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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찾습니다(빌립보서 4:4-7)

분당소망교회 2013. 3. 12. 11:09

 

평화를 찾습니다

 

 

 

 

빌립보서 4:4~7

 

 

중세기 어느 수도원에 낯선 사람이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수도사가 나가서 묻습니다. “누구를 찾습니까?” 나그네가 조용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평화를 찾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평화’ 참 좋은 이야기입니다. 인류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양의 동서를 무론합니다. 동양도 서양도 아프리카도 미주도 아시아도 그렇습니다. 남자든지 여자든지 나이가 들었든지 안 들었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이 다 평화를 갈구합니다.

 

저에게는 평화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성경 구절 두 군데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맨 처음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여자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때 맨 처음에 하신 인사가 바로 ‘평안하냐’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고대 북이스라엘에 요람이라는 왕입니다. 요람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기회를 주시면서 기다렸지만 결국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시고 처단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장군 예후에게 당신의 종을 통해서 요단 왕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예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군대를 데리고 출동합니다. 저 멀리서 파수꾼이 이 광경을 보고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합니다. 이 보고를 받은 왕은 불안한 마음에 사람을 보냅니다. 그 때, 가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평안하냐?‘ 라고 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영어 성경의 ‘Do you come in peace?'가 조금 더 우리에게 와 닿습니다. 보낸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예후 장군에게 돌아서고 만 것입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판단한 왕이 불안한 마음에 직접 말을 타고 달려 나갔습니다. 가서 보니 장군 예후였습니다. 그때 왕이 예후를 보고 인사한 말이 마찬가지로 ’평안하냐?‘ 영어 성경은 ’Have you come in peac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를 지어서 심판을 받는 그 순간에도 자기는 평화를 누리기 원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죄를 지어서 하나님 마음을 얼마나 불편하게 했습니까? 죄를 지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평화를 빼앗은 사람이었지만 정작 자기는 평화를 그렇게 소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는 좋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 이래로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를 두고 논의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어떻게 하면 내가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내 가정이 평화로울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세계가 평화로울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회의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바로 며칠 전에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인질사태를 보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터지고 저기서 터지고 국내에서 터지고 밖에서 터집니다. 교통사고 같은 사고도 터집니다. 그래서 평화가 없습니다. 이 평화를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평화를 어떻게 하면 얻는가에 대해 중요한 답을 주십니다.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얻고 싶으냐? 평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하라.’

 

첫 번째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기뻐하라는 것은 잠시만 기뻐하라, 기뻐할 만할 때만 기뻐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 어떤 일이 있든지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뻐하는 것이 힘듭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겠지만 기뻐할만한 일도 없음에도 기뻐하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 살면서 기뻐할 만한 일이 자주 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긍정보다 부정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정말로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나이를 좋게 드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평안하고 부드럽고 많은 사람들에게 더 존경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속에서는 이런 향내가 나는 기독교인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상하게 부정이 더 많아집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밝음보다는 어둠이 더 많아집니다. 얼굴이 밝았는데 세월이 지나갈수록 어두워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확연히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아이들은 한없이 밝습니다. 얼마나 맑고 깨끗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들어가고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마치 인생의 짐을 다 짊어지고 가는 학생들 같습니다. 우리도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한없이 기뻐합니다. 때로는 이 기쁨이 마냥 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틈에 우리 속에 있던 기쁨이 사라져버리고 우리들 마음속에는 언제 어디서 나왔는지 나쁜 기억, 나쁜 감정만 남아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례를 보러 갔는데 <사랑의 기쁨> 이란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깜짝 놀라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바꾸라고 했습니다. 제목은 <사랑의 기쁨>이지만 내용은 사랑의 기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아있네.’ 이것이 사실입니다. 사랑할 때는 그 사람만 있으면 한없이 행복할 것 같은데 그 행복이, 그 기쁨이 어느덧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 저런 어려움, 오히려 슬픔만 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자꾸 어둠이 우리를 물들입니다. 그래서 어깨에 자꾸 중압감이 들어가고 사십견, 오십견도 되고 여기저기 몸에 멍들기도 하고 마음에 멍이 들기도 합니다. 아픈 상처만 많고 슬픔만 많이 남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기뻐하는 것은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기쁨을 얻겠다, 기뻐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의지적으로 힘을 쓰고 애를 써야합니다. 억지로 해야 합니다. 기뻐하려고 해야 합니다.

 

요즘 웃음치료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TV에서 암에 걸린 사람들을 모아놓고 치료하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강사가 웃으라고 하지만 처음에는 사람들이 잘 웃지 못합니다. 강사가 이들에게 억지로라도 웃으라고 합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저렇게 억지로 웃어서 무슨 치료가 될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정말로 웃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연출인지 알고 직접 시험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되다가 한참 억지로 웃었더니 억지웃음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혼자서 자주 웃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혼자서 웃기도 하고 혼자 말도 많이 합니다. 날아가는 새를 보고 이야기하고 고라니들을 보고 이야기합니다. 상당히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웃을만하지 못해도 웃어라 그래야 마음의 평화가 생겨난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는 관용을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관용이라는 말을 헬라말로 하면 ‘에피에이케이야’ 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말들을 추려보면 겸손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온화한 마음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사 잘하고 허리 잘 굽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항상 나보다 낫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 나보다는 더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 의견을 존중해주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관용이라고 합니다. 화합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참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과 같이 어우러져 가는 그런 마음도 관용이라고 말합니다. 아내와 의견이 잘 맞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아내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할 때 혹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아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혹시라도 아내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줄 알고 같이 어우러질 줄도 아는 마음입니다. 아버님이 연세가 드셔서 시원찮은 모습을 보이면 제대로 자란 아들 같으면 아버지가 연세가 드셨구나, 그러나 아버지 세월에는 저 말씀이 더 맞았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아버지 말씀을 받아들일 줄도 알고 같이 어우러져서 나갈 줄 아는 마음이 바로 관용입니다. 그래서 관용을 넓은 마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좋은 것을 위해서라면 융통성 있게 해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법으로는 아닌 것 같지만 선한 일, 좋은 일을 위해서라면 법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관습도 관행도 관례도 규정규칙도 조금 융통성 있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위해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마음을 관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법을 조금 뛰어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를 수 있는 마음, 이런 것을 관용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창녀는 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죄인의 친구라고 불렀는데 그때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창녀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한 번도 창녀를 비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까닭은 그 당시 여성들은 남편의 도움 없이, 남편이 챙겨주지 않으면 혼자로서는 살아갈 길이 아예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죽었든지 이혼을 당한 경우에는 그 길밖에 없었습니다.

