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릇인가? (마태복음 12:1-8)
어떤 그릇인가?
마태복음 12:1~8 ════════════════════
최근 우리나라 재벌의 자녀들의 ‘갑질’ 로 시민들의 분노가 터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외국의 한 뇌신경심리학자가 새겨들을 말을 한 것이 있습니다. ‘상속 등 세습을 받은 자가 늘 가지는 생각이 있다. 나의 자리는 나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얻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충분히 성숙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힘들다. 그들은 필경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내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이어서 그 학자는 말합니다. ‘돈과 권력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느끼는 것은 필연적이고, 점차 그들은 독단적이고 파괴적이 되며 타인을 괴롭힐 가능성이 높다.’
노력 없이 버는 돈, 권력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취하게 만듭니다. 거기다 종교 권력까지 더해지면 죽거나 망할 때까지 취하면서 깨어나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라면서 그들에게는 백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예수님께 대한 시비로 시작합니다. 시비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시비라는 말의 뜻을 여러분들은 잘 아십니다.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것, 잘잘못을 가리는 것을 말합니다. 시비하는 까닭은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가리자는 것입니다. 말의 뜻 자체로만 하면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가려져야 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마음이 너무 좋다보니 그냥 좋다 좋다 하다가 좋은 것,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거기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 넘어가는 것, 이것이 좋은 면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큰 문제입니다.
말의 뜻 자체로만 하면 시비라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구별되어야 하고 가려져야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 같지도 않은 일로 따지고 다투고 시비 거는 것입니다. 그럴 가치가 하나도 없는 것, 해봐야 아무 소득도 없는 것으로 서로 싸우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다투는 거의 모든 것은 큰일을 두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서로 싸웁니다.
예를 들면 부부간에 큰 문제, 절대적인 것에서는 부부가 의견이 갈라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일치합니다. 부부간에 다투고 문제를 만드는 것은 대부분 사소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부부간의 거의 모든 문제가 ‘미안하다.’ 라는 말 한 마디로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부부들이 ‘미안하다.’ 라는 말을 못 배웠습니다. 이 말을 하면 죽는 줄 압니다. 그것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깨어집니다. 상당히 많은 가정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그릇대로 삽니다. 간장 담는 그릇을 종지라고 하는데 아주 작습니다. 종지에 물을 붓기 시작하면 금방 넘쳐흐릅니다. 냄비도 아주 얇은 냄비가 있습니다. 불 위에 올리기만 하면 금방 끓어서 넘칩니다. 그런 라면 냄비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세어도 큼직한 돌멩이를 세는 것이 아니라 좁쌀만 세는 사람이 있습니다. 좁쌀만 세다가 큰 것을 제대로 세어보지도 못하고 인생이 끝나버리고 일이 끝나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도 있고 참을 때도 있어야 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기어이 말하고야 마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어코 아내 심정을 상하게 하고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큰 호수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좋습니다. 아무리 쏟아져 들어와도 얼마든지 담을 수 있는 그릇인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아무리 불을 때도 위에서 내려쪼여도 힘들게 또 힘들게 해도 속에서 다 해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 끓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정도라면 터질법한데 터지지 않고 안에서 다 해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손톱만큼 알면서 전부 다 아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떠들어대고 아는 척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릇이 큰 사람은 다 알면서도 모르는 듯 가만히 있습니다. 묵묵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 조금하고 자기가 그 일을 다 한 것처럼 자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는데, 어던 사람들은 할 일을 다 하고도 아무 일 안한 듯이 가만히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저 참고 가만히 있습니다. 꼭 필요할 때 한 마디만 하고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릇대로 삽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자세하게 볼 것은 ‘그 바리새인들이 거는 시비의 내용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남의 밭에 가서 남의 곡식을 먹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먹었다고 시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의 것을 먹은 것은 잘못입니다. 도둑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미제라블’ 장발장은 그 당시 법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빵 한 조각 훔친 것 때문에 19년이나 감옥살이를 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유대인의 율법은 그런 것에 상당히 관대합니다. 율법을 말씀하는 신명기 23장에는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신명23:25)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먹는 것은 좋은데 베어서 가지고 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참 괜찮은 법입니다. 자비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사실 본래 율법은 다 이렇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책망한 것이 ‘아무리 율법이 허용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고매한 예수님의 제자들이면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들이야말로 이 어려운 이스라엘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창창한 젊은이들인데 법이 허락한다고 그럴 수 있습니까?’ 라고 했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시비한 것은 ‘왜 안식일에 그런 것을 했는가?’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님 당시 율법에는 안식일 금지 규정이 서른아홉 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남의 밭에 가서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그 중에서 세 가지가 해당되는데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는 안식일에 이삭 자른 것은 이삭 베기 금지하는 법을 위반했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손으로 뜯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삭에서 벼를 손으로 자른 것은 탈곡 금지령을 위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손으로 비볐는데 비비면 껍질은 떨어지고 알곡만 남는데 이것은 안식일에 키질을 금지한 법에 위반된다는 것입니다. 여기다 더 까다로운 사람들은, 그것 전체가 음식을 장만한 것이다, 그것은 안식일에 음식을 장만한 죄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죄 같습니까? 세상의 일에는 본질적인 일, 절대적인 일과 비본질적인 일, 상대적인 일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일은 중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모든 힘을 다해서 이루어야합니다. 만약 그것 때문에 싸움을 해야 한다면 싸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본질적인 일을 위해서라면 싸워야합니다. 싸워서 이겨야합니다. 그것 때문에 죽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일이라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의견이 틀림없이 상대방 의견보다 더 좋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더 좋은 의견인 내 의견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에 따를 수 있습니다. 비본질적인 일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비본질적인 일이라면 내 의견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더 더욱 그래야 합니다. 누가 어른일까요? 비본질적인 일에서 나를 포기하고 양보하는 사람들이 더 어른입니다.
