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가득한 구름 (열왕기상 8:1~11)
성전 가득한 구름
열왕기상 8:1~11
세계적인 기독교 학자 한 분이 미국 교회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기독교는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성장했다. 미국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아주 존경받는 일이었다. 이 미국 교회에 문제가 생겼다. 교회가 예수님 대신 그 동안의 성공 그 자체를 예배하기 시작했다.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저주는 바로 예수 결백 장애이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 하나님 없는 교회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미국 교회를 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가 되었고, 한국에서는 미국 교회보다 더 크게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 즉위 4년에 성전건축을 시작했고 7년 만에 성전의 모든 공사가 끝이 났습니다. 성전 건축은 끝났습니다. 외부도 끝났고 내부도 끝났고 내부 장식도 다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그것으로 완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의 완공은 성전에 하나님을 모실 때 이루어집니다.
현재 우리 교회 건물은 우리 교회가 건축한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가 건축한 것을 매입했습니다. 그것도 당초에는 매입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지난 번 예배당을 재건축할 동안만 빌려 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다 잠시 빌려 쓰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매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예배당에 들어온 첫날 예배는 1층 식당 입구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것처럼 교회 상징인 열쇠를 커다랗게 모형으로 만들어서 맨 앞에 모셨습니다. 그 뒤에 예배위원들과 교회 중직자들이 따랐습니다. 식당을 지났습니다. 그 다음에 소예배실을 지났고 소예배실 앞 계단을 통해서 그 위로 올라왔습니다. 로뎀에 들어갔습니다. 로뎀을 지났고 중예배실 사무실을 거쳐서 다시 한 층 더 올라와서 본당 있는 곳으로 다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본당에 들어와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고백적 행사였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이 교회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예수님, 이 교회의 한 가운데 오시옵소서. 주인 자리에, 상석에 오시옵소서. 예수님만이 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완공하고 나라의 모든 지도자들을 예루살렘에 소집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다 모인 가운데 제사장들이 다윗 성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메었습니다. 그리고 새로 건축한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왕 솔로몬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도 없이 많은 양과 소를 하나님께 바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전으로 옮겨진 하나님의 궤는 성전 가장 깊숙한 곳인 지성소 가장 가운데 핵심 자리에 모셨습니다. 성경은 그때의 광경을 10절과 11절에서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을 나올 때 구름이 성전에 가득했다. 가득한 구름 때문에 제대로 서 있기 힘들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심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충만하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실 것은 하나님은 본래 성전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성전 건축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성전에 오셨고, 충만하게 오신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성전건축을 하면서 ‘이 성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정성을 다해서 건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하나님, 제발 이곳에 오시옵소서. 이곳에 오셔서 좌정하시고 이곳에서 우리를 다스려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초대합니다.’ 라고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초청했는데 오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러분들에게 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친정아버지가, 시아버지가 아들 집에 딸집에 오기를 원하는 것처럼 항상 오시기 원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는 이것을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이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오십니다. 여러분들 개인의 대문 앞에, 가정이라는 대문 앞에, 이 나라의 대문 앞에 하나님께서 먼저 오십니다. 문을 열어주기만 하면 들어오시려고 하나님께서 먼저 오셨습니다. 문을 열어주면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더불어서 함께 먹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삶을 함께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여러분들이 오시라고 초청하면 하나님께서는 아주 행복해하시면서 여러분들에게 오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초청하지 않아도 오십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이스라엘 왕으로 내정 받고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일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사울에게 오셨습니다. 사울이 선지자처럼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오신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나라인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통치하셔서 행복한 나라, 행복한 백성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사울에게 오신 것입니다. 사울을 도와주고 사울이 제대로 해서 모든 국민들이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오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그 누구보다도 왕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그 곳에 계신 것을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란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살고, 왕이라면 이 나라를 통치할 때, 백성들을 다스릴 때 자기 혼자 잘났다고 자기 맘대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입니다. 좋아서 오신 그 자체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오신 이유는 그런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신 것,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충만하심에 정말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셨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신 하나님의 영께서 계속 함께 계실 것인지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오래 오래 나한테, 우리 가정에, 이 나라에 계실 것인가?’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오래 계실 것인가? 아니면 떠나실까?’ 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결정하시고 판단하신다고 해서 그냥 마음대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거기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오래 계시도록 하는가 아니면 도저히 더 이상 계시지 못하도록 하는가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시어머니, 시아버님 혹은 친정 부모님께서 아들, 딸집에 오셨습니다. 잠시 얼마 동안 있으려고 오셨는데, 시어른들, 친정 어른들이 오래 계시고 싶은 집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집도 있습니다. 일주일만 있으려고 왔는데 하루도 못 있겠다는 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부모님들을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많은 가정들을 보면서, 확실하게 눈으로 보고 알게 된 것은 부모님을 모시는 분들은 친정 부모님이든 시어른들이든지 간에 모시기만 하면 복을 받습니다. 가정에서 최고의 복이 무엇입니까? 자식들이 잘 됩니다. 모시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잘 모시면 얼마나 큰 복이 되겠습니까?
시어른들 혹은 친정어른들 가운데 오래 계시고 싶지 않지만 가실 때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오래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든지 가실 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시는 것이 좋으면 계속해서 계시기 원하시고, 안 좋으면 떠나십니다.
