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어떻게 사랑..(요한1서 5:7~11)

분당소망교회 2015. 10. 23. 11:27

어떻게 사랑..

 

     

요한15:7~11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부모는 아이를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할 수 있는 희생을 다 했습니다. 자신들에게도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지만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아이 뒤치다꺼리하느라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했고 아버지는 막노동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늘 불평을 하고 불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영 아닌 모습을 부모에게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불러서 약간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못된 말을 합니다, ‘엄마, 아빠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나요? 언제 나를 사랑한 적이 있나요? 왜 나를 낳으셨어요? 제가 낳아달라고 했나요?’ 아이의 이 말에 부모는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눈물이 핑 도는 벌건 눈을 감추기 위해서 방안으로 들어가셨고 어머니는 부엌에 들어가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했습니다. 끝끝내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죄를 더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없이 이스라엘을 교육시켜 복받을만한 사람이 되도록 하게 하시기 위해서 고된 시간을 주셨습니다. 70년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가서 어느 정도 반성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나고 돌아오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겉모습은 어느 정도 회복한 것 같았지만 속모습은 오히려 겉모습에 반비례해서 더 악해졌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버렸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떠들어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너무 속상하셔서 당신의 종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나는 절대 너희들을 버리지 않았다, 한 번도 너희들을 버린 적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들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너희들을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 말씀에 이스라엘은 또 다시 못된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억장이 무너져서 할 말을 잃어버리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할 말을 찾지 못하신 것인지 아니면 말을 하고 싶지 않으셨는지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400년이 지나고 난 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사람들의 그 모든 죄, 악한 불순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4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대들었던 그 못된 말에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통해서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사랑이 이렇게 나타나신 바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정말로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다 사랑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신 것, 저렇게 하시는 것, 여러분 마음에 합하게 하시는 것 아니면 여러분이 바라는 것과 다르게 하시는 것 전부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밖에 모르십니다. 여러분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도 전부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단 하나 사랑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셨는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후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최고 중의 최고였습니다.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이 바로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다만 아담, 하와가 그 에덴동산을 누릴 자격이 없어서 쫓겨났지만 영원히 쫓아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에덴동산을 영원히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기만 하면 다시 소유할 수 있고 언젠가는 그 에덴동산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실 때 그냥 대강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최고를 주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시하게 주시고 여러분을 사랑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지금도 최고를 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사랑은 여러분의 마음을 이해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시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하러 간다고 아브라함이 들을 수 있도록 슬쩍 비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조카 롯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롯을 구하고 싶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하나님, 의로운 사람을 악한 사람들과 함께 멸망시키시려 하십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또 다시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에 의인 50명이 있으면 멸망시키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아브라함이 기다리던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마흔다섯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아브라함은 귀찮게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의가 없을 정도였고 미울 정도였습니다. ‘마흔 명, 서른 명, 스무 명, 열 명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않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일일이 다 대답하시고 아브라함의 요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의인 열 명이라도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키실 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소돔과 고모라성에 있는 조카 롯을 살리고 싶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마음을 가진 것은 물론이지만 혹시라도 여러분이 잘못 알거나 아닌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어도 그것까지도 오죽하면 그럴까 하며 이해하십니다. 때로는 미련해서 또 때로는 알지 못해서 이런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까지도 다 이해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에게 헤롯이 어린 아이들을 다 죽이려고 하니 빨리 피난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집트로 피난 갔습니다. 헤롯이 죽고 난 뒤 다시 요셉에게,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이 죽었기 때문에 이제 돌아가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망설였습니다. 헤롯은 죽었지만 헤롯의 아들이 뒤를 이어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나 아들이 비슷하기 때문에 망설이는 마음, 두려워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또 아셨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만 요셉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두려우면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요셉은 가족들을 이끌고 갈릴리로 가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이해하십니다. 이런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어떤 마음을 가지든지 간에 여러분들의 마음을 이해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무조건 따르는 사람들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호소를 들으시는 사랑입니다. 간구함을 들으시는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너무 불순종하고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은 스스로 찔려 이런 자기들에게 귀를 기울이실 리가 없고 자신들의 간구를 들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40:27)

