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베드로전서 1:13~17)
나그네
베드로전서 1:13~17
더운 날이면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개척하기 전 압구정동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의 어느 여름이었습니다. 얼마나 더운지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한강변에 있는 14층 아파트의 14층에 살았는데 더위를 견디다 못해 한 밤중에 이불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이불을 펴고 잤습니다. 옥상 바닥이 뜨끈뜨끈하여 찜질방 같았지만 한강 바람이 제법 불어 그럭저럭 잘만 했습니다. 잠이 살짝 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물이 떨어졌습니다. 소나기가 쏟아진 것입니다. 자다가 놀라서 이불을 싸들고 다시 내려갔던 기억이 나는데 올해가 그 정도로 더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잠시입니다. 며칠만 지나면 다시 저녁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어느 틈에 긴팔 옷을 꺼내서 입는 사람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폭염 또 혹한의 겨울날이면 이희승씨의 수필 <딸깍발이>가 생각날 때가 많습니다. 딸깍발이는 남산골 선비들의 별명입니다. 남산골 선비들은 늘 나막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굽이 땅에 닿을 때마다 딸깍딸깍 소리가 났기 때문에 <딸깍발이>라고 하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필 일부를 옮겨 봅니다. ‘걸음을 걸어도 일인(일본사람)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짓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거리기는커녕 곁눈질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보고 걸어가는 강직한 선비들이었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는 지조,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 국사에 통탄할 사태가 벌어졌을 때 직언으로 지존 즉 임금에게 직소하는 이 딸깍발이 선비들이었다.’
남산골 딸깍발이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 년 봄에 두고 보자.‘
‘내년 봄에 두고 보자’ 라고 했던 <딸깔발이>의 이 말은 말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늘 그러했습니다. 기승을 부려보아야 잠시입니다. 그렇게 혹독한 추위도 잠시만 지나가면 끝이 나고, 가마솥처럼 펄펄 끓는 듯한 찌는 무더위도 다 지나갑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내로라고 활개치고 다니고 싶은 대단한 인생들도, 괴롭고 서러운 인생도 잠시만 지나면 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옛이야기에 지날 뿐입니다. 금방 지나갑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우리를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나그네’라는 말을 우리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서 잠시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그네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한참 유행했던 <하숙생>이란 대중가요가 이것을 잘 말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이렇게 시작하다가 마지막에는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라고 합니다.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 많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나그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노래 그대로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정처 없이 흘러가지만 신자들은 떠나온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갈 고향이 있는 나그네입니다. 각각 세상에 집이 있습니다. 세를 사는 사람도 있고 자기 집에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은 집에 사는 사람, 큰 집에 사는 사람, 대단한 집에 사는 사람도 있지만 임시거처일 뿐입니다. 내 것이 아니고 여관에서 머물 듯 잠시 지나다가 떠날 뿐입니다. 아무리 좋아본들 금방 끝납니다. 우리 기독교신자들에게는 본래의 집이 있습니다. 영원히 살 집이 따로 있습니다.
잠시 땅에 머물다 가는 나그네 인생이지만 짧은 나그네 길 가운데서도 일이 참 많습니다. 괴로운 일도 있고 슬픈 일, 분통터지는 일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일도 없지 않지만 속된 말로 허파가 뒤집어지는 일들도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성경 안에 있는 사람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봅니다. 이집트에 갔다가 아차 실수로 죽을 것 같은 곤혹을 치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남에게 빼앗길 뻔했습니다. 궁궐 속에 끌려갔으니 빼앗긴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면 누이라고 했으니 한 마디 말도 못했을 것이고 힘이 없으니 꼼짝하지 못하고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아내는 궁궐 속에 들어가서 무슨 변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므로 미칠 것 같았을 것입니다. 깜빡 실수하면 인생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야곱을 봅니다. 오로지 한 여인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서 7년 동안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 고생 끝에 드디어 결혼을 했는데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 눈뜨고 보니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자기가 그렇게 사랑했던 라헬이 아니라 다른 여자였습니다.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야곱이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요셉도 참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까? 애지중지 그렇게 사랑받던 요셉의 나이 열일곱에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 그림을 상상해보십시오. 팔레스틴에서 이집트로 가려면 얼마나 먼 거리입니까? 노예에게 낙타를 태웠겠습니까? 질질 끌고 갔을 것입니다. 아침까지 온갖 사랑을 다 받은 요셉이었는데 저녁에 노예 신세가 되고 마는 이런 일을 요셉이 당했습니다.
