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이면서 실패하는 이유 (열왕기상 2:13-2)
신자이면서 실패하는 이유
열왕기상 2:13~21═══════════════════
우리들의 자녀들 또 우리 손주들이 잘 자라면 우리의 면류관이 되지만 잘못 자라면 근심거리가 되고 그 근심거리는 이 땅의 삶이 지속되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면류관도 끝까지 가게 되고 근심거리도 끝까지 가게 됩니다. 잘 길러야합니다.
교회에서 자란 아이들은 잘못 되지 않습니다. 혹 잠깐 잘못될 때가 있어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1년 동안 교회학교에서 여러 행사를 하지만 여름 신앙수련회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사회적 그리고 신앙적 인격 성숙이 제일 많이 된다고 말합니다.
자녀들을 잘못 길렀을 때 문제는 큽니다. 다윗의 네 번째 아들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자식들로부터 두 번째 반역을 받게 됩니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랍니다. 악몽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서둘러서 자신의 후임으로 솔로몬을 지명하는 조치를 즉각 취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즉위 소식을 들은 아도니야는 성막으로 도망갑니다. 제단 뿔을 잡고 어떻게 하든 살려달라고 호소합니다. 그 말을 들은 솔로몬이 더 이상 악을 범치 않은 조건으로 아도니야를 용서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라고 학깃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학깃은 다윗의 여러 아내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다윗이 죽습니다. 다윗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찾아와서 솔로몬 왕에게 자기 부탁을 전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탁 내용이 아주 야릇합니다. 아버지 아내는 아니었어도 아버지 침대에서 아버지의 몸 난로 노릇을 하던 아비삭을 자기 아내로 달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도니야의 이 부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까? 솔로몬이나 다른 사람들이 아도니야의 부탁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전해들은 솔로몬이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솔로몬은 어머니 밧세바에게 “어머니, 그것을 부탁이라고 전해주십니까? 차라리 저의 왕 자리까지 아도니야에게 주라고 말하십시오. 아도니야는 오늘 죽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이 자기 어머니를 이렇게 함부로 말할 사람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자기 어머니 밧세바를 얼마나 극진하게 모시는지 보여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 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왕좌에 앉고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자리를 베푸니 그가 그의 오른쪽에 앉은지라’ 라는 19절 말씀입니다. 밧세바가 부탁이 있다고 말하자 솔로몬은 밧세바에게 ‘내 어머니여 구하소서 내가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20절) 라고 말했습니다.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한 부탁 때문에 지난번 그런 반란을 하고도 목숨을 건졌던 아도니야는 단칼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25절)
해도 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말도 그렇고 행동도 여러 가지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도니야의 그 부탁은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할 수 없는 부탁입니다. 어떻게 ‘어머니의 자리’에 있던 사람을 아내로 달라고 말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가 그런 부탁을 한 데는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이 잘못 된 것이라는 마음이 아도니야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밧세바에게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15절) 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도니야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데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첫 번째 아들은 압살롬에게 살해당했고 둘째 아들은 일찍 죽었습니다. 셋째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고 아도니야가 그 다음입니다. 순서로 보면 자기가 왕이 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야의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는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모든 노력을 다하고 결론이 정해지면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받아들였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도니야도 사실은 왕 자리가 솔로몬에게 넘어간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15절) 라는 말씀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도니야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못 하셨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큰 아들 가인과 작은 아들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가인이 분해서 견디지 못하고 얼굴색이 다 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 그것 때문에 왜 그렇게 분하여 얼굴색이 바뀌었니?” 라고 짚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가인아, 내 말 잘 들어라. 내가 하는 일에는 항상 뜻이 있다. 나의 뜻은 결코 잘못 된 것이 아니다. 항상 내 뜻은 옳은 것이다. 너는 그것이 내 뜻인지 알고 좋은 것으로 알고 받아들여라.’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을 지도하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여기에 실패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 있었고 그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다른 지도자들이 같이 이스라엘을 지도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하던 그 지도자들이 모세와 아론을 보면서 못마땅했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당신들만 이 나라의 최고 지도자들로 계속 있습니까?’ 라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모세가 ‘우리가 최고 지도자로 있는 것은 우리가 소원한 것도 아니고 우리 마음대로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반역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모두 다 갈라진 땅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일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가룟 유다는 ‘애국자’입니다. 로마의 식민지가 된 조국 이스라엘의 자주 독립을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조국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올 분이라고 믿고 따랐습니다.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것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 일을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거기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제 죽어야한다’ 라고 하신 말씀은 정말로 뜻밖이었습니다. 거기에 유다가 생각했습니다. ‘저것은 아니다, 저것은 예수님께서 잘못 아셨다.’ 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잘못 아신 예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도록, 예수님께서 일어서서 조국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 일하시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파는 배반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위기를 당하시면 틀림없이 일어서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야 가룟 유다는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가룟 유다의 결과에 대해서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해1:18)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뜻이 예수님의 뜻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당초 자기 스스로 왕이 된 반란부터 그러했습니다. 물론 애초에 그 원인은 다윗이 제공했습니다. 자기 몸 하나 스스로 간수하지 못하면서 왕의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붙들고 있는 그것은 다윗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십시오. 그것이 다윗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가 참 잘못 했구나, 혹은 다른 제3자가 보기에 다윗 왕께서 크게 잘못한다고 하더라도 이해 당사자인 아도니야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다윗이 왕 자리를 제때 물려주지 않고 후임을 빨리 정하지 않은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은 아도니야는 자기가 나서야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죽을 뻔했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면 그때라도 생각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니었구나, 나도 제법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이제부터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구나.’ 라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밧세바를 찾아갔습니다.
