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기도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창세기 27:1-23 )

분당소망교회 2017. 2. 18. 16:17

기도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창세기 27:1-23

     정신과 의사가 만난 한 여대생 이야기입니다. 그 여대생에게 병적인 짝사랑이 있었습니다.

먼저 그 여학생이 자라온 환경을 살펴보았습니다. 학생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이 학생의 어머니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을 다니다가 중퇴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남편을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일류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있었습니다. 아내를 지배하려고 했고 무시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자신의 열등감을 자존심으로 버티었습니다. 겉으로는 남편에게 복종하면서도 마음은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남편에게 받지 못한 사랑 그리고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서 딸을 사랑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예쁜 딸에게 온통 자기의 사랑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자신이 못다 한 모든 것, 못 받은 모든 것을 딸에게 채워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엄마만 붙어 다녔습니다.

아빠는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집에 들어와서 딸의 응석을 받고 싶었지만 딸은 통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그것이 아내가 아이를 싸고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인지 남편은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아무 일도 아닌데도 자주 화를 냈습니다. 딸은 그런 아버지를 더 무서워하게 되었고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아빠를 더 경계하고 더 멀리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이 마음속에는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었습니다. 아빠를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친구들이 아빠와 함께 다니는 것이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아빠를 가까이 하고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알게 되면 엄마가 싫어할 것 같았습니다. 또 아빠가 자기의 사랑을 받아줄지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가까이 가는 시도도 하지 못했습니다. 매번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엄마 생각하고 아빠 생각하다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 여대생에게 있었던 첫 번째 짝사랑입니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지만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볼 뿐 접근하지도 못하고 시도해보지 못한 이 여대생의 첫 번째 사랑입니다.

 

아이는 어느 덧 자기는 아빠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아이의 이런 경향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장해가면서 다른 남성에게까지 확대되어갑니다. 자기는 어떤 남자의 사랑도 받을 수 없는 사람,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떤 사람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늘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보기도 하고 잊으려고 했지만 사랑이 그렇게 마음대로 됩니까? 그럴수록 그런 생각은 더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이 짝사랑의 대상은 지도교수였습니다.

그 교수는 많은 점에서 아빠와 유사했습니다. 학벌이나 지위도 비슷하고 열심히 사는 것도 비슷했습니다. 더욱이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인 면까지 아빠와 꼭 닮았습니다. 아빠와 다른 점이라면 아빠는 자기를 안 좋아하는 것 같고 자기를 멀리하는 것 같은데 이 교수는 자기를 인정해주고 친절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로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을 인정해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밖에 없는데도 여학생은 아버지에게 그토록 받고 싶었던 사랑을 그 교수로부터 받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닮은 교수님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 또 자기를 사랑해준다고 생각되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그 고마움이 고마움을 넘어서 사랑이 되었습니다.

 

그 학생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가까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자기에게서 먼 존재였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 사랑받고 싶은 마음, 아빠와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 이런 억눌렸던 모든 마음이 교수에게 폭발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교수님을 향한 여학생의 사랑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불안하고 항상 두려웠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을까? 나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혹 저 교수님도 아버지처럼 갑자기 나를 야단치며 멀리하지 않을까?’ 늘 그런 조마조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불안한 마음이 결국은 이 여학생에게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을 만들게 됩니다.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온 자신이 겨우 사랑을 해봤지만 그러나 그 사랑은 혼자만 애태우고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 더구나 나는 이런 사랑밖에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기비하로 가득 찬 병든 짝사랑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정상적인 사랑을 할 수 없는 이 여학생의 짝사랑은 모두가 어머니의 과잉보호로부터 만들어진 결과였습니다. 이 여학생을 상담한 의사는 그 여학생의 짝사랑은 어쩌다 생긴 짝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감 그리고 낮은 자존감으로부터 말미암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병든 사랑이다.’ 라고 말합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에게 그랬습니다. 남편 이삭이 맏아들 에서를 작은 아들 야곱보다 더 사랑하여 편애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창세기 2528절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집안에 편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도 편애가 있었고 어머니에게도 편애가 있었습니다.

