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과부의 기도 (누가복음 18:1~8)

분당소망교회 2020. 3. 26. 13:54

 

과부의 기도

 

 

누가복음 18:1~8

 

기독교 신자 한 분이 자기 할머니 그리고 자기 아버지 일을 회상했습니다.

오래전 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고통당하신 시간이 짧았고 집에서 가족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무척 감사했습니다. 할머니는 삶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들 돌보는 일에 보내셨고, 자식들과 손주들은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제가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었을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있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마지막 임종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따뜻하게 하시는구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할머니를 위해 기도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를 위한 아버지의 기도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예수님께서 팔로 할머니를 감싸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임종 때 하신 그 말씀에 대해서 아버지는 주님께서 오랫동안 기도한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이 말씀을 분명하게 하셨답니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다.”’

 

기도는 응답받습니다. 반드시 응답받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어떤 기도를 했는지 잊어버립니다. 잘 기억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왜냐하면 내가 이런 기도를 했다.’ 라는 것을 기억하면 그 기도는 진실한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드린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르고 받은 응답과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하나님이 계신다, 나는 그런 기도를 하는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 다음 하나 더, 그것을 알면 기도를 하게 됩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생각하고 또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응답을 받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더 많이 응답받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내가 어떤 기도를 했는지 잊어버리고, 응답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덜 감사하게 되고 덜 기도하게 되고 그만큼 행복은 나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다 자주 기도를 포기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저런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마 가장 큰 이유는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다는 것이며, 기도를 더해도 기도가 응답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허투로 기도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응답 안 해주신다는 생각, 하나님께서 정말로 내 기도를 들으실까?’ 이런 저런 것 때문에 기도하다가 포기합니다. 응답받을 수만 있다면 더 기도를 하겠는데, 헛되이 기도하는 것이 아깝기 때문에 기도하다가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비유입니다.

 

어느 도시에 아주 악한 재판장이 있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과부는 원수에게서 원통한 일을 당했다. 그 과부의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재판장밖에 없는데 그 재판장은 불의한 재판장이었다. 그 재판장은 돈 없는 과부의 원한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다. 힘없고 돈 없고 약한 사람, 낮은 사람은 그 재판장에게는 전혀 관심 밖의 사람이었다. 과부가 여러 차례 그 재판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재판장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부는 재판장이 귀찮아서 못살 정도로 계속해서 찾아갔다. 찾아가서 제발 내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다가 재판장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저 과부를 저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나를 찾아와서 귀찮게 할 것이다. 그러다가는 내가 말라죽겠다. 내가 저 과부에게서 받는 돈도 없고 저 과부로부터 도움 받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차라리 저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편하겠다. 할 수 없다.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되겠다.’ ’