본문의 일에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바리새인들이 그런 안식일 규정을 비본질적인 일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문제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절대적인 일, 본질적인 일로 보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라는 14절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었고 예수님께서 하신 몇 마디 말씀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여러분, 그것은 본질적인 일도 아니고 절대적인 일도 아니고 1차적인 일이 아닙니다. 아십시오. 이것은 비본질적인 일이고 아무리 해도 2차적인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사울 왕 시대에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을 갔습니다. 급히 도망가느라 아무 것도 챙기지 못했으므로 극도로 시장했습니다. ‘어디 가면 좀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하나님의 전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는 항상 떡이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먹을 것을 좀 주면 좋겠다고 부탁합니다. 제사장이 물려 나온 떡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물려나온 그 떡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 떡을 다윗이 먹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로부터 1,00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잘못했다고 고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본문 3절과 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두 번째는 율법 자체로 설명하셨습니다. 율법의 제사 제도에는 안식일에 지낼 제사를 정해둡니다. 소제가 있고 전제가 있고 번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는 안식일에 제사장이 집례하도록 정해두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도 안식일에 절대로 아무 일도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필요하다면 안식일에도 일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는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아주 논리가 정연하십니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 두 번째는 율법 자체를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판단 주체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죄를 판단하는 것이 누구냐? 절대적이다, 비본질적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누구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인정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법 자체가 그렇습니다. 법전 자체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법을 사람들이 시대의 여러 가지 상황에 맞도록 만든 것입니다. 사람들이 양식, 상식이라는 것을 합해서 법을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안식일에 관한 일이라면 안식일의 주인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냐? 안식일에 이런 것은 해도 좋다, 이런 것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 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아닌가? 하나님인 바로 내가 판단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라는 6절 말씀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라는 8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네 번째, 합리와 상식의 기준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기르는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서 건져냅니다. 이것은 율법에 없지만 종교지도자들이 괜찮다고 해석했습니다.’
계속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귀합니까? 양도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낼 수 있다면 안식일이라도 사람을 위기에서 건져내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1-12 절)
이것을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2장에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 라고 아주 명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그 뒤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 그대로 하셨습니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11:13)
그릇의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그릇은 큰 그릇이냐? 작은 그릇이냐? 라는 문제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릇입니다. 안 좋은 말로 하면 금간 정도도 아니라 깨어져서 사기조각 같은 그릇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서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 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쓴느 것도 있나니..’(딤2:20)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그릇입니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22절)..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셨습니다. 참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감격합니다.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23절)..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정반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쫒아내지 못하느니라’(24절).. 저 예수가 한 것은 귀신 들렸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으며, 이렇게 행동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백성 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고쳤는데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제 잠깐 멈추고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그릇은 어떤 그릇입니까? 제법 큽니까? 아니면 간장 종지 같은 그릇입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데 혹시 그 안에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담겨있는지 아니면 그것을 먹으면 배탈 나고 병이 나는 쓰레기 같은 것이 담겨있는지 심각하게 잠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은 좁쌀만 세는 정도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큼직한 것을 보면서 큰 일, 그야말로 거시안적으로 세상을 살고 보고 있는 사람인지 한 번 보십시오. 틈틈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그릇인가? 깨진 그릇인가? 온전한 그릇인가? 쓸 만한 것을 담고 있는 그릇인가? 아니면 냄새나고 썩고 쓰레기 같은 것들이 담겨있는가? 무엇이 담겨 있는가?’
멀쩡한 사람 중에서도 썩은 것을 담은 사람들은 많습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33절)
그렇습니다. 그릇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 저의 그릇 온전하게 해주시고 좋은 것을 담은 그릇이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실 것은 우리가 죽고 난 뒤에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수시로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구원을 다 받지만 복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을 것인가? 여러분이 만듭니다. 그 기준은 여러분이라는 그릇 속에 무엇을 담았는지 여기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것이 담겨 있느냐? 예수님의 선이 담겨 있느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3-37절)
다시 한 번 더 질문합니다. 여러분 그릇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열심히 세어서 좁쌀을 여러분 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까? 아니면 큼직한 그릇에 이 사람의 말도 담고 저 사람 말도 담고, 못난 사람들도 담고 잘난 사람들도 담고, 듣기 싫은 소리도 담고 속상한 소리도 담아서 넉넉한 가슴을 가지고 호수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혹시라도 지저분하고 안 좋은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너무 몰아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 힘으로 안 됩니다. 대신에 좋은 것을 자꾸 담으십시오. 나쁜 것이 자동적으로 밀려나갑니다. 자비를 담으시고 사랑을 담으시고 긍휼을 담으시고 사람을 불쌍하게 이 사람 저사람 이해하는 것을 자꾸 담아보십시오. 그러면 싸우고 다투는 것들이 다 물러가게 되어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담으십시오. 예수님에게는 모든 선이 다 있습니다. 다 받아들이십니다. 마지막에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모든 사람을 포용하셨습니다. 그 예수님 속에 사랑이 있고 평화가 있고 온유함이 있고 긍휼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담으면 저절로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향기 나는 사람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