새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 구름이 가득한 것을 솔로몬에게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도 보게 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에게 왔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여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여, 부디 내가 이 성전 안에 계속 있게 하기를 바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계시면 그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떠나시면 있던 행복도 평화도 날아가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간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가시적인 것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 행사가 있은 뒤에 이스라엘은 점점 더 망해갑니다. 망해가던 이스라엘이 점점 더 깊은 죄에 빠져갈 무렵 어느 날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는 그런 환상이었습니다. 맨 처음 하나님께서는 성전 한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러던 하나님께서 조금씩 조금씩 떠나가십니다. 오늘날 우리 예배당으로 치면 예배당 제일 앞 한가운데에 계시다가 출입문 까지 가시는데 뒷걸음칠 치고 가십니다. 혹시라도 내가 가는데 누가 붙들지 않는지 쳐다보시면서 가시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아무도 하나님을 붙들지 않았습니다. 왕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종이라는 제사장들도 붙들지 않았고 일반 백성들도 아무도 붙들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하나님께서 본래 자리를 떠나시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문지방까지 가신 하나님께서 혹시 누가 붙드는 사람이 없는지 돌아보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붙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또 떠나가십니다. 성전 동쪽 문까지 빠져나가셨습니다. 거기는 지나다니는 이들이 많은데, 틀림없이 누구든지 보고 나를 붙들 것이다. 누구라도 붙들면 나는 들어갈 것이라고 단단히 작정하고 거기서 머뭇 머뭇 계셨지만 왕도 일반 백성들도 드나들었지만 하나님이 거기 서 게신 것을 보지 못합니다. 아무도 ‘하나님, 들어가십시다. 왜 여기 서 계십니까?’ 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지신 하나님께서 성읍 한 가운데로 빠져나가십니다. 쓸쓸하게 가십니다. 시어른이 가시듯이 친정 어른들이 가시듯이 가십니다.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동쪽 산으로 올라가버리고 마셨습니다. 하나님은 점점 더 이스라엘로부터 멀어지셨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기 시작할 무렵에 천사들이 모이는데, 천사들은 본래 밝고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때 모인 천사들은 험상궂은 얼굴의 천사들이었습니다. 천사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심판할지 작전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느 정도까지 이스라엘을 심판할 것인지 그 작전을 짜기 위해서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환상이 실제가 됩니다. 끝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비참하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던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저 나귀나 찾아다니던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오셨습니다. 오셔서 사울을 챙기는데 사울이 지금 이것이 필요하다고 하나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일일이 다 챙겨주셨습니다. 사울로 하여금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라의 위기 때에 사울로 하여금 놀라운 용기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합지졸이었고 다 뿔뿔이 흩어져 하나도 단합되지 못했는데, 그 이슬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일사분란하게 사울을 중심으로 나라를 이루어가게 해주셨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웃나라가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사울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나서 통쾌하게 무찔렀습니다. 큰소리치고 한없이 이스라엘을 무시하던 이웃 나라가 처절하게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도록 사울에게 오신 하나님, 하나님의 영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은 사울이 2년 만에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울을 떠나십니다. 사무엘 상 16장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삼상16:14)
하나님의 영이 떠나신 이후 38년간 사울은 계속해서 왕 노릇하였지만, 38년 내내 악령에 끌려 다니면서 시달렸습니다. 미움, 시기, 질투, 원한, 오해, 죽이고 싶은 마음... 한 번도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 악령에 매여 살다가 마침내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딱한 것은 최고 지도자가, 어른들이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혼자서 당하지 않습니다. 먼저는 사울의 사랑하는 세 아들이 함께 참혹한 축음을 당하고 이스라엘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사울 다음 왕인 다윗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오셨습니다. 사울 뒤를 이어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 때의 일을 성경은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삼상16:13)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사울에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용기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승리도 주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해주셨습니다.
이 다윗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떠날 위기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더 이상 악할 수 없는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정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심판하기 위해서 선지자를 보내서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이제 다윗도 사울처럼 비참하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사울보다 더 비참하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그때 다윗이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엎드립니다. ‘하나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정말로 저는 죽을 사람입니다. 잘못했습니다. 너무 큰 죄를 지었습니다. 너무 잘못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엎드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잠잘 때마다 침대가 다 젖었고 베개가 다 젖었다고 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수많은 나날을 그렇게 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서 하나님은 떠나시지 않으셨습니다. 떠나실 뻔했는데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떠났다가 다시 오신 것이 아니라 아예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은 다윗을 더욱 더 힘 있게 붙들어주셨습니다. 강하고 의로운 손으로 하나님은 붙들어주셨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다윗은 도리어 모든 시대에 있어서 최고의 왕이 되었고, 모든 인물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대단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대단한 축복이기만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단한 축복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이 대단한 만큼 대단한 경고가 함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으면 너희들에게는 평화요 행복이다. 내가 있는 한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떠나면 여러분들에게는 고통과 슬픔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이어질 것이다. 이스라엘아 부디 내가 여러분들을 떠나지 않게 하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오래된 영화 ‘기적’은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수녀 테레사가 세상을 살아갑니다. 수녀란 존재는 한평생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겠고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하나님의 신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겠다고 서원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러던 하나님의 종이 세상을 사랑합니다. 테레사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테레사가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도 테레사를 떠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만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한 사람, 함께 한 모든 것에서 다 떠나십니다.
하나님께서 테레사뿐만 아니라 테레사가 있던 마을도 떠납니다. 마을에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그 아름답던 마을이 폐허가 됩니다. 테레사가 사랑하는 남자마다 불행을 당합니다. 테레사가 그제야 깨닫습니다. 회개하고 수녀원으로 돌아옵니다. 테레사가 온 팔을 벌리고 수녀원 바닥에 엎드립니다. 테레사가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분명하게 죽었던 테레사의 사랑하던 남자가 기적으로 살아납니다. 마을에 비가 내립니다. 폐허였던 마을의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아름다운 마을이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하나님은 결단코 여러분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힘들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모든 노력을 그대로 열매가 맺히도록 여러분들을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떠나십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도 여러분들에게 돌아오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