인생 살다보면 꼭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욥은 어떠했습니까? 모든 것을 다 갖추었습니다. 재산이 엄청나게 많았고 자식 열 명이 하나같이 다 예쁘고 귀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갔습니다. 재산이야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식은 다릅니다. 열 자식 중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온몸은 병들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위로할 사람, 아내마저 자기를 저주했습니다. 이런 일이 욥에게 있었으니 살 수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나라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생명을 바쳐서 나라에 충성했고 왕에게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을 왕이며 장인인 사울이 혹시라도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 하여 온갖 오해를 다했습니다. 사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정말로 끈질기게 쫓아다니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죽을 고비가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함께 살던 다윗의 아내 즉 사울의 딸을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인생 사노라면 때로는 너무 괴롭고 힘들어 꼭 죽을 것만 같은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절대로 길이 없을 것만 같은 때가 있기도 하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때가 있기도 하고 내 인생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날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아십시오. 그 모든 일이 금방 지나갑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금방 지나가지 않습니까? 100년 산다고 해도 금방 지나가는데 그런 인생 중에 있는 일들이니 얼마나 빨리 지나가겠습니까? 오래 가지 않습니다. 좀 더 멀리서 볼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고통 속에 있을 때는 그 시간이 한없이 깁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 같지만 그 고통 속에 있으면서 절대로 고통을 보지 말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십시오. 그러다 보면 곧 끝납니다. 금방 끝납니다. 그야말로 아주 잠시만 있으면 다 끝이 납니다.
앞서 말했던 아브라함을 보십시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이 그야말로 손가락만 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자마자 금방 끝이 났습니다. 궁궐이 난리가 났습니다. 이집트 왕은 아브라함을 불러 빨리 아내를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이것 저것 얹어주었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깊은 믿음의 바버지가 되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여러 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힘든 일, 곡절로 말미암아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위대한 이름이 지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야곱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더욱 그렇습니다. 요셉은 고생이 좀 길었습니다. 열일곱 살부터 무려 13년을 고생했으니 제법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많아야 13년입니다. 그 고생 뒤에 요셉에게 온 세월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당시 세계 최강 이집트의 실세 일인자였습니다. 그 세월이 80년이었습니다. 13년 동안 고생을 좀 했지만 80년간 이집트의 최고 자리에서 모든 명예부귀영화를 다 누렸습니다.
욥은 참으로 모진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진 환란 뒤에 욥의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욥42:12-13)
이것은 모두 맨 처음 가지고 있던 것의 정확하게 두 배입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만큼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배로 주시지 않은 것은 이 당에서 죽은 아이들은 천국으로 자리만 옮겼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42:14-16)
잠시 고생이 있었지만 140년 더 아주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다윗을 봅니다. 한 10년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몇 년간 왕을 했습니까? 40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왕은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국기를 보면서 다윗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직 다윗입니다. 그런 다윗이 되었습니다.
저는 대중 가수 이름을 거의 모르지만 제가 아는 몇 사람 중에서 싸이가 있습니다. 그가 노래하는 것을 한 1분 본 적이 있는데 온 몸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얼마나 열심히 노래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좋습니다. 인생 살면서 대강대강 근성 근성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야합니다. 지난 번 잠실운동장에서 공연할 때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강남스타일>이라는 싸이의 뮤직비디오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동영상으로 꼽혔습니다. 세계 최고의 경쟁자들보다 무려 10억 건이나 더 많았습니다. 누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족탈불급입니다.
