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3)- 신명기 4: 15~24
신명기(3)
신명기 4: 15~24
430년간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드디어 이집트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바로 앞에서 결정적인 잘못을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놓으시고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들은 다시 광야로 돌아와서 38년간 방황하였습니다.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지나가고 난 뒤 드디어 광야 생활 40년이 다 되었을 무렵에 다시 가나안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기만 하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 이때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모아놓고 설교를 합니다. 이것이 ‘신명기’입니다.
맨 처음에는 40년 광야 방황이 왜 있었던가를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면 될 것인데 이렇게 저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그것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다시 교육을 받고 난 뒤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설교했습니다.
모세가 설교하는 요점은, 그냥 들어갈 수 있었던 가나안에 왜 들어가지 못하고 38년이나 더 많은 세월을 광야에서 지냈는가?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을 되풀이하지 말고 그런 실패를 다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하나님 법도에 순종하면 죽지 않고 살 것이고 망하지 않고 흥할 것이며 복락의 땅 가나안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함께 모세가 강하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2절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빼거나 더하지 말고 말씀하는 그대로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별 것 아닌 내용 같지만 이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의 많은 문제의 근원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감하는 것 즉 넣고 빼는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나치게 해석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 말씀인 것처럼 전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 말씀에 인간의 생각, 인간의 사상을 더해서 말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인간의 생각이고 인간의 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설교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생각할 것은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말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말이 우리들에게 익숙하기 때문에 그것이 편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들에게 쉽지가 않고 익숙하지 않고 끌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보다는 사람의 말을 전하게 될 때 그것을 더 좋아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전하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큰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짧은 지식과 짧은 경험으로 하나님 말씀을 함부로 재단합니다. 이것은 이런 뜻으로, 저것은 저런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은 것이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 해석해야하고 어디까지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지 상당히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도 조심해야하고 하나님 말씀도 조심해야합니다. 하나님도 하나님 말씀도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 떠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다윗이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려다 한 실패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일반 사람의 집에 있었기에 다윗은 이것은 아니다 싶어 왕이 되자마자 맨 처음 한 일이 법궤를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좋은 일이고 좋은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웃사라는 사람이 하나님 법궤를 손으로 만지다 그 자리에서 참변을 당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이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는지 모릅니다. 좋은 일이고 정말로 좋은 맘으로 했으면 어떻게 하든지 될 것이라는 안이한 마음, 쉽게 생각하는 마음 이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깜짝 놀라 하나님 법은 그렇게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포기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거기서 다윗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처럼 우리 할아버지처럼 좋지만 대단히 두려워해야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도 함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성전을 짓는 일이 있을 때 다윗은 이것을 알고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성전 짓는 일이 얼마나 좋습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은 텐트 속에 계셨는데 이제 하나님의 궤를 제대로 모시겠다고 생각하여 성전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난번에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 법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든지 마음대로 해도 될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종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 성전을 짓고 싶은데 지어도 괜찮은지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보기에도 얼마든지 괜찮을 것 같아 그렇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나타나셔서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또 큰 실패를 할 뻔했습니다. 큰일 날 뻔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제대로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아십시오. 이것은 괜찮을 것 같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경우의 수를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가감하지 말라 그대로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싯딤이라는 곳에서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모압 여인들을 만나 사귀다 그만 성범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보다 더 크게 번져나가게 됩니다. 모압 여인들을 만나서 성범죄를 저지른 그 다음 순서는 당연하게 바알이라는 이방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순서는 다를 수 있겠지만 이 둘은 항상 같이 갑니다. 바알이라는 종교는 죄악과 같이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 때문에 바알 종교에 대해서 그렇게 강하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절대로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알 종교는 곧 죄악이고 그 죄악은 곧 여러분들을 멸망의 길로 이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왜 죄악을 짓는 종교, 결국은 망하는 길로 가는가? 그것은 아니다, 여호와, 여호와의 종교 이것을 꼭 붙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8절)
바알 종교와 비교하든지 어떤 종교와 비교하든 간에 기독교, 하나님의 종교, 하나님 신앙은 정의롭습니다. 성경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구약과 신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악이 하나도 없습니다.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어디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쌍하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아껴라, 혹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주머니를 너무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을 도우라, 성경은 전부 다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악한 일을 하지 말라, 못된 짓을 하지 말라,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악한 일을 하면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한다, 반드시 심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면 우리가 혹 악하고 못된 일을 해도 좀 봐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종교입니다. 왜 이런 공의로운 종교를 버리고 악한 길로 가는가? 그것은 잠시는 좋을지 몰라도 결국은 망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압 여인들과 죄를 지은 이스라엘 사람들 2만 4천명을 처단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3절)
이 말씀과 함께 모세가 부탁합니다. ‘여러분, 부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붙어있으십시오.’ 이 말씀은 오늘날 여러분들에게도 똑같이 하십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부디 하나님께 붙어있으십시오!’ 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면 죽습니다. 멸망합니다. 그 하나님의 길은 공의롭고 정의로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좀 불편하고 그 길이 좁고 험하고 여러분에게 부담도 되고 힘든 일이 좀 있어도 그 길로 가면 여러분들은 결국 흥하게 됩니다.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이 이 험악한 세상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유혹이 많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많습니다. 그것들은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어둠과 유혹은 우리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과 유혹에 한 번 지고나면 우리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 2만 4천명이 멸망했듯이 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주저앉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어있으면 아무리 강한 어둠, 강한 유혹이 미혹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 붙어있으십시오.