편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애가 심하면 안 됩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작은 아들 야곱을 사랑하는 것은 심했습니다. 그 편애가 야곱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죄를 짓도록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게 만들었고 형의 것을 도둑질 하게 만들었습니다. 도와주는 것 정도가 아니라 작은 아들 손에 털을 붙여주는 것, 큰 아들의 옷을 작은 아들에게 가져다주는 등 그 모든 일을 어머니가 다 했습니다. 거짓말까지 전부 다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작은 아들 야곱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조금도 도움이 안 되었습니다. 오로지 작은 아들 야곱이 잘못 되게만 하고 말았습니다. 작은 아들 야곱을 아버지에게 못된 자식이 되게 하였습니다. 창세기 2733절에는 이것을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야곱이 심하게 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큰 배신감,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 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쌍둥이 형제이니 얼마나 친한 형제입니까? 그 쌍둥이 형제를 원수지간이 되도록 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27:41)

여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 그렇게 편애하면서 아꼈던 아들을 멀리 낯선 곳으로 떠나게 만들고 기약 없는 생이별을 하도록 하고 말았습니다.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27:41-45)

몇 날 동안이라고 했지만 몇 날이 아니었습니다. 20년이 넘도록 그 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큰 아들 에서가 잊어버릴 것을 기대했지만 잊어버려지지 않습니다. 어렸을 적 받은 상처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둘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작은 아들 야곱이 형이 받을 축복을 훔쳤습니다. 그런데 복이 돌아온 것이 있나요?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리브가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이 어머니 리브가의 과잉보호였습니다.

 

신자들이 아주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과잉보호가 신자들에게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심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을 꼭 기억해야합니다.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악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붙들어놓으려고 합니다. 내가 붙들려고 하고 어떻게 하든 교회 안에만 붙들어놓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잉보호가 심하게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과잉보호가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보호자의 결핍입니다. 희한하게도 사랑이 아니라 나의 결핍 때문에 과잉보호가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보호자가 과거에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을 때 일어납니다.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제대로 살지 못했을 때 그런 아쉬움, 상처, 경험 이런 것들로 인해서 비록 나는 못 받았지만 내 아내에게는 혹은 내 자식에게는 전부 다 해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완벽한 후견인 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에게 있어서 또 다른 병리현상인 완벽주의를 만들어냅니다. 과잉보호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완벽주의가 있습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내가 철저하게 챙겨주겠다, 내 자식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가 챙겨주겠다는 완벽주의를 추구하게 됩니다.

과잉보호는 겉으로는 대단한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희생적입니다. 아주 헌신적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자식에게 바치는 것 같습니다. 내 모든 것을 내 아내에게 바치는 것 같습니다.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고 자식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해줄까, 혹시라도 내가 덜해주는 것이 있는지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대단히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과잉보호의 또 다른 형태는 소유의식입니다. 아내를 자기 소유로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의 아내이고 자식일 뿐 자기의 소유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소유로 생각하게 됩니다. 내 소유로 생각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내를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자식을 마음대로 하려고합니다. 그리고 이런 소유의식은 배타적입니다. 독점적입니다. 누가 가까이 하게 되면 싫어합니다. 의처증이 생겨나게 되고 자식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연애를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식이 연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딸이 연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빠들이 제법 있습니다. 내 소유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만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위 될 사람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덜 하고 객관적이지 못하고 항상 트집만 잡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생겨나서 자기 딸을 상당히 어렵게 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병적인 소유의식 때문입니다.

 

과잉보호가 가져오는 가장 무서운 결과는 피보호자에게 있습니다. 먼저 피보호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능력감을 가지도록 합니다. 아내 스스로 무능력자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자식을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불신하도록 만듭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하여 자신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자신감을 상실하면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자신감이란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크게 두 가지로, 예를 들면 행복에 있어서 자신감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건강한 인격이 있어야하는데 건강한 인격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중 첫 번째는 소속감이고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고 그 다음 세 번째는 자신감입니다. 과잉보호는 이 자신감을 빼앗아버립니다. 이것은 학생들이 성적을 내는 데 있어서도 나타납니다. 실력도 좋고 이 학원, 저 학원, 이 선생님, 저 선생님 찾아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도 시험 성적을 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성적을 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세 가지인데 하나는 집중력이 있어야합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에 안정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이 학원에 보내고 저 선생님에게 보내고 엄마가 붙어 다니다 보면 아이는 안정이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는 엄마에게 껌처럼 붙어 여기저기 끌려다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과잉보호는 이처럼 인생에게 있어서 중요한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또 과잉보호는 자신감, 의식 이것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과잉보호를 받은 사람이 잃어버리는 것은 자신감뿐만 아니라 실제 능력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래도록 과잉보호를 받다보면 어느 덧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연을 제대로 날리려고 하면 어느 정도 줄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잉보호는 줄을 풀어주지 않아 자식으로 하여금 날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연을 날릴 때 줄을 짧게 하면 아무리 띄어도 가라앉습니다. 너무 많이 풀어주어서도 안 되지만 너무 짧게 풀어도 안 됩니다. 자식이 이와 똑같고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재능력이 있는 아내를 아주 무능한 아내로 만들어가는 남편들이 적지 않습니다. 내가 다 챙겨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과잉보호를 받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다 속박됩니다. 전부 다 묶여버립니다. 그러면서 한편 마음속에는 그 속박으로부터 풀려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것 때문에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를 과잉보호하는 사람이 미워지고 싫어집니다. 멀리 하고 싶습니다. 여기에 생기는 또 다른 문제는, 자기는 나를 과잉보호해주는 이 사람에게만 사랑받고 다른 사람은 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 덜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거절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나를 사랑하고 보호해준다고 생각했던 이 사람도 정작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피보호자에게 생기는 또 다른 병리현상은 바로 버림받은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이 피보호자는 죄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남편이 그렇게 사랑하는데 나는 그 만큼 사랑이 안 되고 오히려 원망이 되고 미워지고 벗어나고 싶고 빠져나가고 싶으니 그런 자신이 미워지고 죄책감이 생겨납니다.