네가 아무리 잘못했고 불순종했다 하더라도 네가 절박하고 간절한 심정으로 간구하고 호소하면 나는 그 간구와 호소를 외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어느 도시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정말로 무시하는 아주 못된 재판장이 있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아주 억울한 일을 당했다. 그 과부는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재판장을 찾아가서 사정을 했다. 그 재판장이 그 과부의 호소를 들을 리가 있겠는가? 듣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부는 밤낮없이 재판장을 찾아가서 부탁했다. 그러자 재판관이, '내가 아무것도 겁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지만 이 여자가 밤낮 나를 찾아오니 너무 귀찮아서 그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겠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18:6-7)

우리 하나님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억울한 과부는 자기가 억울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정말로 억울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억울한 일, 바른 일을 위해서 간구하고 좋은 일을 위해서 호소할 때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선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억울한 사람들, 특별히 선한 일을 위해서 간구할 때 외면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 호소하든지 간구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간구와 호소를 들으십니다. 그런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여러분들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수도 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1장에서 탄식하십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1:2-3)

핏덩이같이 버려진 아이를 불쌍히 여겨 입히고 먹이고 키워주었는데 은혜를 하나도 알지 못한다는 탄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너무 속상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속상하시면서도 끝까지 이스라엘을 버리거나 포기하지도 않고 잊어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심정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종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41:8)

그렇게 미운 짓을 했는데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41:9)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버러지 같은 야곱아’(41:14)

얼마나 속상하셨으면 이런 표현을 하셨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41:14)

여러분들은 나에게 버러지 같은 모습으로 행했지만 나는 너희들을 도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9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49:14-15)

너희들은 나를 잊었다 할지라도, 너희들은 나를 버렸다고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너희를 잊을 리가 없고 버릴 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마지막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4:5-6)

너무 화가 나셔서 이제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은 나를 떠나고 나를 버리고 나에게 등을 돌렸지만 나는 엘리야를 보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내 사랑을 받도록, 내 마음을 받도록, 내 관심을 받도록 돌이키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사람이라도, 여러분들은 그런 자식이라도, 여러분이 혹시라도 그렇게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여러분을 잊어버리지 않고 버리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자식은 혹시 부모를 잊어버리고 싫어서 등을 돌려도 아버지는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

하나 없어도 아흔 아홉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하나가 돌아오고 나면 의인 아흔 아홉 때문에 기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하나까지 찾는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15:8) 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안에서 동전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그 동전은 어차피 그 집안에 있으므로 언젠가는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등불을 켜고 빗자루를 들고 온 집안을 뒤지십니다. 혹시 여기에 들어갔나? 저기에 들어갔나? 여기저기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러십니다. 여러분 아십시오. 혹시라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났을지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잊었을지라도, 여러분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지라도, 다시는 안 보겠다고 등을 돌렸을지라도 하나님은 기어이 돌아오도록 만들고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서 복을 주고야 마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으로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버리지 않으시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잊지 않기만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포기하지 않기만 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십니다. 완전히 용서하십니다.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용서하십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내가 이런 잘못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실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아예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받아주십니다. 이사야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1:18)

