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선한 자의 고난 (욥기 1:13~22)

분당소망교회 2015. 10. 23. 11:36

선한 자의 고난  

 

 

욥기 1:13~22

 

세월호 사건이 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생각하면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 특히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예쁘고 곱고 순진한 아이들이 한꺼번에 그렇게 변을 당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한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의 가슴이 이렇게 답답하고 아픈데 유족들의 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월호의 그 일도 하나님의 손을 벗어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할 것인데 도대체 세월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무엇일 것 같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 모든 것을 다 비추어보아도 세월호에 관한 하나님 뜻을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참 답답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오래 전에 소설 속에서 보았던 한 할머니의 절규가 생각났습니다. 반은 실성하고 조금 정신이 있는 할머니가 계속해서 난 모르겠다, 암만 해도 모르겠다.’ 라는 말만 되풀이 합니다. 할머니의 이 부르짖음은 동네사람들도 다 알 정도입니다. 할머니는 전쟁 때문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실성했습니다. 이 할머니의 말은, 내가 두고 온 고향, 내가 두고 온 집에 다시 돌아가겠다는 왜 38선이 가로 막고 있는가? 도대체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내가 내 집, 내 고향에 왜 돌아가지 못하는지 암만 해도 모르겠다는 절규입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은 소설 속의 그 할머니보다 더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이해하지 못할 일이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적지 않게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그런 일을 경험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 도무지 슬픔이 해결되지 않는 가슴 아픈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그런 일이 안 일어나야하겠지만 인생 살아가면서 나에게만은 이런 일은 안 일어난다고 보장할 길은 없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더욱더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일의 대표적인 경우가 욥의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혹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답은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답이 있습니다. 단지 이해만 안 될 뿐입니다.

 

성경 욥기는 아주 오래 전에 우스라는 땅에 살았던 욥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욥을 가리켜서 온전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매우 칭찬합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뿐 아니라 복이 많았습니다. 먼저 자식복이 많았습니다. 아들이 일곱이나 되고 딸이 셋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양이 7,000마리나 되었고 나귀가 3,000마리, 소가 500마리, 나귀가 500마리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축들을 다 키우려면 수많은 하인들이 있어야하므로 종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로 복있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이 어느 정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사람인지 보여주는 일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열 명이나 되다 보니 잔치를 많이 하는데 욥은 잔치를 하고 나면 반드시 자식들을 위해서 대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잔치 때 혹시라도 아이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까 하여 대신 회개하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 정도였으니 자신을 위해서는 오죽했겠습니까?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거룩하게 살았겠습니까? 성경은 여기에 관해서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1:3)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성경을 보면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욥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느 날 하나님 곁에 온 사탄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디 갔다 왔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사탄은 세상 여기저기 돌아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 정도에서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이 욥의 말을 꺼냈습니다. 정말로 자랑하고 싶었든지 사탄에게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2:3) 라고 자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무슨 일이든지 좋게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좋게 보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을 좋게 만드는 법이 없습니다. 일에 대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반드시 안 좋게 말하고 결국은 안 좋게 만들어갑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사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 같다가도 어느 순간 자칫 잘못하면 사탄이 되어버립니다. 사탄을 닮아가고 결국은 그것이 사탄의 도구 정도가 아니라 바로 사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좋게 말할 줄 모르고 좋게 볼 줄 모르는 사탄이 하나님의 그 말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빼앗으면 욥은 당장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온갖 못된 말을 다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만 두셨으면 좋았을 텐데 사탄에게 좋다, 너 맘대로 욥에게 한 번 해봐라, 내가 욥을 잘못 보았는지 네가 잘 못 보았는지 한 번 해보자, 다만 욥의 몸에만은 손대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잘 아십니다. 사탄은 믿는 사람, 정직한 사람, 바른 사람을 어떻게 하든 괴롭히려고 하는 존재인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탄은 욥을 한 번 흔들어보려고 하고 욥이 제대로 못 믿게 하려고 온갖 방해를 하고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을 떼 내려고 모든 계획을 다 세우고 있는데 왜 그렇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왕 하나님께서 욥을 자랑하셨다면 차라리 , 사탄, 다른 사람은 혹시 몰라도 욥만큼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라고 말씀하셨어야지 왜 이렇게 허락하셨는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 허락을 받은 사탄은 신이 났습니다. 어떻게 하든 욥을 흔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욥이 꼭 원수 같았던 사탄이었습니다. 바르게 살아가는 욥을 기어이 한 번 무너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사탄이 첫 번째 욥을 쳤습니다. 욥이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하인이 새파랗게 질려서 강도들이 쳐들어와서 소와 나귀들을 다 빼앗고 치던 종들을 다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욥의 큰 재산이었던 소 500마리, 나귀 500마리가 다 한꺼번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치던 종들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두 번째 하인이 쫓아와서 죽을 얼굴을 하고 욥에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서 양과 양을 치던 종들이다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7,000마리입니다. 욥의 재산 거의 대부분인데 한꺼번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 번째 하인이 쫓아와서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갈대아 강도가 세 무리나 쳐들어와서 낙타들을 다 빼앗아 가고 낙타를 치던 종들을 다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욥에게 남은 마지막 재산 낙타 3,000마리가 전부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욥에게 있는 재산은 하나도 없습니다.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 번째 하인이 쫓아왔습니다. 완전히 숨이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자녀들이 다 모여 한꺼번에 식사를 하고 있는데 태풍이 불어와서 집이 무너져서 자녀들 열 명이 다 한꺼번에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세월호의 그 비극이 한꺼번에 욥에게 다 쏟아진 것입니다. 이럴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하여도 욥의 이런 고통을 당한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참담한 순간, 이제 우리는 욥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그렇게 자랑하시고 칭찬하셨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 바른 사람 욥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커다란 가르침이 있습니다.

