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창세기 (46:28~30 )
22년
창세기 46:28~30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자식이 다 사랑스럽지만 키우다 보면 더 사랑스런 자식이 있는 듯합니다.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었습니다. 야곱이 어느 날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에게 다녀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갔는데 저녁이 되어 돌아와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야곱의 형들이 새파란 얼굴로 아버지를 찾아와서 요셉이 아침에 입고 갔던 옷을 보여주면서 요셉 옷이 아닌지 물었습니다. 요셉을 편애해서 지어준 특별한 채색옷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 옷에 붉은 피가 잔뜩 묻어있었습니다. 틀림없이 맹수에 물려서 죽은 듯합니다. 야곱은 넋이 나갔습니다. 너무 슬퍼서 그 누구도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합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가슴에 묻고 슬픔 속에 살아갑니다.
그 세월이 어느 덧 22년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죽은 자식에 대한 슬픔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슬픔이 여전한 어느 날 야곱이 이집트에 곡식을 사러갔던 열 아들에게서 도무지 믿지 못한 말을 들었습니다. 22년 전에 죽었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집트 총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22년 전에도 요셉의 형들이 가지고 온 피 묻은 요셉의 옷을 보고도 요셉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총리가 되었다는 요셉이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는 보낸 황금마차를 보고서는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꿈이 아니라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야곱이 요셉이 보낸 황금마차를 타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드디어 요셉을 만났습니다. 정말로 살아있었습니다. 황금마차를 보고서도 긴가민가했는데 정말로 살아있었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야곱은,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고 이집트 총리가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만으로도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배우고 또 배웁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기독교인들의 죽음을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요셉은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22년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는 죽은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었습니다. 단지 살고 있는 장소만 달랐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먼저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죽어서 없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고 있던 곳과 다른 곳에서 사는 것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장소만 다른 것입니다. 존 웨인 쉴레터 라는 사람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녀들을 다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유언을 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죽은 다음에 내 무덤에는 어떠한 꽃도 가져오지 마라. 왜냐하면 나는 그 무덤에 없을 것이다. 나는 육체를 떠나면 곧장 유럽으로 갈 예정이다. 네 아빠가 밤낮 유럽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약속만 했다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잖니? 그래서 나는 유럽으로 갈 것이다.’ 아주 근사한 말입니다.
첫 번째,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던 곳과 다른 곳에서 사는 것뿐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기다 한 가지 더 말씀하시는데 더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죽어 이 땅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서 살지만 모두 다 똑같은 곳에 가서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죽고 난 뒤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큰 부자와 그 부잣집 대문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병든 거지가 있었다. 두 사람 다 죽었는데 부자는 음부에 가게 되었고 그 부잣집 앞에서 구걸하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
이 말씀을 하실 때 다른 때와 달리 이것은 비유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산자도 보시고 죽은 자도 보시고, 이 세상도 보시고 저 세상도 보시는 예수님 눈에는 이것이 보였습니다. 예수님만 알고 계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부자든 거지든, 잘 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다 똑같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다 똑같이 죽습니다.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사람들, 큰 소리치고 잘난 척 하던 사람들 다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각각 가는 길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가 간 곳에 가게 되고 어떤 사람은 거지 나사로가 간 곳으로 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어서 이 땅을 떠난 뒤에 두 사람이 가서 사는 환경은 너무도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른 곳으로 각각 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은 뜨거운 불의 고통 때문에 물 한 방울이 아쉬운 지옥과 같은 곳에서 살게 되고, 또 한 사람은 엄마의 품속과 같은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곳에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속이 아플 때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 누운 그 자세로 누워있으면 가장 편안합니다. 지금 거지 나사로가 그런 편안함으로 있습니다.
