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앉는 집안, 일어서는 집안 (사무엘 2:22~36)
주저앉는 집안, 일어서는 집안
사무엘 2:22~36
얼마 전 우리나라 제1세대 어른 목회자 한 분이 공개적으로 참회의 고백을 했습니다.
‘기본자질이 되어있지 않은 아들을 무리하게 담임목사로 세운 것은 제 일생일대의 실수였습니다. 한국 교회와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그리고 성도들 가슴에 씻기 어려운 아픔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15년 전에 자기가 시무하던 교회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 것을 95세의 노목회자가 눈물로 참회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한 한국교회의 큰 어른이었습니다. 그런 큰 어른이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교계 그리고 교회 안팎에서 어마어마한 비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목사님 귀에는 어떤 비난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줄 때 그 절차에는 더 중대한 하자가 있었습니다. 후임목사를 결정하는 교회 전체 회의를 지극히 당연한 무기명 비밀투표로 하지 않고 찬반 기립 방식으로 채택했습니다. 공개투표를 한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 소원대로 아들이 후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15년 목회하는 동안 교회는 비참하다고 할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전체 교인의 2/3가량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교회에는 고소고발사건이 난무했고 교인 출교, 제명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심지어는 목사 피습사건도 있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아들은 아버지가 그런 일을 벌였다고 의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고 아버지는 그것이 아들의 자작극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아들이 정년퇴임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들 목회자가 교회법을 어기고 법에 정해진 정년시한을 연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아버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나서신 것입니다. 노목회자는 먼저 자기 참회를 하고 난 후 공개적으로 아들에게 ‘교회의 모든 직책에서 떠나라, 임기 연장은 꿈도 꾸지 마라, 나는 이 교회의 설립자요 원로목사요 아버지로서 이것을 강력하게 명령한다.’ 라고 천명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리고 몇 달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한국교회의 큰 어른 목사님은 한국교회 세습 1호로 한국교회의 불명예로 커다란 오점을 남겼습니다. 오점을 한 번 남기면 두 번째, 세 번째는 아주 쉬워집니다. 그 목사님이 수십 년 쌓은 명예는 다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자식도 잃고 말았습니다. 다만 마지막 그 참회 그리고 결단으로 교회가 그나마 다시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은 다행입니다.
엘가나의 아내 한나가 드디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유명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이 어느 정도 자라자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의 지도를 받으면서 자라납니다.
제사장 엘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두 아들 모두 아버지를 이어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소위 세습이 된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아들 둘 다 행실이 좋지 못한 것입니다. 거기다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직업 성직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자기 입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삯꾼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요’(요10:12)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집안의 더욱 더 큰 문제는 두 아들의 그런 문제를 알면서도 아버지 제사장이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 제사장에 대해서 책망하기는 했지만 책망 같지 않은 책망만 했습니다. 엘리가 두 아들 제사장의 잘못함을 듣고 한 말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삼상2:23-25)
옳은 말이지만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이 정도의 책망은 안 하는 것만 못한 책망이고 오히려 면죄부를 주는 책망입니다.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25절)
당연한 귀결입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을 만큼 책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그때 엘리 제사장이 두 아들을 제사장 자리에서 쫓아내었어야했습니다. 이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길이고 이것이 자식을 살리는 길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25절)
자식 사랑도 제대로 해야합니다. 잠언서 27장은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잠27:22) 라고 아주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미련한 사람은 대강 해서 될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딱 엘리 제사장에게 맞는 말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잠언 19장 13절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번역한 ‘미련한 아들은 아버지에게 파멸을 가져다준다.’ 라는 말씀은 우리를 더욱 두렵게 합니다. 자식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자식이 망하고 자기도 망합니다.
우리 교회 개척 초창기 때의 일입니다. 제가 아끼던 젊은이가 신학을 시작했습니다. 그 신학생을 우리 교회 교육전도사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교육전도사로 일한 지 얼마 지났을 때 그 교육전도사의 안 좋은 행실이 저에게 들려왔습니다. 사실이 너무 구체적이었습니다. 알아본 결과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고민되었습니다. 이대로 그냥 넘어갔다가는 그 젊은 신학생이 제대로 된 목회자가 못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제가 결단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제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몇 번이나 연락해서 위로해줄까 생각하다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제가 없는 사이에 그 전도사가 결혼한다고 인사차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청첩장과 함께 축복해달라는 편지를 저에게 남겼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제가 편지를 썼습니다. 거의 20년 전 이야기인데 그때 제가 쓴 편지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동안 매정한 목사 때문에 힘 많이 들었겠다. 그러나 그 때 일은 나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하고 기도한 결과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틀림없이 자네를 위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한 일이었다. 당시 자네가 내 마음을 다 이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처음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오로지 자네가 바로 크고 참된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이다. 그것이 그 모든 일의 전부다. 혹 나중 자네가 정말로 사랑하는 후배나 제자가 생기면 지금 이 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 제가 쓴 편지의 대강의 내용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지금도 저는 제가 한 일이 꼭 잘한 것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또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엘리가 자기 두 아들에게 차라리 이렇게라도 했다면 적어도 자기 자식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성경은 25절까지 쭉 엘리 집안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다가 아주 의식적으로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26절) 라는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덧붙입니다.