과잉보호는 심하게 말하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 능력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자녀로 하여금, 아내로 하여금 낮은 자아감을 갖도록 만듭니다. 열등감을 가지도록 만드는 것이 과잉보호입니다.

 

사실 과잉보호의 폐해는 결손보다 더 심합니다. 더 치료가 어렵습니다. 결손은 차라리 쉽고 치료할 수 있습니다. 결손 가정의 아내나 자식들은 자립이 가능하지만 과잉보호 받은 사람은 혼자 살 각오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능력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종의 바보가 됩니다. 과잉보호를 받은 아내들의 경우 남편이 아내를 바보로 만들어 바보와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보 자식을 만들어 바보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차라리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과잉보호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보호받지 못했다고 섭섭해 할 것 없습니다.

과잉보호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입니다. 그것은 본인도 모릅니다. 상대방도 처음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나를 저렇게 과잉보호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한계를 모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한계를 알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로 주신 명령이 한계를 알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내놓고 먹을 수도 있지만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계를 알라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이 한계를 알라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내가 할 수 있어도 해서는 안 될 것이 있는 이 한계를 알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해도 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 이것을 알라는 것이 하나님의 큰 명령입니다.

신자들은 그것을 알아야합니다. 그 한계를 알지 못할 때 혹은 한계를 넘을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보호가 아니고 독약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고 싶고 자식을 사랑하고 싶으면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내 아내를 나보다 더 사랑하신다, 내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맡길 줄 알아야합니다. 내가 자식들을 키우고 보호하고 아내를 보호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하나님 방식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형태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집트의 보호가 있습니다. 이집트에 들어갔을 때 그때는 노예로 살았습니다. 한동안은 요셉 때문에 아주 특혜를 받았고 나중에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챙겨주셨습니다. 요셉 때문에 챙겨주셨고 노예라는 것 때문에 아무것도 할 것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그런 보호함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불평할 것이 없었습니다. 노예이기 때문에 주면 받고 자라고 하면 자고 일하라고 하면 일만 하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도 이런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내를, 자식들을 돌볼 때 이렇게 완전하게 보호해야할 때가 있고 보호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업고 가는 보호라고 합니다. 전적으로 내가 업고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광야보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것저것 할 수가 있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있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었고, 물이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식량도 그렇고, 군사력도 군사가 어느 정도 있다할지라도 이길 수 있는 적이 있었고 이길 수 없는 적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불평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평을 해도 하나님께서 야단은 치시지만 대체로 참아주십니다. 들어주셨습니다. 물도 챙겨주셨고 먹을 것도 챙겨주셨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면 고기도 챙겨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는 점점 더 높아지셨습니다. 처음보다는 조금 더 기대를 많이 하시게 되고. 하나님이 야단치시는 것도 처음보다 조금 더 많이 야단치셨습니다.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를 챙기듯이 챙기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동행하는 보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가나안 보호입니다. 훈련이 시작됩니다. 냉혹합니다. 안팎으로 적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만나도 그치게 되고 하늘에서 주시는 그 무엇이 제대로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보호해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종결된 것이 아니라 눈으로만 안 보일 뿐 항상 챙겨주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원거리 보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방식입니다. 신자들이 자식을 키우는 방식, 내가 돌보는 사람을 보호하는 방식 이것을 제대로 배워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할 때 내가 이렇게 하면 되겠다, 이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꼭 알아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기독교 신자라면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경험 많고 아무리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배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돌보았는가?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돌보아야하는지 계속해서 성경을 보면서 배워나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이 사랑하는 자식은 여러분의 자식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식임을 알아야합니다. 내가 내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훨씬 더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믿고 맡길 줄 알아야합니다. 그냥 맡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걸 알고 맡겨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맡겨도 하나님께서 챙기시지만 여러분이 맡기고 기도하는지 아닌가는 천지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들으시고 응답하시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식을 다 챙기시지만 기도한 자식, 기도하지 않은 자식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께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마음으로만 기도한다는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참되게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계속해서 한 말,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이 삶을 통해서 체험한 것이 그것입니다. 기도의 자식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