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4)- 신명기 5: 7~21
신명기(4)
신명기 5: 7~21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이스라엘 만족은 쉽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순종한 이유 때문에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그 방황이 다 끝이 나고 이제 막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할 때, 지난번 실수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설교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설교 가운데 십계명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 법의 근본 혹은 핵심으로, 인간의 법으로 말한다면 헌법에 해당될 수 있는 십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모두 다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몇 개는 계명에 첨가한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 조금 다르게 하실 때에는 항상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십계명 중에서 몇 가지를 통해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다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
먼저 우상을 만들지 말라,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아주 특별한 표현을 하나 합니다. 9절 가운데를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질투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한다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아무도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질투하는 사람, 질투쟁이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본문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곳에서 서슴없이 쓰고 있습니다. 민수기 25장 11절에서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라고 말씀하시고 출애굽기 34장 14절에서는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 라고 말씀하시고 스가랴 1장 14절에서도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훔 1장 2절에서는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질투 정도가 아니라 질투 때문에 보복까지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32장 21절에서도 ‘그들이 하나님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셔서 너무 화가 나셨다는 말씀을 스스럼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3장 8잘에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땅의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 되리라’.. 하나님께서 너무 너무 질투하셔서 불이 나서 모든 것을 다 태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당신 스스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아주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종들조차도 그 말씀을 거리낌 없이 말씀합니다. 또 하나님의 종들이 그런 말을 하면 하나님이 괘씸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시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시편 79편 5절에서는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 이제질투 그만하십시오.’ 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32장 16절에서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라고 하나님의 질투에 대해서 하나님의 종들이 함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당신에 대해서 아주 당연한 듯이 당당하게 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종들조차도 하나님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고 함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데는 충분한 까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 당신을 위한 질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질투이고 여러분을 위한 질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지 아니하고 그냥 내버려두면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그것은 그들에게 불행입니다. 그들은 죽을 고생을 하게 되고 기어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돌아오는 것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평안하고 평화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고 풍요롭게 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질투를 해서라도 이스라엘을 챙기고 싶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이것을 너무나 잘 아시고 하나님의 종들도 이것을 압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를 하든지 무슨 소리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이 함부로 하는 말 같은 것도 스스럼없이 할 수 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다.’ 이것을 아주 잘 설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질투의 하나님이고 내가 질투 때문에 진노하고 그 모든 것을 불태울 것’이라는 말씀을 당연하고 쉽게 하시는지에 대한 까닭이 요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1-15)
우리 주님은 양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이 좋은 길인지 예수님은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양들이 아무리 좋아하고 원한다고 할지라도 그쪽으로 가면 망한다는 것을 목자는 알기 때문에 그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짜 목자는 양들이 망하든지 말든지 내 입에 들어오는 것이 많고 내 배만 부르면 거기에는 개의치 않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라는 좋지 않은 못된 소리를 듣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듣고 겁을 내어 돌아와서 잘살게 되기만 한다면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가짜 목자는 양들이 잘되든 못되든 개의치 않습니다. 내 아들이 아니고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 울음을 그칠 수만 있다면 단 것을 줍니다. 좋은 분이라는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심지어 나쁜 음식이라도 얼마든지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어머니, 아버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스라엘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까지도 다 바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질투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질투를 절대로 그냥 말씀으로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질투하십니다. 대강 질투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섭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편하게 생각하고 내 위주로 생각하다가 다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아십시오.
두 번째, 안식일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는 쉬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들만 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아들딸들 그리고 남자 종이든지 여자종이든지 모든 종들, 그 집에 머물고 있는 나그네들이든지 심지어는 소나 나귀 같은 가축까지도 안식일에는 철저하게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신명기 5장 14절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위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나 좋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만 좋으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일꾼들에게도 하인들에게도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나그네에게도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내 민족에게도 좋으신 하나님이고 남의 민족에게도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심지어는 소나 나귀나 가축에 대해서도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기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기독교가 되면 안 됩니다. 나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 계명에 덧붙인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라는 신명기 5장 15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로 얼마 전까지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처럼 쉬는 날에도 쉬지 못하고 죽도록 일만 하던 소나 나귀 같은 사람이었다, 그것을 기억하고 그때 얼마나 서글펐고 서러웠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네가 부리는 네 종, 남종이든지 여종이든지 돈을 주고 잠깐 여러분 집에 머물고 있는 나그네이든지 그 사람들의 아픔을 생각하고 그들을 쉬게 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소나 나귀도 똑같이 내가 창조한 내 피조물이니 그들도 쉬게 해주라는 말씀입니다.
