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금식은 정말로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리고 금식에는 대단한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죽도록 고생하고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1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주님께서 상 줄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금식기도를 바로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상을 받습니다. 반드시 받습니다. 18절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상은 정말로 놀라운 상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받을 수 없는 상, 이 세상의 어떤 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상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상을 받으십시오.
바른 금식하는 사람들에게 이사야 58장에서 하나님은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억울한 사람들, 압제 받는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떠돌며 고생한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내 골육을 잘 돌보고 챙겨주는 그런 금식을 하는 사람들, 그런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하기만 하면 너의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올 것이다, 너의 상처는 금시 아물어 떳떳한 발걸음으로 전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너의 뒤를 받쳐줄 것이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네가 부르짖으면 내가 대답하겠다, 네가 살려달라고 외치기만 하면 내가 살려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