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똑똑한 사람들 (마태복음 11:2-6)

분당소망교회 2019. 9. 11. 10:10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2)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4)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5)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6)

 

- 마태복음 11:2~6 -

    

 

 

똑똑한 사람들

 

 

 

마태복음 11:2~6 ═══════════════════

 

 

프랑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영국에 점령당해가고 있던 1429년 프랑스 한 지방에서 양치기 하고 있던 한 소녀가 왕세자 만나기를 요청합니다. 힘들게 힘들게 왕세자를 만납니다. 왕세자를 만난 양치기 소녀가 말합니다. “저는 주님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많은 곡절 끝에 소녀는 전쟁에 나가는 것을 허락받습니다. 이 양치기 소녀가 잔 다르크입니다.

잔 다르크는 정부로부터 소수의 병력을 얻었습니다. 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잔 다르크는 하얀 말을 타고 백합꽃이 수놓인 군기를 들고 병사들 앞에서 전선을 누빕니다. 놀랍게도 잔 다르크가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이 이어집니다. 잔 다르크의 이러한 용맹에 프랑스 군은 용기 충천하여 영국군에 포위되어있던 프랑스 주요도시 오를레앙을 해방시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잔 다르크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희한한 전략을 구상합니다. 마녀전략입니다. 영국은 프랑스 각 지방에 잔 다르크가 마녀라는 소문을 퍼뜨립니다. 왕실과 교회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있던 프랑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영국의 그 모함에 넘어갑니다. 잔 다르크는 마녀로 체포됩니다. 잔인한 고문, 이어지는 협박 끝에 잔 다르크는 사형선고를 받고 화형을 당해 불에 타서 죽습니다. 심지어 불에 탄 시체까지 조롱받았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명에 의해서조국을 지킨 잔 다르크,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잔 다르크를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영화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 세례요한이 이스라엘 왕 헤롯에게 괘씸죄에 걸려 감옥에 갇힙니다. 세례요한은 구원되지 못한 채 감옥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합니다. 베어서 쟁반에 담긴 목이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까지 되고 맙니다.

이 세례요한이 죽기 전에 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4)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그 질문에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4-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이전에 이미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29-30)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또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1:30-34)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이 마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질문을 던지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 자신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감옥에 잡혀갔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내가 오로지 당신의 길을 준비하다가 죽어가고 있는데,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데 왜 구원해주시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길을 예비하고 당신의 일을 하는 자기를 구원해주시지 않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제자들을 보내서 질문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죽음이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지만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해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들이 가질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마땅하고 당연한 것이라면 반드시 우리의 생각처럼 되어야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잘 되어야하는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일어나도 쉽게 해결되어야만 하는가?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은 억울한 일도 당하지 않고 불의의 사고, 뜻밖의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명에 의해서 그 일을 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라다녔습니다. 추앙도 받았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위치에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종의 자세를 제대로 지켰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철저하게 절제했습니다. 하는 일도 오로지 복음만 전했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먹는 것도 메뚜기를 먹고 꿀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하는 말도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웠습니다.’ 이 말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전했습니다.

그 세례요한을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이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7-9)

그러면서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19-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최고로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이렇게 큰 칭찬을 받은 세례요한이 얼마 후에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의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마저도 인정한 그 세례요한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왜 그냥 보고만 계셨는가?’ 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들의 억울한 일, 원통한 일을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만 계시는 것은 세례요한뿐만이 아닙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서도 상당히 많은 분들이 그런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바르게 살고 바르게 믿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옳게 살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는데, 물론 완벽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모든 노력을 다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생각해주시지 않으시는가? 다른 것 어떤 것보다 자식은 챙겨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큰돈은 못 번다고 하더라도 회사가 그냥 대강 대강 지나가는 이 정도는 하나님께서 해주셔야하지 않겠는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 계시는가? 이런 일들을 경험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도 그러했습니다. 야고보는 열 두 사도 중 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사도 야고보는 선별되고 또 선별된 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열둘을 구별하여 세우신 이후에 3년 동안 데리고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배움을 받고 훈련을 받고 이제 막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야고보는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냥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일을 이렇게 하시는가? 그 귀한 사람, 그렇게 훈련한 사람을 왜 아무 일도 못하고 그냥 죽는 것을 보고 계셨는가?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스데반을 최고로 칭찬합니다. 인격, 신앙인격에 그 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칭찬하십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교회에서도 여러 사람에게 인정받아 안수집사로 선출되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 권세와 능력까지 있어서 놀라운 일들, 대단한 기적들도 많이 행했다.’ 라고 말씀하신 그 스데반이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돌에 맞아서 온몸이 깨어져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하나님의 사람, 그렇게 귀하고 능력 있는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 대답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 때문에 저런 까닭으로, 이것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대답도 하나 마땅한 것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크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생각에 그것이 옳다고 그렇게 되어야한다고 마땅히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아닐 수 있다. 너희들 생각이 그것은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잘못되는 것일 수가 있다.’ 이사야 55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미다,