먼저는 분명하게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이 명령을 하는 내가 누구냐? 여러분들이 노예로 있을 때, 여러분들이 죽도록 수고만 하고 있을 때 그 여러분들을 해방시켜준 나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딴 소리하지 말고 내 명령을 무조건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슴에서 여러분들은 무언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어떤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습니까? 상당히 무서운 경고가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들을 이집트 노예에서 해방시켜준 내가 여러분을 다시 그 자리로 돌려보낸다는 말씀입니다. 옛날에 노예살이 하던 그 노예의 자리로, 남종과 여종의 자리로, 소나 나귀처럼 쉬지 못하던 그런 자리로 다시 돌려보내겠다는 경고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안식일 계명에 덧붙인 말씀이 오늘 본문 외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하나님 법 전체를 말씀하시는 출애굽기 20장에 안식일을 말씀하시면서 왜 안식일에 쉬고 또 쉬게 하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11절에서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힘들게 일하셨기 때문에 피곤하셔서 쉬셔야하는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것은 압니다. 신이시기 때문에 쉬어야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곱째 날에 쉬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쉴 필요가 없는 하나님 나도 안식일에는 쉬었으니 여러분들도 이유 불문하고 안식일에는 무조건 쉬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괜찮으니까 안 쉬어도 된다, 또 저 사람은 안식일에도 일하는 것으로 계약을 했으니 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 계약이 하나님 법 앞에 무슨 힘을 쓸 수 있습니까? 무조건 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출애굽기 20장 11절에서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간단하게 말하면 내 말에 순종하여 안식일에 쉬는 자는 복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말씀을 종합하면 안식일은 무조건 쉬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쉬는 것입니다. 놀러가서 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안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편안하게 예배드리고 평안을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쉬어라, 다른 이유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인도 쉬고 종도 쉬고 소도 쉬고 나귀도 쉬고 모든 가축도 다 쉬라는 것입니다. 종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쉬고 종도 쉬게 하고 가축들도 쉬게 해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순종하여 안식일에 쉬고 쉬게 하는 사람에게 내가 복을 주겠다는 이것이 안식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계명에 하나님께서 ‘그리하면 너가 장수할 것이고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마 자주 들으셨을 것입니다. 신명기 5장 16절에서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으로 부끄럽고 가슴 아픈 말입니다. 나를 낳아주고 나를 길러주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얼마나 마땅한 일입니까? 인간으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법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십계명으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거기다 오늘 본문은 내가 그렇게 지시한대로 순종하면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이 마땅한 인간의 도리인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하나님의 표정을 보는 것 같습니다. 마땅하게 부모를 공경해야할 사람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보시고 단단히 화가 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향해서 상당히 무섭게 벼르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본문 속에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해는 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계속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부모 공경 그것 이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입니다. ‘내가 명령한 것이다, 내 명령을 지키지 아니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신5:9) 라고 당사자는 물론이고 삼사대까지 무섭게 징계를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을 받지 못함은 물론 벌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대신에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는 공경 자체를 이전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니라’(신5:10)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은혜이며, 어떤 사랑인지는 조금 전에 보았던 ‘내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라는 신명기 5장 16절 말씀입니다. 생명이 길다는 것은 오래 사는 것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요즘 이것 때문에 골치 아픈 어른들 많습니다. 백세시대라고 하는데 모아둔 것도 없고 어떻게 할지 걱정이 많은데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 신이 날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 나름대로 노후대책을 하여야하고 자녀들은 부모님을 잘 섬기고 나중에 부모님을 끝까지 모셔야하겠다고 당연하게 생각해야하겠지만 그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챙겨주시도록 하는 것,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공무원 연금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겠다고 하신 말씀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노후대책이 됩니다. 혹 나는 섬길 어머니, 아버님이 안 계시는데 어떻게 할지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저도 그렇고 아마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런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부모님은 많습니다. 우리 가까이도 많이 계시고 산 너머에 더 많이 계시고 바다 건너가면 섬길 부모님들이 또 계십니다. 섬길 우리 부모님들은 얼마든지 많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 분들을 공경하면 됩니다. 우리는 나중에 어차피 한 상에서 먹고 마실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생각해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나안 건너가기 바로 맞은편에 있습니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가면 가나안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가장 궁금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가나안 사람들과 전쟁해서 이길 수 있겠는가? 가나안 땅에는 무사히 들어갈 수 있겠는가? 거기서 제대로 잘 살 수 있는지..’ 이것이 제일 궁금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가장 궁금한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일언반구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대답입니다. 이것만 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만 하면 거기에 무사히 갈 수 있고 평화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말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가장 으뜸인 것이 이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할 노릇을 다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의 결정적인 마지막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리가 혹 나름대로 준비했다가 좀 모자라는 것이 있고 결핍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사람이 어떻게 잘 준비한 것보다 훨씬 더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가나안과 전쟁해서 승리하는 길, 우리가 평화롭게 사는 길,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하나님의 사람들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