세 번째로 죽고 난 뒤에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살짝 보여주십니다. 죽기 전 나사로는 몰골이 형편없었습니다. 온 몸이 헌데 투성이였고 심지어는 개들이 와서 핥을 정도였습니다. 개들이 와서 핥아도 뿌리칠 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 나사로가 죽고 난 뒤의 모습에는 이 땅에 살아있을 때 보여주었던 그런 비참한 티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마냥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릅니다.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다른 세상에서 사는 모습에 대해서 오늘 본문 야곱의 아들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보여주십니다. 22년 전에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있어서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짐승에게 물려 온 몸이 찢어져서 피를 흘리고 죽은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시체를 찾을 수도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22년 전 요셉은 형들에게서 온갖 밉상을 다 부리는 밉상 동생이었습니다. 형들이 혹시라도 잘못하기만 하면 쫓아가서 아버지에게 일러주었던 얄미운 동생이었습니다. 그렇게 밉상을 부리다가 아랍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갈 때 눈물, 콧물 흘리면서 질질 끌려가던 구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다시 만난 요셉은 22년 전 그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우선 겉모습만으로도 전혀 달랐습니다. 열 명의 형들이 몇 번 요셉을 보았지만 전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주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더구나 요셉의 그 위상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 이집트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가 되어있었습니다. 열 형제들이 옛날에 우습게보았던 요셉, 같이 놀자고 따라오면 쫓아내던 요셉이었지만 이제는 감히 얼굴 들고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물이 되어있었습니다. 나중 천국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 요셉과 정반대의 길을 간 부자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그는 이 땅에 살 때 대단했습니다. 하나도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자색 옷과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눅16:19) 라고 표현하십니다.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걸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대단하던 사람이 이 땅을 떠나자 물 한 방울이 아쉬운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이 땅에 살고 있을 때 부자가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던 대문 앞에 살던 거지였습니다. 내 집, 내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물 때문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거지 나사로에게 아쉽고 절박하게 물 한 방울을 부탁해야할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셉이 요셉의 길로 가고 부자가 부자의 길로 간 것은 어쩌다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연하게 그렇게 된 아니라 전적으로 이 땅에 살 때 어떻게 살았는지 그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욥기 34장은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욥34:10-11)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고 불의를 당하는 사람이 없게 각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행위대로 정확하게 심판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언서 24장은 ‘내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24:12) 라고 말씀하십니다. 산 그대로 심판하실 것이고 산 그대로 자기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이 심판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20:11-13) 최후의 심판 광경을 사도요한이 먼저 보고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19:6-8)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경 전체가 말씀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 때 어떻게 살았는지 자기가 행한 행실에 따라서 자기 갈 곳이 정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 행실의 기준에 대해서 아주 잘 보여준 것이 성경에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25장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라는 말씀입니다. 심판주가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기준에 대해서는 불쌍한 이웃에게, 어려운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는가? 여기에 따라서 그 기준이 정해진다고 말씀합니다.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는가?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가? 나그네 된 사람을 영접해서 먹을 것을 주고 잘 곳을 제공했는가?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옷을 주었는가? 병든 사람을 돌보았는가? 옥에 갇힌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 사람을 위로해주었는가? 여기에 따라서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 긍휼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오른편으로 가고 선한 일을 하지 않은 사람, 긍휼한 마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왼편, 지옥과 같은 곳으로 간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분명하게 다시 말씀하신 것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라는 말씀입니다.
또 한 곳은 요한계시록 21장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천국에 대해서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계21:21),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고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계21:23-2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갈 사람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그곳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가는 길은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각각 다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호의호식하던 부자가 간 곳, 불쌍한 사람들을 잘 돌보지 않은 사람들이 간 곳으로 갈 사람도 있습니다. 또 거지 나사로가 간 곳, 불쌍한 사람들이 간 곳으로 갈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 얻었던 놀라운 영광을 누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생각할 때마다 저에게 떠오르는 악몽과 같은 일이 있습니다. 벌써 40년이 훨씬 넘어 50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일입니다. 군대 입대할 때의 일입니다. 고시 1차 발표를 보고 2차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군대에 오라 하여 입대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않다가 입대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모든 훈련병들이 자기 짐을 챙겨 연병장에 다 모였습니다. 낮 시간에 이름이 불리면 후방으로 빠집니다. 관광버스가 양쪽으로 서있습니다. 아주 멋졌습니다. 오랜만에 ‘사람’을 보니 참 좋았습니다. 그 차를 타면 후방으로 가고 그 차를 못타면 야간열차를 타고 전방으로 가게 됩니다. 인사과 사람들이 서류를 들고 왔습니다. 모두 초조하고 불안해했습니다. 부산으로 갈사람, 대구로 갈사람, 광주로 갈사람 쭉 부르는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도대체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제 이름이 없었습니다.
이제 밤차를 타야했습니다. 밤 기차를 타게 되었는데 도무지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열차역까지 뛰어가야 했습니다. 헌병들이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계속해서 쳤습니다. 열차를 탔습니다. 열차 밖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창문에 커튼을 내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도 헌병들은 개머리판으로 계속 쳤습니다. 밖을 못 보게 했습니다. 군대 말로 ‘대가리 박아’였습니다. 그렇게 밤새 의정부 보충대까지 올라왔습니다. 그곳에서 마지막 부대에 배치됩니다. 거기에 있는 병사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백골 3사단에 가면 죽는다. 거기는 인사도 ‘백골’이라고 한다.‘ 거짓말인줄 알았습니다. 며칠 잘 쉬고 자기 짐을 들고 자대배치 받기 위해서 연병장에 다 모였습니다. 전방 중에서도 좀 나은 곳이 있습니다. 인천, 부평 등입니다. 쭉 부르는데 이름이 불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죽어도 가서는 안 되는 곳, 백골 3사단에 제 이름이 불렸습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군부대 트럭을 타고 갔습니다. 부식 싣는 차라 냄새도 나는 트럭이었습니다. 트럭을 타자 헌병들이 또 머리 박으라고 치기 시작합니다. 한 두어 시간 간 것 같습니다. 위병소에서 헌병들이 진짜로 ‘백골’하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를 들어 보니 담벼락에는 전부 다 해골바가지만 그려져 있었습니다. 3년 동안 죽는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 고생은 3년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간 음부는 3년이 아니라 사흘을 견디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리고 대강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곳에서 살아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전서에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1:17)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주어졌습니다.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갈 사람들 중에서도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사람이 있고 멋진 구원의 영광을 누릴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디 하나님 말씀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할 수만 있으면 아니 힘들여서라도 선한 일을 하십시오. 불쌍한 사람을 도우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시고 병든 사람들을 챙겨주시고 어려운 사람들을 늘 생각하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나의 구주십니다.’ 라는 믿음의 도를 확실하게 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