 

며칠 전에 일간지 하나에 한 여성이 인터뷰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그 여성이 정말로 용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여성은 창녀였습니다. 그 여성은 성매매 단속법을 위헌으로 제소를 했는데 사람들이 성매매 하는 사람, 매춘하는 사람, 창녀들을 비판하고 매도할 줄은 알지만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어려우면 매춘하면서 살아갈까를 생각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터뷰에 응했다고 말합니다. 조금은 가렸지만 아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사진도 실렸습니다. 얼굴까지 실어가면서 인터뷰에 나왔습니다. 그 여성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부모 두 분을 다 잃었습니다. 미용기술을 배워 미용실에서 일을 했는데 스무 다섯 살에 다리를 다쳐서 서있기 힘들어 미용 일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일을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장애인처럼 다리를 다친 자기를 써주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산인 몸을 상품으로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이것뿐입니다.’ 그 여성이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심정을 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관용의 주님이십니다.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왔습니다. 사람들이 그 여인을 처형하기 위해서 돌멩이를 들고 둘러섰습니다. 모두 다 당연하게 그 여인은 돌에 맞아서 죽어야한다고 생각했을 때 예수님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십시오.’ 라고 말씀하시자 돌로 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돌을 들고 있는 그 사람들까지도 이미 관용을 받고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에는 안식일에 병자 치료하는 것을 법으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법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안식일에 환자를 치료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안식일 말고 그 다음날 치료하면 어땠을까?’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요, 정말로 관용이 없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주님이 내일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내일은 주님께나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 심정은 오늘 당장 고쳐주고 싶으신 것이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고쳐주고 싶으셨고 하루라도 먼저 먹여주고 입혀주고 싶으셨습니다. 어서 도와주고 싶으셨고 손에 무어라도 쥐어주고 싶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환자의 고통이 너무 딱했기 때문에, 굶고 있는 사람의 고통이 너무나 안쓰러웠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식일 다음날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관용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용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은 그 깜깜하고 힘든 가운데 일어서지 않았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도 그 역사의 증인이 될 만한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 증인 중 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다는 말이 사실 우리 민족에게 딱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풀어주셔서 우리가 이렇게 일어서지 않았습니까?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조금 더하다, 덜하다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만 그렇지 하나님께는 똑같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셔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관용을 누리고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으신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넓은 가슴을 가져라, 가슴을 넓히라고 말씀하십니다. 넓은 가슴을 가진 멋진 기독교인이 되어서 이 사람도 품어주고 저 사람에게도 관용을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이이 기독교인입니다.

 

세상이 각박합니다. 삭막합니다. 우리들 탓입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넓은 가슴을 보여주지 않아서, 기독교인들이 관용이 어떤 것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지 못해서 세상이 삭막하고 각박합니다. 품을 줄 알아야하고 넓힐 줄 알아야합니다. 이런 삶을 살 때는 물론 부담이 따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담을 좀 지더라도 관용을 베풀 때 희한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들 속에 있던 절대로 없어지지 아니하던 걱정과 근심 때로는 분노, 섭섭함, 노력을 하고 힘을 써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슬픔이 어느새 사라지게 됩니다. 참 희한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 때 어느 새 내 마음속에 슬픔과 걱정과 근심과 분노 대신에 평화가 자리를 잡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감사의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마다 기도의 내용이 다릅니다. 상황도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상황이든지 기도가 어떤 내용이든지 간에 감사의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너무 너무 어렵고 힘들고 급박할 때 감사의 기도가 잘 나오지 않지만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하나님의 그 말씀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렇게 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물어보고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더 절박할 때일수록 감사의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합니다.

 

30년 동안 알코올 중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남편을 위해서 이미 30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아들도 기도했습니다. 나중에는 결혼한 아내까지도 힘을 모아서 기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알코올 중독자의 아들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에서 특별한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환경을 바꾸어주실 것을 요구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에 더 충만하게 임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들이 크게 뉘우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수많은 세월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했지만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충격을 받은 이 아들은 그 깨달음을 자기 아내와 나눕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즉시 엎드려서 하나님께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날입니다. 그 날은 토요일이라 아들 부부는 부모님과 함께 늘 하던 대로 모여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는 식사를 하자마자 자리를 떠났는데 그날만은 이상하게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실 때 아버지가 뜻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라디오에서 마약 중독자가 신앙으로 마약을 끊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런 일이 정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날 참으로 오랜만에 가족들은 식사 후에 함께 오랫동안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그 얼마 후에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은 완전히 치료가 된 것입니다. 아들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바꾸어달라고 주님께 기도한 것이 30년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기도하고 찬양한 것은 단 하루뿐이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지막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라고 매듭을 짓습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은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평화를 원하십니까? 정말로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 말씀 그대로 따라서 사십시오. 항상 기뻐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푸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실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의 평화로 가득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