그런 싸이를 보면서 우리는 그의 인생을 볼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싸이 인생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결코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제가 이 자료를 볼 때까지만 해도 가수 인생 12년 동안 싸이가 제대로 활동한 기간이 3~4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맨 처음 데뷔했을 때 대마초 때문에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왔는데도 무엇이 잘못되어 한 번 더 갔습니다. 남성 여러분들은 잘 알 테지만 군대 한 번 더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런데 싸이가 두 번째 군대 갈 때는 쌍둥이 딸이 백일도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싸이는 울 수조차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시간을 지내고 오늘의 싸이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볼 때 단면적으로 보지 말고 길게 보십시오. 그렇게 보면 여러분 인생도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 알 것이 있습니다. 영광, 영예, 대단한 것, 반대로 초라한 것, 아픔과 상처 다 잠시뿐입니다 금방 끝이 납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은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시편 90편은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90:4-6)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잠시 잠깐이면 모든 것이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인생이 잠시잠깐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땅의 인생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오늘 본문은 이것을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근신하십시오. 이 땅에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사는 모습이 나중에 결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하고 싶다고 다 할 것이 아닙니다. 말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다고 다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입이 있다고 다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고, 사람들이 말을 들어준다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고 조심해야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삼가고 조심하는 것도 약간 조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허리띠를 불끈 조여서 계속해서 신경 쓰면서 삼가고 조심해야합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뼈아픈 경험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베드로야, 사탄이 마음대로 너를 유린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조심해라.’ 라고 경고하셨지만 베드로는 근성으로 주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당했습니다. 일생일대의 실패를 했습니다. 평생 가슴 치며 후회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이 땅에 사는 동안 한평생 바짝 허리를 동여도 잠시 뿐입니다. 영원한 날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욕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욕은 헬라어로 ‘에피뒤미아’이고 영어성경은 ‘evil desire’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전체로 본다면 악한 갈망, 욕망, 욕심이 되겠습니다. 욕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 1장에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서 30장 15절에서는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거머리 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머리에 물려보셨습니까? 물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몸속으로 파고 들어갑니다. 많이 들어가면 칼로 살갗을 베어서 떼어내야 합니다. 욕심이 그렇습니다. 욕심에 한 번 빠지면 벗어나기 힘듭니다. 아예 욕심 근처에 가지 않아야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행복입니다. ‘이것만큼은 꼭 있어야 하겠다, 이것만큼은 꼭 해야 하겠다.’ 하는 것들을 버리십시오. 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다음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과는 다른 사람, 세상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무언가 좀 달라야합니다. 세상과 달라야하고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합니다. 가장 좋은 예 하나로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19-25)
부자가 왜 음부에 떨어졌습니까? 왜 그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자기 돈으로 옷을 사 입고 자기 돈으로 먹었는데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논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논리이지 기독교 신자들은 이 논리와 관계없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내 돈이라고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기준이 있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물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어야 했습니다. 신자로서의 삶을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나사로가 자기 상에서 떨어진 음식 찌꺼기나 먹도록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모르는 척하고 앉아있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든지 보내서 먹여살려야합니다.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나와 관계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 부자가 나사로를 그냥 내버려둔 것은 죄입니다. 만약 그 부자가 진정한 신자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아무리 불러보아야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 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생 살면서 힘든 분들 계십니다. 고달픈 분도 계십니다. 괴로운 일이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잘 아십시오. 금방 지나갑니다. 오래 가지 않습니다. 거기에 매여 살지 마십시오.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보시고 예수님을 보십시오. 골로새서 3장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1-2)
세상의 것에는 눈을 떼십시오. 내 자식, 내 돈에 관심을 덜 가지시고 자주 하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힘쓰십시오. 하나님 말씀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을 도우십시오. 가난한 사람을 도우고 못 배운 사람들을 공부하도록 해주고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을 치료하도록 해주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할 노릇입니다. 음식 먹다가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 정도 주는 것은 돕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몇 푼 더했다고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보다 1/100밖에 안했어도 그 사람이 여러분보다 훨씬 더 큰일을 했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힘이 좀 붙여도 정말로 싸우듯이 힘쓰고 애쓰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음식 부스러기를 주면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일이 있으면 충성을 다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 복음을 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심판주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계2:23)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17절에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