그런데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우리 인간존재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면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2만 4천명이나 죽었으니 나는 절대로 저 길로 가지 말아야하겠다고 잠시는 생각하고 결단도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립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어느 틈에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그렇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그러면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내가 괴롭고 힘든 일들, 슬프고 서럽고 억울한 일들은 잘 기억하고 그것을 붙들고 늘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상처를 받고 또 받습니다. 10년 전에 받은 상처를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것들은 잊어버립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잘해야지, 내가 바른 신앙을 해야지, 열심히 살겠다는 것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받을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노력해야합니다. 힘을 써야합니다. 그냥 잘되지 않습니다. 인간 존재가 그것을 잘 기억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편한 길을 자꾸 선호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당부하십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9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틈만 나면 성경을 보십시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절대로 별것 아닌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성적인 가르침뿐만 아니라 신비의 능력까지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면서 결단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힘을 주시고 여러분들을 인도해주십니다. 예배당은 별것 아닙니다. 그러나 이 예배당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틈이 나고 시간이 될 때마다 힘써서 예배당을 찾으십시오. 할 일도 많으니 오래 계시지 말고 잠깐이라도 와서 하나님께 잠시 기도하십시오. 지나갈 때 잠깐 들러 기도하고 집으로 가는 것,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일을 보는 것, 특별히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예배당에 와서 잠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일인지 모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와 같이 예배당만 빠져나가면 전부 다 불신앙의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할 수만 있으면 새벽도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좋습니다. 혹 새벽에 나오다 건강을 잃어버리지 않을지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새벽 지키다 건강 잃어버리는 사람보다 건강 찾은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가능하면 수요예배, 교회에서 하는 중보기도 모임, 선교 기도모임 다 자주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모든 노력을 하여야하는데 그 노력 중에서 아주 큰 부분의 하나가 교육입니다. 다른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이고 특별히 여러분의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9절에서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명령입니다. 10절에서는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어머니 되시는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잘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아버지도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힘을 써야하겠지만 책임적인 것이 어머니입니다.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성경을 보여주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야합니다. 때로는 잔소리 같고 미련스러운 것 같아도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머니 되신 여러분들에게 여기에 대해서 다 일일이 물으실 것입니다. 보고 계시고 다 판단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아주 강력하게 강조하신 것이 있습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11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형상을 만들까 하여 얼굴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또 23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형상은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뿐만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얼마나 강조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형상, 우상 금지에 대해서 강조하신 까닭은 하나님 법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까닭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조하실 정도로 형상 만들기를 좋아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확실하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을 자꾸 찾고 만들고 따라갑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그것에 빠지게 됩니다.
돈도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자꾸 생각하고 사모하다보면 돈에 빠져버립니다. 돈에 빠지면 다음에 당연하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많이 사모하고 많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아예 가까이 하지 말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강조하신 까닭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는 그 자체입니다.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제일 먼저 적용시켜야할 것이 그것입니다.