네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55:8-9)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하는 것이 더 옳고 결국은 여러분에게 더 좋은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르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모른다.’ 이 말씀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아주 특이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 일을 할 일꾼을 찾으러 장터에 나갔다. 아침 일곱 시쯤 장터에 나가서 일꾼 몇 사람을 데리고 포도원으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아침 일곱 시에 들어온 사람들과 하루 종일 일하면 7만원 급여를 주겠다는 고용계약을 했다. 그리고 주인은 아홉시에 다시 나가 보니 또 일꾼이 있어서 몇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열두 시에도 오후 세시에도, 오후 다섯 시에도 포도원 주인은 일꾼들을 포도원에 데리고 왔다. 오후 여섯 시 퇴근 시간이 되었다. 주인은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부터 불렀다. 일당을 7만원 지급했다. 한 시간 일하고 하루 일당 온전히 다 받은 것이다. 7만원을 받은 사람은 크게 감사하며 포도원을 떠났다. 이것을 본 아침 일곱 시부터 일한 일꾼들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저것을 보니 우리는 틀림없이 최소 몇 만원은 더 받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차례가 되어서 일당을 받고 보니 오후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과 똑같은 7만 원이었다.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 사람과 똑같은 일당을 받은 아침 일곱 시에 들어온 일꾼들이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 주인에게 항의를 했다. ‘온종일 뙤약볕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이 어떻게 똑같이 대우할 수 있습니까? 너무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주인이 대답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여러분들과 계약할 때 하루 일당을 7만원으로 정했고, 나는 여러분들과 계약한 것처럼 7만원을 드렸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까?’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 납니다.

 

주인 말이 맞지 않습니까? 하루 일하면 7만원을 주겠다고 계약했고 7만원을 주었으니 맞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공정하지 않습니다. 공정하지 않아도 많이 공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그 누구도 조금이라도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것이 공정하지 않고 옳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 같고 바른 것 같고 눈이 정확한 것 같고 생각이 제대로 된 것 같아도 그러나 얼마든지 아닐 수 있다. 옳은 것, 바른 것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것이 나에게 행복을 줄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좋은 것이 틀림없다 고 생각하는 그것이 아닐 수 있고 반대일 수 있다, 내가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설사 안 좋게 보일지라도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에게 좋은 것이고 여러분들의 행복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5:30)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내 생각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나의 뜻대로 하지 않고 오로지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한다고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인간으로 온 이상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말씀만 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를 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를 지지 않기 바라지만 하나님의 뜻은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 생각은 언제나 옳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내 생각, 우리 생각이 틀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 확실하다고 확신되는 것조차도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확신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이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신자들도 물론 각각의 의사를 가질 수 있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디 잘 아십시오. 참된 기독교 신자들,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의견에 대해서 강하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꼭 옳다고 단정하는 것, 참된 신자들은 하지 않습니다. 특히 고집은 절대 부리지 않습니다. 내 집에서도 내 아내 앞에서도 내 회사에서도 내가 고용주고 사장이고 회장이라도 내가 오너라도 고집을 절대로 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 생각이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내 생각과 세상의 주인이신,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 지도자들은 스스로 너무 똑똑했습니다. 스스로 잘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은 아예 듣지 않았습니다. 소위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렇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을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1:16-17)

다른 사람 말은 듣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옳고 다른 사람 생각은 내 생각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귀가 없고 입만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11:18).. 이처럼 요한은 아주 경건하게 살았고 절제하며 살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귀신이 들렸다,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11:19) 라고 예수님을 놓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세례요한과 달리 잡수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끝까지 어떤 말도 안 듣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자기네들 고집만 부리다 결국은 망하는데, 자기가 망하고 자기 집이 망하고 나라를 멸망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도자가 그런 생각을 하면 따라갑니다. 가장 되신 여러분들, 부디 이 부분을 잘 아시기 바랍니다. 나라의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하면 다 그렇게 따라갑니다. 특히 교인들은 더 잘 따라갑니다. 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이방이라도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따잉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11:20-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믿지 않습니다. 지도자들도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경향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지금의 기독교 신자들까지도 거의 비슷합니다. 지금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기독교를 보면서, 기독교 신자 기독교회를 보시면서 한탄하시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11:15)

모두 다 나한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 대해서하시는 말씀이고 안 믿는 사람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나에게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똑똑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제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11:25-26)

어떤 사람이 진짜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잘 나서 잘난 체 하고 큰소리 치고 말 잘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똑똑해서 내 생각이 옳다 내가 하는 일이 더 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진짜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혼자만 똑똑한 사람입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무슨 일, 무슨 문제이든 간에 주님께 가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모릅니다. 주님 답 주십시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11: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똑똑하지 못해서 못난 사람처럼 그냥 받아들이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주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어떤 멍에도 지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오라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고 이것이다 하면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난 사람들 눈에는 미련스럽게 보입니다. 못나게 보입니다. 저렇게 해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까 싶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집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9-30) 그런 사람들이 안식을 누리고 평안을 누리고 평화를 소유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예수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