밧세바가 아도니야에게 ‘네가 화평할 목적으로 왔느냐?’ 라고 물었을 그 때라도 정신을 차리고 아차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이때 정신 차리고 오랫동안 뵙지 못하여 인사드리러 왔다고 넘어갔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그때에도 ’화평한 목적이니이다‘(15절) 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화평이 됩니까? 이런 못된 소리를 하면서 화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무엇을 좀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면 그 대가가 참혹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누구든지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2) 라고 그 말씀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에 정말로 제대로 성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욥입니다. 욥을 두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아주 귀한 말씀을 주시는데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욥을 통해서 제대로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욥은 워낙 의롭고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욥에 대해서 욥은 온전한 사람이었다, 정직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고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아니지만 보시고도 막아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의 모든 것을 휩쓸었습니다. 그 많던 양, 나귀, 낙타 그리고 종들까지 앗아갔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욥의 사랑스런 아들 딸 열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순식간에 다 앗아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지만 제대로 알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눈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느 정도인지 여러분의 눈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았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가지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이뢰러 왔나이다’(욥1:13-17)
욥은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또 이어져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욥1:18-19)
이럴 수 있습니까? 심해도 너무 심합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하나님도 심하셨습니다. 아무리 깊으신 뜻이 있다고 할지라도 너무 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켜주시지 않으시고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 그 일을 듣는 우리의 생각에도 너무 심하시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무엇 하나라도 남겨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 중에서 조금이라도 여러분들이 배우시라고 하나님께서 다시 이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욥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알 뿐만 아니라 받아들였습니다. 욥의 태도에 대해서 성경은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22)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이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이 욥에게 하나님께서 영광에 영광을 더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모든 복도 하나도 빠짐없이 욥에게 더해주셨습니다.
모세가 만난 천사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천사를 만납니다. 만난 천사에게 한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부탁을 들은 천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세 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가난한 어촌의 고깃배를 아무 까닭 없이 바닷물에 가라앉혀버렸습니다. 또 하나는 아무 까닭 없이 멀쩡한 한 청년을 죽여 버렸습니다. 또 하나는 무너져가는 이교도의 성벽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를 본 모세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극악무도한 해적들이 고깃배를 빼앗으러 그 마을로 오고 있었다. 고깃배가 그대로 있었다면 고깃배를 빼앗기 위해 해적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 청년은 겉으로 보면 멀쩡한 청년 같지만 얼마 있지 않아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것을 내가 알았다. 이교도의 성벽, 무너졌으면 좋을 이교도의 성벽을 내가 일으켜 세워준 것은 그 성벽 안에 큰 보물이 들어있고 그 성벽이 무너지면 보물이 드러나고 그러면 그 백성들이 그 보물을 가지고 악한 일을 할 것인지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천사가 모세에게 준 하나님의 가르침이 이사야 5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여러분,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의 주인,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 기독교 신자들은 승리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패배하는 신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혹시 그런 신자라면 깊이 생각해볼 말이 있습니다. ‘무기를 가진다는 것과 전쟁에서 이긴다는 말은 같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