엘리 집안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집안으로 있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사무엘의 집안, 콩가루 같은 집안, 예배드리러 갈 때마다 싸우고 울고불고 하던 집안,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집안은 올라가고 있다고 두 가정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려가고 있고 하나는 올라가고 있는데 이것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그런 두 아들과는 전적으로 달랐다는 말씀과 함께 무엇이 엘리의 두 아들을 그렇게 만들었고 무엇이 사무엘을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은총 받는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잘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서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30절)
‘취소!’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31-33절)
심판이 무섭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하게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엘리의 집안에 이렇게 무서운 심판을 하는가? 그들의 죄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엘리의 집이 그렇게 무서운 심판을 받는가? 죄의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하게 보고 알아야합니다.
먼저, 성경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30절) 라고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멸시했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멸시했기 때문에 나도 너를, 너의 집을 멸시하겠다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위 29절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17절에서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라고 또 설명하십니다. 제사 즉 예배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멸시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너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너무도 귀하게 여기시고 예배를 참으로 좋아하십니다. 얼마나 제사, 예배를 좋아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지에 대한 말씀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라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순종이 너무도 귀하다, 그 귀함은 하나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제사보다 낫다고 ‘말할 정도’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그렇게 귀하고 좋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정말로 원하지 않으시겠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긍휼에 대해서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같은 의미로 하나님께서 긍휼을 너무도 좋아하신다, 그 긍휼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제사까지도 포기할 수도 ‘있을 정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그 말씀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기 시작한 것, 하나님 곁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제사를 드려야하는데 약속한 시간이 되었어도 제사장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왕 사울이 그렇다면 내가 제사를 지내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제사를 지냈습니다. 사울 마음속에는 제사 정도야 내가 드리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네가 나의 명령을 버렸다고 말씀하시면서 그것 때문에 너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일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제사를 안 지내는 것보다 지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제사장은 아니지만 사울이 제사장 대신 제사를 지낸 것이 차라리 잘 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기독교인들이 항상 생각해야할 것이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는 사람들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반드시 제사장이 집례해야 한다는 하나님 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그 하나님 법을 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는 제사, 예배를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았을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 매주일 드리는 예배를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멸시했다고 말씀하시고 그 제사를 멸시한 것은 곧 하나님 당신을 멸시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는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29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식이 중합니다. 참으로 귀합니다. 자식만큼 귀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 자식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남는 것이 자식밖에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 사람들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기독교신자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와 논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여러분 자식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식을 챙기십니다. 여러분이 챙기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챙기시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자식을 잘못 챙길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실수가 없습니다. 가장 정확하게 여러분의 자녀들을 사랑해주십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내가 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자식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순진하게 자기 자식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깜짝 놀라셔서 말리셨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창22:1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복을 주신다고 하셨는지 창세기 22장 17절과 18절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두 번째,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세 번째,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네 번째,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산술적인 말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네 가지 복 가운데 몇 가지가 자식에게 갔습니까? 그렇게 잘한 아브라함에게는 한 가지밖에 안 갔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복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식입니다. 네 가지 중 세 가지가 아브라함의 자식에게 갔습니다.
엘리의 집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셨는데 그 심판은 참으로 무섭고 두렵습니다. 무서움과 두려움을 넘어서 처참합니다.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34절),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35절)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36절)
사무엘은 지금 엘리의 집에 와서 배우고 있습니다. 눈칫밥을 먹고 있는 존재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사무엘이 높이 올라가게 될 것이다. 이집에서 지금 어른 노릇하고 주인 노릇하고 큰소리 치고 있는 이 집의 후손들이 나중에,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사무엘 앞에 가서 밥 한 그릇 부탁할 처지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가정은 이렇게 올라가고 내로라하는 가정은 형편없이 떨어져 구걸하는 집안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다시 잠깐 멈춰서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서운 심판을 엘리집에 내리셨는데 엘리 집은 무서운 심판을 꼭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심판하시겠다고 심판을 선언하시는 것은 심판의 시작이 아니라 돌아오라는 부르심입니다.
이사야 5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7) 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받아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엘리 집에 이렇게 저주를 선포한 것은 끝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 지금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가랴 1장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1:3) 라는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라는 말씀을 이 짧은 한 마디 가운데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뜻은 내가 굳게 약속한다, 돌아오기만 하면 너의 죄를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다 받아주겠다고 약속한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는 말씀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너무도 악한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아합 집에 재앙을 불러 온 집안을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합 집안의 남자는 다 멸망할 것이고 개들이 아합 아내의 시체를 먹을 것이다, 아합 가족 중에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그 시체를 먹을 것이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을 것이라고 무섭게 심판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아합의 모습을 보십시오. 아합은 온 몸에 힘이 쑥 빠졌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왕상21:27)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유심히 보고 생각하면서 봐도 아합의 이 모습은 제대로 회개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척 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합의 그 모습만 보고서도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왕상21:29)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합 때문에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즉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제대로 회개하는 것 같지 않고 단지 회개하는 척하기만 하는 아합의 모습을 보고서도 하나님은 회개하는 것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록펠러가 대사업가로 성공한 후에 자서전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자서전에 자기 성공비결을 밝혔습니다. 자기가 성공한 비결은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한 세 가지 약속을 평생 지킨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가 십일조 생활을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늘 목사님 말씀을 따르고 무슨 일이든 교회에서 정한 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고 항상 순종한다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가 교회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즉 예배를 귀하게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예배를 귀하게 여기십시오. 그리고 정말로 아들을 사랑하고 딸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로 하여금 예배를 귀하게 여기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것 보다 여러분이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딸보다 하나님을 먼저로 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가장 귀한 사람으로 생각하시게 되고 하나님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을 다른 어떤 것, 어떤 사람보다 먼저로 생각해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