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분당소망교회 2012. 8. 21. 11:3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창세기 25:19-26

 

우리 하나님은 가끔 사람들이 원하는 빵 대신에 벽돌을 던져주신다고 합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빵은 주시지 않고 아무 쓸모없는 벽돌을 주신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벽돌이 보기 싫어서 걷어찹니다. 그러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기막힌 집을 짓고,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돈으로 자기도 누리고 다른 사람도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합니다.

 

인생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빵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 먹지 못할 돌멩이를 주시는지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복을 내려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 좋은 것을 주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똑 같은 것을 주십니다. 그 똑같은 것으로 어떤 사람은 큰 복을 만들어내고, 어떤 사람은 자기 발가락을 부러뜨리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것을 주셨는데 결과를 각각 자기가 그렇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우리 인생살이의 결과는 환경의 산물이 아닙니다. 자아의 산물이고 자아 인격의 산물입니다. 내가 내 인생살이의 결과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성경에서 자주 하나님 당신을 가리켜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 사람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 아브라함이 바로 내 아들이다, 저 이삭이 내 아들이다, 야곱이 내 아들이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을 가만히 보면 첫 번째 사람 아브라함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참 믿음이 좋습니다. 가라고 하시면 갔고, 바치라 하시면 바쳤고, 싸우라고 하시면 싸웠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갖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형편없을 정도였습니다. 형에게 못된 짓을 했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러다 풍파를 만나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고 나중에도 좋은 사람이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더 좋은 것은 처음에는 덜한 사람이었지만 나중에 점점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야곱은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 죽어라 매달리는 예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요셉을 잃고 또 다른 라헬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을 잃어버려야 하는 위기의 때 ‘내가 아들을 잃으면 잃겠습니다’ 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성숙해나가고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남았는데 이삭이라고 하면 무엇을 기억하십니까? 맨 처음 이삭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셨던 일입니다. 수십 년을 기다리게 하다가 백세에 가서야 주신 아들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순종하고 바칩니다. 참 귀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삭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이 자기가 생각할 때 죽을 때가 다 되었을 때의 일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힘을 다해서 아들을 축복하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는 장자만이 자기 아들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때였습니다. 이삭이 장자인 에서에게 축복할 테니 가서 좋은 음식을 만들어오너라, 이 음식을 먹고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때 야곱이 끼어듭니다. 둘째 아들인 자기가 장자인 에서인 척 꾸미고 자기 아버지를 속여서 좋은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난 후 축복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결국 그 아들 둘이 분란을 일으켰고, 작은 아들 야곱을 20년 이상 집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그 아버지 이삭이 음식을 너무 탐했다는 것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아는 우리는 이삭에게 유쾌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삭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진면모는 그것이 아닙니다. 따로 있습니다. 이삭이 결혼할 무렵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아버지가 며느리를 찾기 위해 종을 타국에 보내 오랜 세월 동안 찾아오라고 보냈습니다. 종이 며느릿감을 구해 돌아올 무렵이 되었습니다. 이때 이삭의 심정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어떤 신부가 올 지 모릅니다. 오면 결혼해야합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는 더 했습니다. 오면 결혼해야하는데 참으로 궁금했을 것입니다. 나이 마흔이 되어 장가를 가니 기대도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흥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이삭이 아내 되는 사람을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혼자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혼자 있을 때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참된 모습니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 하는 행동은 진면목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을 때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그 사람의 진면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창24:61-63).. 바로 이 모습입니다. 아주 중요한 모습입니다. 여기서 들에 나간 이유가 중요합니다. 거의 확실한 것은 이삭이 기도하러 나갔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다 눈을 들어보니 아내 될 사람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음식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삭의 그런 면모가 다시 보입니다. 이삭이 40세에 리브가를 맞아 아내를 삼았는데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그 아내가 임신하여 쌍둥이 야곱과 그의 형 에서를 낳게 되었습니다. 아주 짧은 이야기입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기도란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선택도 되지만 그러나 필수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의 아내 리브가가 불임이라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의학적으로 분석하여 남편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 혹은 의학적으로 도우면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어떠하든지 기독교 신자들이 꼭 알아야할 것은 인간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출산도 하나님께 달려있고 어떤 아이가 태어날 것인가도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출산 이후 이아이가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언제 죽을 것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잘 기억해야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달려있으니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할까요? 아주 중요합니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우리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대답합니다. 전부 다 하나님께 달려있지만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기도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에 기도해야합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해도 우리 기도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뜻대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도 있고 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하나님께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기도하라고 하시는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하나님께서 내 뜻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소원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뜻은 따로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해야할까요?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뜻이 달라질까요?

