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비결 (사도행전 6:1-7)
행복의 비결
사도행전 6:1~7
악한 일에도 그렇지만 선한 일에도 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논란과 갈등 때로는 어둠이 틈타기도 합니다. 좋은 일, 선한 일 하는데도 그렇습니다.
‘4만 달러로 한 명을 도울 것인가? 2천명을 구할 것인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 한 마리 훈련비용은 4만 달러이다. 하지만 개발도상국 트라코마 환자의 실명위기를 치료하기 위한 비용은 고작 20달러이다. 당신이라면 한 명을 도울 것인가? 2천명을 도울 것인가?’ 「효율적인 이타주의자」라는 책을 쓴 저자가 한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스스로 말합니다. ‘물론 먼 나라의 빈민보다는 자국민을 돕는 쪽으로 끌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구할 수 있는 생명의 숫자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의 가치는 동일하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선진국의 빈민보다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빈민에게 기부한다. 같은 금액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이 지구에 처음 생겨난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난한 교인들을 구제하는 데에 어떤 교인은 더 도움을 받고 어떤 교인은 차별받는다는 문제로 교인간의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인들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과부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 과부란 단지 남편이 없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남편도 없습니다. 거기다 가진 재산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땅에 살면서 이스라엘 말(히브리어)을 쓰는 교인들이고, 또 한 부류는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해외에 오래 살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들인데 그 당시 세계 공용어인 헬라말을 쓰는 교인들입니다. 그 두 부류에 각각 과부들이 있었는데,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 자주 빠지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헬라파 교인들이 교회를 원망하는 일이 생겼고, 교인들 간에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그때까지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일들은 목회자인 사도들이 담당했습니다. 구제 일도 사도들이 담당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교회의 그런 갈등, 그런 원망, 그런 불만, 불평이 생긴 것은 사도들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사도들이 그 문제를 알고 곧바로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우리 너무 힘이 버겁습니다. 우리 힘이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할 만한 사람들을 뽑읍시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교회의 조직인 집사제도가 생겼습니다. 여기서 집사란 안수집사제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대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을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교회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바람직하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인 초대 교회, 그 초대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후에 생긴 교회는 미안하지만 이미 많이 오염이 되었고 순수함에서 많이 벗어났습니다. 충분히 문제가 있습니다. 잘 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개혁을 해도 그렇습니다. 와이셔츠를 새로 사서 몇 번 입고 난 후 세탁을 하면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깨끗하게 세탁한 와이셔츠와 또 새로 산 와이셔츠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납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가끔 교회 밖의 사람들이나 교인들 가운데 교회는 문제가 없어야한다, 교인 간에는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때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문제가 많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인 전부 다가 구원 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교회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는 그러나 그렇다고 교회의 문제를 그냥 방치할 것이 아니고 교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해결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누가 풀어야하는가? 바로 교회의 지도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목회자들을 비롯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이 교회의 문제가 있으면 돌아앉아서 머리를 싸매고 연구하고 기도해서 답을 받아야한다, 때로는 내가 희생함을 통해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것이 바로 교회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일은 명예가 아니라 멍에입니다. 그러나 그 멍에는 잘만 감당하면 영광의 멍에이고 행복의 멍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고난을 나에게 주셨는가?’ 행복해집니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문제가 있을 때는 이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풀어나가야 한다. 그 누구도 탓을 하면 안 된다. 비록 다른 사람이 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이 만든 문제이지만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교회 지도자들은 그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된다.’ 이것을 두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하나 더 말씀하시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알아야한다’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지도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내가 지도자로 서면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지도자들을 세워서 일을 나누어 하기도 합니다. 특히 목회자들이 이것을 더 잘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하나님의 종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나에게 여러 가지의 한계가 있다, 나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목회자들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지도자들은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목회자라면 한계가 있는 자신의 힘을 어디에 써야하는지 생각해야합니다. 예를 들면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종노릇하는데 온 힘을 다해야합니다. 장로들은 장로 일을 하는데 모든 힘을 쏟아야하고 권사 안수집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하나님의 종은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 목회자들은 대단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대단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교인들은 우리 교회 목사는 대단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 있고 그 말씀을 들으면 혹하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런 것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일을 잘 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 목회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단 하나, 하나님의 종노릇을 제대로 하는 사람, 충성스럽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장로님들도 안수집사님, 권사님들도 내가 힘써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특별히 권사님들은 더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해야 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내키지 않는 일들을 도맡아 해야 합니다.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하실 수 있는 일을 해야 하고 충성스럽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 일 잘 하는 사람, 잘 난 사람, 이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에서 세례요한을 예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마11:7)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흔들리고 저렇게 흔들리는 그런 목회자더냐? 라는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온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1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은 목회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좋은 옷을 입는’ 그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은 무어라고 하든 하나님 눈에는 목회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마1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보기에 좀 이상했습니다. 