완전히 없애주겠다, 다 용서하겠다, 아예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집나간 탕자를 잘 아실 것입니다. 참으로 못된 자식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아직 멀었는데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받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니 이것만 해도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뿐만 아닙니다. 혹시라도 그런 돈을 제대로 썼으면 괜찮겠지만 이런 자식이 잘될 리가 있겠습니까? 다 탕진하고 난 뒤 굶어죽을 지경이 되어 도리 없이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할 데는 아버지밖에 없으니 자식이 아니라 하인으로라도 받아달라고 생각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젊은 아이, 눈 밝은 아이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멀리 있을 그때에, 이제는 눈이 어두워진 그 아버지는 자식을 알아보고 뛰어갑니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뛰어나오실 줄 몰랐습니다. 그저 하인 정도로 받아주기만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 돌아갔는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식을 껴안고 얼마나 기뻐하는는지 모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좋은 옷을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까지 벌여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가 아닙니다. 잊어버렸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간에 아버지께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받아주십니다.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시는 사랑, 끝까지 섬기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죽으실 때가 다 되신 것을 아시고 죽기 바로 전날 상을 차려놓고 제자들을 다락방에 모으셨습니다. 떡을 떼서 주시면서 내 살이다, 내 몸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주를 부어주시면서 내 피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저것 다 주셨습니다. 다 주시고 마지막에 예수님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성찬을 베풀고 난 뒤 예수님께서는 그 식사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섬김을 받아도 될 법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10:45)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섬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섬기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보내신 성령님이 여러분을 섬기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잠자고 있을 때, 잊어버리고 여기저기 정신이 팔려있을 때 하나님은 영으로서 여러분을 위해서 안타깝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대신 책임지시는 사랑, 끝까지 책임지시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주신 하나님 그러나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하나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죄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입니다. 이것은 다른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선한 일 하는 것으로, 바르게 사는 것으로, 착한 일을 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책임져야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죽든지 누군가 책임져야합니다. 이 책임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속물이 무엇입니까? 대신 드리는 제물입니다. 사람이 죽을 책임을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지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나신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4:9)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살리신다는 것입니까? 그 답을 이렇게 하십니다,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대신 그 아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여러분을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이 자리에 예배드리도록 부르신 까닭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도록 만드셨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고 끝내고 말겠습니까? 사해를 보십시오. 사해는 갈릴리 호수에서 요단강을 통해서 내려온 그 물을 수없이 받고 하나도 내보내지 않습니다. 자기가 다 차지할 것 같지만 사해는 죽은 바다입니다. 자기도 죽고 다른 생물도 살리지 못합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을 받으면서 나 혼자 받은 것으로 끝나면 나도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살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하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만약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받으신 사람이라면, 만약 여러분들이 앞으로 그 사랑을 받으실 분이라면 그런 사랑을 여러분도 하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런데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데 내 방식으로, 내 마음으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것은 권면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남편은 아내를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형제 자매간에 사랑하되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교우 간에도, 이웃에게도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용서하십시오.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끝까지 용서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이 사랑을 여러분도 하십시오. 이런 용서를 하시고 이런 이해를 하십시오. 호소에 답하십시오. 부탁하면 답을 하십시오. 입술로 호소했든지, 가슴으로 호소했든지, 눈으로 호소하든지 간에 여러분에게 딱한 사정을 절박하게 호소하면 답을 하십시오. 혹시 아내가 여러분에게 어떤 형태로든 간에 호소하면 그 호소에 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5:42)

그리고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주십시오. 시시한 것 주지 마시고 최고의 것으로 주십시오. 남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것을 주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사람들이 한참 먹지 못한 것을 알고 예수님께 선생님, 이 사람들을 보내서 무엇 좀 사먹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갈 것 없이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하게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주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주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6:38) 주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딱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관심을 가지고 잊어버리지 마시고 늘 챙겨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렇게 하셔습니다. 여러분들이 끝까지 챙기면 이런 사랑을 보시고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힘이 나서 충만하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 식의 사랑이 아니라 내 식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식으로 그렇게 사랑하면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 14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요일4:12)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거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 속에 거하십니까?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속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랑을 하면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한 번도 만족해보지 못하는 진정한 만족이 있을 것입니다.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하는 평화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랑을 하여 성령이 충만하면 그런 평화가 여러분들에게 있고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행복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 오튜본이라는 시골 마을 교회에 프레드릭 리먼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교회 형편이 어려워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목사님은 목회 이의 다른 일도 했습니다. 가구점에서도 일하셨고 목공으로도 일했습니다. 어느 날 치즈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 가방을 여는데 쪽지 하나가 나왔습니다. 도시락을 싸준 아내의 쪽지였습니다. 그 쪽지에 시 한 편이 적혀있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넓은 대양을 잉크로 채워도,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기록할 수 없겠네.’

그 순간 리먼 목사님은 눈을 감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지친 리먼 목사님을 완전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리먼 목사님은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목회가 참 힘들고 어렵고 고달프지만 바닷물을 먹물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리먼 목사님은 성령이 충만해서 나무 상자에 걸터앉아서 노래를 씁니다. 그 노래가 바로 찬송가 404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