형상 만들지 말라고 하셨으면 그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우리가 할 것은 단순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 만들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들지 말라고 하셨으면 만들지 않는 것 이것이 신앙에서 제일 좋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저렇게 변명을 합니다. 이것은 우상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더 잘 믿으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믿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말이 되든지 안 되든지, 일리가 있든 없든 간에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셨으면 무조건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해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 또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예수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도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한 사람은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 우리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서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열 둘 중에서 가룟 유다의 노릇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만들지 말라고 하셨으면 대부분 만들지 않겠지만 꼭 만드는 그런 사람에 여러분이 포함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만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내가 오늘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25-27절).. 천하만국에 분명하게 선포하는 바, 내가 이런 벌을 내리는지 아닌지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을 고생하고 얻은 가나안, 죽을 고생하고 얻는 재산, 건강, 힘들여서 키운 자식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서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서 멸망하게 될 것이고 남은 사람이 별로 없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8절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유머와 위트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여러분들에게 우상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럼에도 기어코 만들고 섬기면 차라리 내가 여러분들을 실컷 섬기도록 하겠다, 포로로 끌려가게 거기서 그렇게 하게 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제가 본 만화 중에 돈을 많이 밝히고 소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자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물건을 사러 갔습니다. 돈이 얼마 없어서 고민하다 물건을 샀는데 거기서는 내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희한한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물건을 사도 또 돈을 주는 것입니다. 집을 샀는데 집 산 것만큼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 신이 나서 이것저것 마구 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물건을 사고 받은 돈이 너무 많아서 쌓아 놓을 곳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은행에 예금을 맡기면 예금의 수수료가 맡기는 돈보다 더 많습니다. 또 그 나라의 법에 돈을 버리게 되면 그 죄가 중합니다. 이 사람은 도리가 없어서 밤중에 살금 살금 나가서 돈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찰이 나타나서 체포해서 벌을 주는데 죽을 고생을 다했습니다. 차라리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나라가 좋겠다고 아우성치다 꿈에서 깨어나는 내용이었습니다. 너 그렇게 우상 섬기는 것을 원하면 그런 나라에 포로로 보내줄테니까 거기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 우상을 실컷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기어이 열 둘 중에 하나는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종하지만 꼭 그 중에서 몇 사람은 순종하지 않는 것을 하나께서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 경우에라도 여러분은 그런 죄를 지어 나는 이제 망했다, 이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다고 할지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주는 나는 자비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라도 실수해서, 혹시라도 잘못 생각해서 순종하지 못하는 일이 있고, 혹시라도 이제는 망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시고 그 자비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시 돌이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29-31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잘못하게 되면 무서운 벌을 주시고 심판을 하시는지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벌을 주시지 않고 심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완전히 망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십니다. 벌을 받고 얼른 정신 차리고 돌아와서 회복할 수 있도록, 완전한 멸망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아무리 더 이상 희망이 없고 소망이 없는 것 같아도 돌아오기만 하면 희망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벌을 주십니다.
이사야 1장에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라고 말씀하셨고 이사야 55장 7절에서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먼저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벌을 주시는지 때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보다 더 큰 벌을 주시는지에 대한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인간의 가장 큰 죄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죄보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것이 가장 악한 죄입니다.
언젠가 심방요청을 받아서 심방하여 상담을 하였는데 상당히 부자인 할머니가 통곡을 하시면서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모릅니다. 그 할머니는 얼마 전에 남편이 돌아가시면서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법에 따라서 자기도 받고 아들, 딸도 다 상속받았습니다. 다른 물건도 많았고 현찰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제가 듣기에도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찾아와서 엄마가 얼마를 받았는지 자꾸 묻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에게 가르쳐주면 불화가 일어나고 어려운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 내가 갈 때가 다 되었고 돈을 쓰지 않을 것이며 내가 가면 다 나누어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기어이 아들이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아들도 며느리도 안 봐도 되지만 손자, 손녀를 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차라리 이제라도 아들에게 얼마 받았는지 이야기해주고 손자손녀들을 만나야할 것인지 제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악한 아들입니다.
자기가 부모를 안 찾는 것도 큰 죄이고 부모에게 자기 자식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큰 죄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께 멀어지는 것도 큰 잘못이지만 여러분의 아들과 딸을, 여러분의 손자 손녀를 하나님께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아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것은 제대로 못해도 하나님께서 정말로 기뻐하시는 것을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자주 찾아가서 뵙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을 그저 하나님께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여기 제 손자, 손녀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예쁜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예쁘십니까?’ 그리고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든 간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데리고 가면 나중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귀하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바라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