욥은 그 비통한 소식을 접하고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머리털을 다 밀었습니다. 그 다음에 땅에 엎드려서 예배드렸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욥은 그 비통한 소식을 접하고 그 슬픔을 다른 어떤 것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도무지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슬픈 소식, 비통한 소식, 다른 사람들, 이 사람 저 사람을 원망할 소식에 결코 불만을 터트리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탓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욥이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말씀은 그 모든 것을 다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려서 예배드렸다는 말씀을 직역하면 엎드려 절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전적으로 저의 탓입니다. 제 잘못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욥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기 잘못이라고 하고 머리털을 밀고 옷을 찢어가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욥이 바보 같은 사람이어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욥은 그런 재산을 가질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어서 욥이 고백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21)

조금 전까지 욥은 제 잘못입니다. 제가 받아들입니다.’ 라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인 소극적인 자세였지만 이제는 그것을 뛰어넘어서 적극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대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실 것은 이때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자기에게 닥친 그 끔찍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어느 인간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욥이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하나님,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든지 비록 그 일이 나에게는 죽음과 같은 아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고 슬픔이고 비극일지라도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이 말을 통해서 욥의 심정을 조금 더 자세하게 헤아려보면 욥의 그 찬양은 하나님, 이 일은 나에게 너무도 슬픈 일이고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옳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선한 일을 하시고 옳은 일을 하시고 나에게도 항상 그러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것은 옳은 일입니다. 선하신 일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십시오. 어떤 큰 일이 있을 때, 아픈 일이 있을 때,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원통한 일이 있을 때, 분노가 여러분을 지배하는 일이 있을 때 원망이나 분노,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는 것은 결코 슬픔이나 비극 그리고 분노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분노와 슬픔 그리고 고통을 더 키웁니다. 원망할수록, 분노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릴수록 여러분들의 비극은 더 큰 비극이 되고 여러분의 슬픔은 더 깊은 슬픔이 됩니다. 이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탓하면 내 속에 있는 슬픔이 좀 적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더 깊어지고 더 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내가 분노하면 우선 내 속이 풀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여러분의 분노는 점점 더 깊어가고 슬픔은 점점 더 커집니다. 욥은 이 일에 대해서 승리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2)

욥의 승리는 욥 혼자만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욥 때문에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탄은 그 정도로 끝나고 물러갈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 다시 달려듭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제발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또다시 사탄에게 욥의 말을 꺼내십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회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2:3)

사탄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물러갈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절대로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꺼내게 되면 절대로 물러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늘어질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말씀을 꺼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사탄이 말합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2:4-)

몸이 성하니까 그렇지 병들고 힘들면 아무리 욥이라도 절대로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 등을 돌리고 떠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만두시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는 또 허락하시고 맙니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을 해하지 말지니라’(2:6)

생명만 남겨놓고 몸에 손을 대도 좋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실까요? 왜 이러시는 것 같습니까? 이렇게 하시면 죽어나는 것은 우리입니다. 욥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것을 뻔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얼마나 귀하게 여기십니까? 당신이 오셔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아끼는 당신의 성도들인데 왜 이렇게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사탄은 신이 났습니다. 첫 번째를 실패해서 어깨가 늘어져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주시니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이번에야 말로 틀림없이 이긴다고 필사적으로 욥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사탄은 욥을 보자마자 욥의 몸에다 독한 병을 뒤집어씌웁니다.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2:7-8)

참 딱합니다. 정말로 안 되었습니다. 긁어줄 사람도 없고 치료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서 자기 몸을 자기가 긁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언제나 문제는 사람입니다.