그 비유 후에 예수님께서 저렇게 악한 재판장, 돈만 밝히고 자기 이익만 밝히는 못된 재판장도 저렇게 포기하지 않고 호소하고 또 호소하고 찾아가고 또 찾아가니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저렇게 악한 재판장, 못된 재판장이 그 과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하물며 그렇게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를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는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과부와 재판장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과부는 그 재판장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다. 도리어 귀찮게만 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재판장은 과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너희들과 하나님을 생각해보아라. 너희들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자식들이냐? 하나님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아버지이시냐? 그런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는가? 너희들은 그 하나님의 자식이고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그 아버지인데 왜 기도하다가 낙심하고 포기하고 마느냐? 여러분들이 기도하면 여러분들의 아버지, 선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시겠는가? 오래 애타게 하시겠느냐?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하십니다. 포기하지 말라, 기도하다가 중단하지 말라,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악한 재판장도 호소를 들어주는데 선하신 하나님께서 오직 잘 들어주시겠는가? 끝까지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바로 당신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도하면 내가 들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낙심하게 하지 않겠다. 여러분이 절대로 억울한 가슴을 안고 끝까지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나를 찾아와서 나에게 호소하라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115절부터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달라 저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는데 내가 먹일 것이 없어서 자네에게 부탁한다.’ 라고 하면 그가 집안에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하겠느냐’(11:7) 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11:8)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밤중에 가족들을 깨우면서까지 일어나서 줄 수가 없다고 할지라도 찾아와서 부탁하는 친구가 그렇게 간절하고 절박하게 제발 도와 달라, 저 멀리서 온 친구가 한참 동안 못 먹은 것 같은데 지금 못 먹으면 큰일 날 것 같으니 꼭 도와달라고 하면 그 친구가 설마 안 도와주겠는가? 도와준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9-10) 라고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누가 주겠습니까? 누가 찾아내도록 하겠습니까? 누가 문을 열어주겠습니까? 하나님 당신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여러분들이 찾도록 해주고, 받게 해주고 내가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중에 구하라는 말씀은 원어인 헬라어로는 아이테오라는 말을 쓰셨는데, 이 말씀은, 무엇을 부탁할 때 상대방이 내 부탁에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마음을 할까? 내가 이런 부탁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문제가 생길까?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까?’ 이런 것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상대방이 비록 불쾌하게 여길지라도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두드리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크루오라는 용어를 쓰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내가 이 부탁을 할 때 저 사람 그리고 내가 지금 부탁하는 내용 그 어떤 것으로 보아도 잘 안 들어줄 것 같다. 그런 기대가 없는 가운데서도, 내가 부탁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아도 그래도 계속해서 두드린다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밤새 두드려도 안 열어줄 것 같지만 계속해서 두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부탁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어떻게 그런 것을 부탁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일지라도 계속해서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이런 심정으로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너무 쉽게 포기한다, 너무 하나님을 함부로 생각하고 내 생각대로 그냥 포기하고 만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고 생각하고 말아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뜻은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하나님,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사랑이 가득하신 하나님, 자비가 가득하신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간절하게 기도하면 안 들어주시겠는가? 아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결론은 따라서 여러분들은 기도할 일이 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 좌절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면 절대로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가운데 그러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원한을 풀어주시고 힘들고 어려운 일도 풀어주실 텐데, 문제는 기도할 때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너무 믿음이 없습니다. 그냥 입만 기도하고 마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얼거리기만 합니다.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다가 중간에서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기도에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8:8)..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몰라서 완전한 실패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인생 살다가 전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욕심입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실패로 넘어가면 되지 않습니다. 조금 실패하고 얼른 복기復棋해 봐야 합니다. ‘내가 왜 실패를 했는가?’ 쳐다보면 실패한 까닭이 있습니다. 돌이켜야하고 완전한 실패에 빠지면 안 되는데 사울이 그만 완전한 실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라에 외적이 침입합니다. 강한 나라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능력으로서는 전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왕이 지금까지 하나님께 너무 불순종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아가서 말씀드릴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너무 겁이 나고 두렵고 답답해서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가면서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하나님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어쩌면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실지 몰라, 아마 안 들어주실 것이다. 그래도 한 번 가보기나 하자.’ 라고 생각하고 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울이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듣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접어버리고 무당을 찾아갑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대패를 하고 사울은 죽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세 아들도 비참하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하나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사울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더라도 계속해서 기도했더라면 하나님께서 끝까지 응답 안하셨을까?’ 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과부처럼 응답 하지 않으셔도 좋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기도했다면 응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더구나 사울처럼 불순종하다가, 하나님을 떠났다가 돌아온 자식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본래부터 순종하던 자식, 떠나지 않았던 자식보다 더 좋아하신다고 말할 정도로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15장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에게 돌아가시면 자기에게 줄 상속분을 달라고 하여 받아서 나가서 다 날리고 쫄쫄 굶습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나를 아들 말고 품꾼으로 받아달라고 하면 지금까지 우리 아버지를 보건대 절대로 이것만큼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아들은 멀리 집 근처에 왔지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일을 예수님은 이런 뉘앙스로 말씀하십니다. ‘그 아들의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 멀리 보지 못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못 알아보겠는가? 저 멀리 오는 아들을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보고 그 아들을 맞으러 나오는데, 신을 신을 겨를도 없이 쫓아 나와서 돼지 기르느라 냄새가 나는 그 아들을 안고 뽀뽀를 하고 손을 잡고 당신 뺨에 비벼댔다. 그리고는 새 옷을 입히고 그 아들 손에 가락지를 끼어주고 집에 데리고 와서 잔치를 벌였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못된 짓을 하고 떠났고 불순종하던 아들이 돌아오면 더 좋아하시고 그렇게 해 주실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울이 계속해서 부르고 찾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면 반드시 응답하셨을 것이라는 의미가 그 안에 포함되어있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온 집안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333절에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응답 이상의 응답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어떤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일을 행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것을 만들고 성취하는 여호와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기도하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응답해주시기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반드시 여러분의 응답을 성취하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만약 응답할 것이 없다면, 가지고 계시는 것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고, 여러분들이 비킬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아예 이 지구상에서 없애버리셔서 여러분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못할 것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는 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고 어떤 예수님인가?’ 이것을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세하게 보이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실 때 제자들이 간질병 걸린 아이를 낫게 하려고 열심히 기도하였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이 아버지가 예수님을 만나서 간질병 걸린 우리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갔는데 병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치료해주었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왜 우리는 치료하지 못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 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제자들에게 간질병 걸린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제자들이 기도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안 할 리가 없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기도가 아닐까요? 믿음이 없는 기도를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기도는 권세가 없고 힘이 없고 능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여러분은 내가 그동안 하는 것을 보고 모양만 흉내 내어서 기도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그 기도에 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는 기도, 기도 같지 않는 기도를 했기 때문에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

나의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에 어떤 형태로든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다.’ 이 확신이 있으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떤 경우라도 기도할 것입니다. 천 년이 걸려도 만 년이 걸려도 기도할 것입니다. 내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시간을 놓치셔서 내가 곤욕을 치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고, 최고의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확신만 있으면 기도하게 됩니다.

다시 기억 하십시오. 여러분이 기도 드리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고, 여러분이 기도할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신가? 여러분들을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 그렇게 죽으라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못하실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을 알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