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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11~19)

분당소망교회 2018. 3. 23. 10:47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11~19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끝난 후에 두 병사가 고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두 병사는 그 처참한 전쟁에서 살아서 돌아간다는 기쁨에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고향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둘 중에 한 병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 잠시 들어가서 감사 기도를 드리자.” 한 병사는 교회는 무슨 교회? 이렇게 좋은 날 술이나 마시자두 사람은 거기서 헤어집니다. 하나는 교회로 가고 하나는 술집으로 갑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술이나 마시자고 했던 병사는 고향에 돌아간 후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 사람이 감옥 속에서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랄 일이 생깁니다. 미국의 제 22대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의 얼굴과 이름 때문입니다. ‘클리브랜드오래 전에 자기와 함께 참전했던 전우,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교회로 들어가 감사기도 드리겠다고 하여 헤어졌던 그 친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어느 마을을 지날 때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자기들의 나병을 고쳐달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본문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12-13)라는 말씀에는 그 절박함이 묻어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일반인들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법으로 정해져있기 때문에 가까이 가면 벌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소리 지릅니다. 나병환자는 겉으로 드러난 부분부터 썩어져 들어갑니다. 코 그리고 귀가 썩어져 들어가고, 성대가 썩어져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큰 소리 내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런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쳐서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주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의 간절한 요청에 예수님께서 즉시 치료해주셨습니다. 치료하신 후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이제부터는 일반인들로 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들은 이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갑니다. 제사장에게 가는 중간에 그 나병 환자 열 명의 나병이 완전히 다 낫습니다.

 

나병이 다 나은 그 열 명의 나병환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서 감사드립니다.” 라고 인사를 드립니다. 인사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는, ‘나병환자가 치료된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나병환자에게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병 낫는 것이 놀라운 선물은 될 수 있겠지만 최고의 복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나병 환자는 나병만 나으면 다 끝날 것 같이 생각됩니다. 경제 문제에 걸려있는 사람은 그것만 끝나면 다 해결될 것 같이 생각됩니다. 자식 문제에 걸려있는 사람은 자식의 그 문제만 끝나면 다 끝날 것 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최고의 복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소원하던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다 끝날 것 같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작일 뿐입니다. 병이 나았다면 그것으로 다 끝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대단히 기쁜 일이지만 그것이 그대로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하시는 말씀은, ‘그 놀라운 선물을 받았을 때, 그것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선물을 가지고 최고의 복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만약 놀라운 선물을 받고도 최고의 선물로, 최고의 행복으로 만들지 못하게 되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거리고 화()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고 그것으로 다 끝난 것처럼 생각하고 잘 못하면 큰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나병 환자 열 명이 다 놀라운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그 중 아홉 명은 선물 받은 것만으로 끝나고 말았다. 최고의 복인 구원까지는 받지 못했다, 최고의 복 구원까지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고의 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구원,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구원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가?

구원이란 첫 번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영생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던 삶의 연장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최고의 아름다움과 즐거움과 그리고 평화가 있는 행복한 삶이라는 이것이 구원의 첫 번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의 첫 번째 의미 이 외에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죽고 난 뒤뿐만 아니라 죽기 전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이 둘 다 있어야 완전한 구원입니다. 죽고 난 뒤 그때만 우리가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만이 구원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세상 사람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행복을 누리는 그것이 완전한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하신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는 말씀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 뭔가 예수님의 씁쓸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의 탄식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아홉 명에 대한 탄식입니다. 나병이 나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탄식입니다. ‘병이 나았다고, 입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자식의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닌데……’, ‘돈 좀 많이 벌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닌데……예수님의 안타까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그것으로 끝이 아닌데……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의 탄식은 감사하는 사람이 너무 없는 것에 대한 탄식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고도 열 명 중 아홉 명은 감사가 없구나, 사람들이 좀 심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그것과 똑같을지 모릅니다. 감사할 조건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열에 한 사람 정도는 감사하지만 아홉은 감사가 없다는 예수님의 탄식이 있습니다.

,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감사해야할 사람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감사하지 않는다는 탄식입니다. 감사하러 온 한 명은 당시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감사의 조건으로 따진다면 병 나은 열 명 중 가장 적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감사해야할 사람들, 그 누구보다 크게 감사해야할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는구나....’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대단한 은혜를 받아도 아무리 큰 복을 받고 선물을 받아도 감사하고 또는 감사하지 않는 것은 받은 은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감사하고 감사하지 않는 것은 감사할 이유가 있는지 혹은 감사할 이유가 더 많은지 여기에 따르지 않는다, 즉 감사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적게 감사할 조건이 되어도 감사하고, 감사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열배 백배 천배를 받아도 감사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감사는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감사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대단한 은혜를 받아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마음이 있는 사람은 조금만 받아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적게 받아도 그 사람들은 감사합니다.

 

여기에 제가 가끔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못할 형편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는가? 아니면 감사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감사할 형편이 되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이고 또 걱정되는 의문입니다.

감사가 곧 구원을 이루는 믿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한 명이 들어와서 예수님께 드린 감사는 감사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이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나를 나병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는 믿음입니다. 오지 않은 아홉 명은 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나병이 나은 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과 관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사가 없는 것은 감사할 이유가 없다, 받은 것이 없다는 말이 되고, 반대로 감사한다는 것은 감사할 이유가 있다, 받은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네가 나병이 나았다고 나를 찾아와서 감사하는 그것이 곧 믿음이고, 그 믿음이 자네를 구원했다.’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면 그저 좀 기분 좋고 하나님께 선물 좀 드리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에는 이렇게 깊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감사가 곧 구원을 이루는 믿음이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구원을 이루는 믿음이 없을 수도 있다. 즉 구원이 아직 아닌 사람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행복하십니다. 거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한 원리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행복하시면 곧 여러분이 행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어코 감사할 상황이 생기고 맙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감사할 일을 주십니다.

 

오래전 독일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해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조금 넉넉했던 노부부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린 아이들은 먹여야겠다고 생각하고 동네아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빵을 만들고 아이들을 모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얘들아, 여기 빵이 있다. 한 사람에게 하나씩밖에 못 주겠구나. 내일 또 올 테니 꼭 한 개씩만 가지고 가거라. 내일 여러분은 또 하나씩 먹을 수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한 개만 가질 수 있다는 말에 어떻게 하든 조금 더 커 보이는 빵을 가지려고 먼저 줄을 서려는 등 소란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아이들 중에서 한 여자아이만큼은 예외였습니다. 그라첸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그라첸은 언제나 맨 뒤에 줄을 섰습니다. 그라첸에게 돌아가는 빵은 항상 제일 작은 빵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더 큰 빵을 차지하는데 정신이 팔려 노부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지만 그라첸은 언제나 잊지 않고 깍듯하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 그라첸은 그날도 맨 끝에 줄을 섰습니다. 그날 그라첸이 받은 빵은 다른 날보다 유난히 더 작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첸은 여전히 공손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라첸이 돌아와서 빵을 먹으려고 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빵 속에 딱딱한 물건이 들어있었습니다. 금돈이었습니다. 쪽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너처럼 감사하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마련한 선물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