음식도 사람들이 먹는 것과 달랐고 옷도 달랐습니다. 하는 행동도 많이 달랐고 사는 것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충성에 있어서는 세례요한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종이고 최고의 목회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장로님들도 권사님들도 안수집사님들도 이것을 생각하여야합니다. 충성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이 사람을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이런 사람이 최고의 하나님의 종, 지도자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듯이 이것저것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종들의 주된 사역은 따로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있어서는 말씀과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일할 사람이 없을 때 목회자들은 이 일 저 일 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여건이 되기만 하면 설사 목회자가 다른 사람보다 일을 더 잘하고 본인이 자기가 꼭 이 일을 했으면 좋겠다 싶어도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 사역과 기도에 전념해야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위의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히 맡기신 일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장로님들도 안수집사님들도 권사님들도 각각 맡으신 일이 따로 있다, 그리고 그런 일들 이 외에는 다른 사람이 감당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사님들, 장로님들, 안수집사들, 권사님들은 각각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고 그 일 이외의 것들은 다른 사람이 나누어 담당해야지 전부 다 목사님, 전부 다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아무 직책이 없어도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것이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뽑힌 초대교회 집사님들은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구제하는 일, 교회 재정 출납하는 일들만이 아니라 몸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멀리 못 나갔습니다. 그럴 때 집사님들은 저 멀리 남쪽에 가서 복음을 전도하고 사람들이 잘 가려고 하지 않는 오늘날로 말하면 북한과도 같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심지어는 아직 아무도 목회자들은 순교를 당하지 않았는데 맨 처음 순교를 당한 사람이 안수집사였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스데반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교인들은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도 역시 한계가 있는 인간인 것을 알아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자라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실수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잘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복된 교인들과 그렇지 못한 교인들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복되지 못한 사람들, 복을 받지 못할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이나 교회 지도자들에게 어떤 한계나 허물, 부족함, 실수가 보일 때 꼭 비난하고 떠들어대고 더 찾아내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복을 받지 못합니다. 잘 되지 못합니다. 내가 교회에 나와서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복을 왜 안주시는지 많은 사람들이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복 받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복 받을 일이 따로 있습니다. 복 받는 사람은 다릅니다. 비난하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에게 모자라는 일, 장로님들에게 모자라는 일을 내가 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복을 받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홍수가 다 끝나고 난 뒤 노아가 기분이 좋아서 포도주를 좀 많이 마신 것 같습니다. 취했습니다. 노아가 하체를 드러내고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때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 가나안이라는 아들이 들어갔다가 밖에 나와서 아버지 하체를 보았다고 떠들어댔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다른 두 형제가 아버지 방에 들어갑니다. 둘이, 아버지 몸을 덮을 것을 가지고 들어가는데 뒤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 벗은 모습을 안 보려고 한 것입니다. 뒤로 들어가서 안 보는 가운데 아버지를 덮어드리고 나왔습니다. 나와서도 아버지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말하고 아버지를 비난했던 아들은 저주를 받고 두 아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 다윗에게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중 압살롬이 이복형을 죽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피해서 외국으로 도망갔습니다. 다윗이 처음에는 몹시 화가 났습니다. 아들이 외국으로 도망간 지 몇 년이 지납니다. 자식 이기는 아버지가 있습니까? 그렇게 죄를 지었어도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 죄를 지은 압살롬이 보고 싶었습니다. 다윗 옆에 있던 신하 한 사람이 다윗의 마음을 알아챕니다. 우리 왕님이 저렇게 못된 아들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구나? 그런데 이 신하가 아무리 보아도 압살롬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야심이 많고 음흉하고 언제 어디서 못된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압살롬이 아들이라고 다윗이 보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저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차라리 외국에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지만 왕이 저렇게 보고 싶어 하니 어쩔 수 없으니 돌아오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압살롬이 돌아오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왕을 위로해줍니다. 다윗을 누가 만든 줄 아십니까? 다윗이 잘 나서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윗을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적군과 전쟁할 때 일입니다. 다윗의 진은 저 높은 산에 있고 적진은 낮은 곳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었습니다. 한참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다윗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합니다. 누가 자기 고향 베들레헴의 우물에 가서 물 한 그릇 길어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제정신으로 하는 말입니까? 자기 때문에 피 흘리는 병사가 생기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부하들은 아무 소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 장군 세 사람이 적진을 뚫고 가서 물을 떠옵니다. 본래 다윗이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부하들은 그것을 알고 갑니다. 무언가 좀 잘못되었다 싶으면서도 아무런 비난을 하지 않고 물을 떠왔습니다. 왕에게 물을 전하자 그때서야 다윗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미쳤구나, 내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는가?’ 그리고 마시지 않고 부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윗을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이스라엘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좋은 목회자를 만들고 좋은 교회를 만들고 좋은 가정을 만들고 좋은 나라를 만듭니다.
행복한 신자들, 행복한 가족들, 행복한 국민들에게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에게 허물을 보일 때, 가정의 가장들에게 안 좋은 것이 보였을 때,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런 저런 것을 보였을 때 세상 사람들은 어떻다 하더라도 정말로 ‘행복할 만한’ 교인들, 가족들, 국민은 다릅니다. 본래의 기독교 신자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 탓이다, 저 사람 탓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 이럴 때 행복한 교회가 되고 행복한 가정이 되고 행복한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럴 때 자기에게 먼저 행복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 결과로 더 행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 됩니다. 자식들도 잘 되고 경제문제도 잘 됩니다. 행복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행복한 교인들의 비결, 행복한 가족들의 비결, 행복한 국민들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