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험한 길 (마태복음 5:38-44)
좁은 문, 험한 길
마태복음 5:38~44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 기독교인들의 세상사는 법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10대의 한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를 구경하기 위해서 매표소 앞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 앞에 한 가족이 서 있습니다. 앞에 서 있는 가족은 무려 열 명이나 되었습니다. 아이들만 여덟 명입니다. 모두 열두 살이 채 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둘씩 짝을 지어서 부모 뒤에 손을 잡고 서 있습니다. 여덟 아이들은 이제 곧 구경하게 될 서커스에 대해 흥분된 목소리로 신나게 떠들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로 보아 그 아이들은 지금까지 서커스를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매표소 직원이 아이들 아버지에게 표를 몇 장 살 것이지 묻습니다. 아이들 아버지는 마치 아이들에게 자랑하듯이 어린이 표 여덟, 어른 표 두 장이라고 목에 힘을 주어 말합니다. 매표소 직원이 금액을 말합니다. 그 순간 아이들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다시 매표소 직원에게 금액을 묻습니다. 매표소 직원이 다시 금액을 말했습니다. 아이들의 아버지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돈이 모자라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바로 이때 이 소년의 아버지가 자기 주머니 속에 손을 넣더니 지폐 한 장을 땅바닥에 떨어뜨립니다. 그리고는 얼른 몸을 굽혀 그것을 다시 집어 들고서 앞에 서있는 아이들의 아버지 어깨를 두드립니다. “여기 돈이 떨어졌는데 방금 댁의 주머니에서 떨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지폐를 아이들의 아버지 손에 쥐어줍니다. 그 사람은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차립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돈을 쥐어주는 아버지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이들의 아버지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여덟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즐겁게 웃고 떠들며 서커스 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당시 소년의 집도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그날 밤 서커스 구경하지 못한 것이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 일 때문에 오래 오래 행복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 위에서 베푸신 가르침이라는 뜻,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산상수훈은 기독교 최고의 가르침입니다. 기독교 진리의 진수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즉 산상수훈인 마태복음 5,6,7장은 기독교 신자들의 세상 살아가는 총아입니다.
이 산상수훈의 말씀들을 보면 맨 먼저 참 대단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고, 우리 기독교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그와 함께 또 이 말씀들은 실천하기 참 어렵다, 어떤 부분은 이건 삶으로 실천하기 불가능한 일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먼저 산상수훈의 첫 장인 5장 첫머리에 팔복이 있습니다. 산상수훈 전체를 여덟 가지로 요약한 핵심입니다. 이 팔복은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이렇게 산다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한 번 해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면, 이 말씀대로 제대로 살려고 하면 힘쓰면 힘쓸수록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여덟 복의 중심이고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복’ 이것부터 그렇습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프토코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그냥 가난하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구걸하는 정도의 가난입니다. 견딜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마음 비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마음 비우는 것은 참 괜찮은 말이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프토코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내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살기 위해 마치 구걸하듯이 하나님께 매달리고 의지해야한다는 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본래의 마음은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 본래의 마음, 자연인의 마음은 나에게 무언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 나에게는 이런 것이 있다, 이것 때문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것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 본래의 마음입니다.
나머지 일곱 가지 복이 다 그렇습니다.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 모두가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한 번 해 볼만 해보입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 좋게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해보면 어렵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다 한 번 해보면 아예 그렇게 살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일들입니다. 먼저 구제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돈만 있으면 한 번 해보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구제해보면 정말로 어렵습니다. 돈이 있어도 마음이 있어도 구제하기 정말 어렵습니다. 해보지 않았을 때는 돈만 있으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 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이 구제입니다. 해보면 압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 특히 팔복 가르침이 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면 할 수 있고 해볼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막상 해보면 정말로 어렵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나가게 되면 아예 그렇게 살 생각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래서 점점 더 거룩한 사람,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가까워집니다.
소금 역할, 빛의 역할도 참 좋습니다. 맛이 없는 곳에 맛을 내도록 하고 썩어가는 곳에서 썩지 않도록 하는 소금, 어두운 곳에 빛을 밝히는 빛, 그 역할은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내려면 녹아야하고 빛을 내려면 무언가 태워야합니다. 그 역할을 하기는 좋아하면서도 내가 녹아지는 것, 내 것을 태우는 것, 내가 손해 보는 것, 내가 포기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그런 사람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한 번 맞은 것도 잊지 못하는데 마저 돌려대는 것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옷은 거의 대부분이 속옷, 겉옷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속옷은 없어도 어느 정도 생활할 수 있지만 겉옷은 없으면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겉옷이 어느 정도 중요한지에 대해서 출애굽기 22장에서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출22:26-2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것이 겉옷입니다. 이 겉옷에 대해서, 만약 속옷을 빼앗으려고 하면 그 사람에게 겉옷까지 벗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가능한 일입니까?
원수 중에서도 치가 떨리는 원수가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밀어오는 원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온 몸의 열이 위로 화끈 화끈 올라오는 원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그런 원수를 위해서 축복하는 사람은 성자일 것입니다 성자의 반열, 성자의 경지에 오른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이러한 면 때문에 산상수훈을 천국시민들의 윤리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산상수훈은 천국에 사는 사람들이 지킬 윤리로 평가될 만큼 고매한 윤리라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천국이 아닌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지키기에는 어려운 너무 이상적인 윤리이고 이상적인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말씀을 하시고 난 뒤에 당신이 하신 말씀이 쉽지 않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5장 마지막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어려운 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산상수훈의 참된 가치가 있습니다. 내용 자체도 귀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하나 더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결코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이루기 위해서 절대로 멈출 수 없는 존재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하는 존재, 끊임없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가야 하는 존재, 더 힘쓰고 애써야하는 존재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고린도 10장에서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는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는 사람이 제대로 없다는 말씀입니다. 서 있는 사람이 제대로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대로 서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하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해야하는 사람이 기독교 신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끝까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 살아가는 법입니다. 내가 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끝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겸손해야 하는 존재가 기독교인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목표로 그것을 지향하고 끊임없이 애를 쓰고 노력하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힘쓰고 애쓰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죽을 맛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기독교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A는 신앙 인격등급이 9등급입니다. A는 작년에도 9등급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B는 작년에 신앙등급이 3등급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금년에 힘쓰고 애써서 겨우 한 등급 올려서 4등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는 A에 비해서 한참 모자랍니다.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질문은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참된 그리스도인에 가까운가? 라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증진하는 사람,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더 올바른 일, 더 귀한 일, 더 아름다운 일을 향하여 끊임없이 증진하는 삶, 겉으로는 힘들 것 같지만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거기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만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손해도 보고 어려운 일이 많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행복 그리고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그 귀한 말씀과 함께 그 보다 더 중요한 의미로 주시는 목적이 바로 결코 이룰 수 없는 일, 그 일을 향해서 노력하고 힘쓰고 애쓰는 가운데 삶이 의미를 누리고 삶의 보람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분이 계셨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바울입니다. 그는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상을 받기 모자란다. 그래서 더 앞으로 달려간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 한 것이 없다, 나는 죽을 때까지 노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모자라는 사람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석학 중 한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비극이다. 그 까닭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서 실상은 불행을 불러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 분은 ‘사람들은 한 순간의 편안함을 위하여 어려움을 피한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어려움을 피하는 대신 불행과 문제를 더할 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석학다운 말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기독교인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힘듭니다. 때로는 고통도 있습니다. 손해 보는 것도 있습니다. 마음 아프고 몸이 병이 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그 문, 험한 그 길에 기독교 신자들의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참된 삶의 의미, 참된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원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