욥의 아내가 나타났습니다. 욥이 지금 온 몸이 가려워 견디지 못하고 온 몸을 기왓장으로 퍽퍽 긁고 있는데 욥의 아내가 타나나서 욥의 마음까지 긁어버렸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2:9)

여러분, 지금까지 사탄이 하는 것을 보았어도 사탄의 실체를 못 보았을 것입니다. 29절이 사탄의 실체입니다. 사탄의 도구이고 이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노릇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남아서 남편을 지켜주고 남편을 이해하고 격려해야할 아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합니까? 남편을 어떻게 이렇게 죽이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여러분, 모두 조심하셔야합니다. 아차하면 여러분도 그런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사탄의 도구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입을 조심해야합니다. 야고보 3장은 입은 어떤 것이며, 혀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3:6)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3:8)

마지막까지 곁에서 남편을 위로해주고 도와주어야할 욥의 아내가 욥의 가슴을 그렇게 할퀴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대단한 것은 욥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잃고 슬픔에 잠겨있으면서도 끝까지 굳세게 믿음을 지켰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승리를 안겨드렸습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라니라’(2:10)

입을 잘 지켰습니다. 입을 잘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국가적인 일에 대해서, 사회적인 일에 대해서도 입을 잘 지키십시오. 그렇게 하면 반은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제 욥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방심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그렇게 물러가지 않습니다. 끝난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의 그 처참한 모습을 보고 비통해했습니다.

그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2:11-13)

욥의 친구들이 참 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입니다. 특히 잘한 것은 욥과 함께 땅바닥에 퍽 주저앉아있었던 것, 그것도 밤낮 칠일 동안 욥과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 욥의 친구들이 더 잘한 것은 칠일 동안 한 마디 말도 안 한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위로입니다. 혹시 가깝다고 말 하는 것, 말 잘한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잘하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의 가슴은 더 무너지고 더 죽어갑니다. 이럴 때 일수록 가능하면 입을 다물고 묵묵하게 슬픔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위로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칠일 동안은 참 잘했습니다.

 

그런데 칠일이 지나고 난 뒤 그만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욥이 입을 열고 만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입을 안 열었어야하는데 말입니다. 입을 열면 자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일을 열어 이르되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3:1-4)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차리지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욥이 입을 열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욥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렇게 극한 슬픔을 당한 사람이 무슨 소리를 못하겠습니까? 누가 그 고통, 슬픔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당사자에게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를 괴롭히고 더 슬프게 만들고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주변을 시끄럽게 하고 가정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당사자도 가능하면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좋았습니다.

 

문제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욥이 입을 열자 욥의 그 말에 대해서 지금까지 참고 있던 친구들도 말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욥을 잘 위로해주었던 친구들이 그만 실수하고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욥이 말하고 친구들이 말하고 또 욥이 말하고 친구들이 말하면서 끊임없이 말의 공방이 계속되었습니다. 말의 전쟁이 끝도 없이 이어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3장 이후부터 욥의 말이 끝나고 난 뒤 욥의 친구들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38장까지 이어집니다. 계속해서 말들이 이어졌습니다.

언제 이 공방이 끝날지 모를 것 같고 싸우다 끝날 것만 같은 이럴 때 하나님께서 드디어 등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등장하셔서 욥을 향해서 무섭게 야단치셨습니다. 잠깐 한 두 마디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길게 무섭게 말씀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38:2-4)

한 마디로 , 너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 내가 너 당한 슬픔은 안다. 그렇지만 그런 슬픔을 당했다고 왜 그렇게 말이 많고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떠들고 다니느냐?’ 라고 야단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난 뒤 욥이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야단맞고 난 후 욥이 말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2-4)

욥이 깨달았습니다.

말을 하다가 보면 한 마디, 두 마디 할 때는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지만 조금 더 많이 하게 되면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말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니다’(42:5)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알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지합니다. 배워보아야 그것이 그것입니다. 알아보아야 그것이 그것입니다. 경험해봤어야 그것이 그것입니다. 욥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6)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손을 들어주셔서 판정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종 하나님의 판정은 그것이 아니라 정반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라’(42:7-8)

욥의 친구들이 욥보다 더 잘못했다고 마지막 판정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욥의 친구들이 욥보다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더 잘하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욥보다 더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무섭게 야단치시고 난 뒤 욥의 친구들에게는 욥보다 더 잘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답입니다. 그러나 이 답은 머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슴으로 느낄 수만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나라에 작금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 혹시라도 여러분 개인적으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가슴으로 답을 받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억장이 무너지고 나라가 뒤집어질 것 같은 일에, 여러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슬픈 일이 있을 때, 가슴 아픈 일이 있고 분통터지고 원통한 일이 있을 때 기억하실 말씀이 있습니다. ‘주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라는 스바냐 17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이 나라에 주신 말씀이 바로 주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라는 이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