 

먼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 항상 당신의 뜻은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그 뜻은 우리의 바라는 것과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습니다. 같든 다르든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기도는, 우리 소원은, 우리 간구는 하나님 앞에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독특한 도그마입니다.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어떻게 말하든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가지고 있고 당신 뜻대로 이끌어간다고 말씀하시면서 한편으로 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라는 말씀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계획을 바꾸셨다는 말입니다. 참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할 때 잘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가지고 계시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본래 뜻대로 하시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항상 당신의 뜻대로 하시는 것 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단단하게 결심하셨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예가 ‘히스기야’의 예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보시고 이제는 데리고 가야하겠다고 생각하시고 이사야를 보내어 ‘너는 이제 너희 집에 유언하라 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히스기야는 놀랍니다. 꿈 꾼 것이 아닙니다. 비몽사몽간에 들은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말한 상대방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증인으로 이 말을 들은 사람이 더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히스기야는 나라가 큰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삼키고 남 유다까지 넘보고 있는 상황이었고 자기가 죽고 난 후 이 나라를 이끌어갈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너는 죽는다,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록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20:2-3) 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너는 죽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하신지 얼마가 채 안 되어 당신의 뜻, 계획을 변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히스기야가 통곡을 했지요, 그러나 이사야가 얼마 멀리 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래 통곡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말을 전한 이사야를 하나님께서 급하게 불러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당신 종에게 하신 명령을 취소하십니다. 이사야에게 빨리 히스기야에게 돌아가서 말하라고 지시하십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여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왕하20:5-6)

 

하나님께서 히스기야가 죽을 것이라고 이미 뜻을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기도하자 기도를 들으시고 생명을 15년 연장해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 위태위태한 나라를 앗시리아의 손에서 건지시고 보호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도의 응답뿐만 아니라 거기다 더 놀라운 선물을 받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당신의 부끄러움도 모르십니다. 죽인다고 하셨다가 금방 취소하시고 살린다고 하시니 부끄러울 수도 있으셨을 수도 있을텐데 하나님은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레미야 8장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고자 작정하셨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많은 침략을 받았고 나라의 지도자들은 부패해서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이 나라는 망하고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의 절망상태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접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렘8:18-22) 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고 절망 상태에 있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하나님 구원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동안 하나님 말씀에 너무도 순종하지 않았고 지은 죄도 너무 많아 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렘 8:19) 라는 말씀으로 보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을 찾아봐야 소용없으니 다른 것을 찾겠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못난 사람들아 내가 버렸다고 말한 것을 두고 정말이라고 생각했는가? 너희들이 망한다고 말한 내 말을 진실로 믿었는가? 돌아오라는 말인데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렇게 바보같이 포기하고 주저앉고 넘어지고 무너지는가? 너희들이 내게 오면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겠는가? 만신창이가 된 너희들을 치료해주지 않겠는가?’ 또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은 노릇을 하는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돌아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받아주지 않겠는가?’ 아무리 죄를 짓고 안 들어주실 것 같아도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의 출산, 병 나음, 죽는 것 전부 다 하나님께 걸려있지만 우리 기도는 이것까지도 뒤집어엎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뜻을 바꿀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 조심해야할 것은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곧 응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응답을 받습니다. 어떤 형태이든지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이삭이 자식을 가지지 못하여 하나님께 얼마 동안 기도한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을 보면 ‘이삭이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기도하자 금방 들어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26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만입니까? 이십 년만입니다.

 

혹 이삭이 결혼하자마자 자식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 기도하다 그만둘 수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리브가가 임신 후 배가 너무 아팠습니다. 이때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가 무엇을 했습니까?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22절) 리브가와 그의 남편이 기도했습니다. 이들은 자식을 위해서 기도한 것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기도했고, 잠시 혹은 특별히 어떤 때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항상 기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내를 기다리던 때부터 기도했습니다. 어쩌면 훨씬 그 이전 결혼이라는 일이 있기 전부터 기도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데 한국사람 특유의 성격처럼 빨리 달라고, 즉시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삼기’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기도하고 두 번째는 기대하면서 세 번째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봅니다. 이렇게 기도하자 이삭이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가장 큰 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참 중요한 것을 이 시간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한 것을 다 응답받았다고 하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기도를 다 응답받았다고 정말로 복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응답받은 것입니다. 복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이 다 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가슴앓이하고 그것 때문에 죽을 것만 같은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무엇일까요?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은 기도하는 그자체입니다. 응답을 받든지 받지 못했든지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그 자체가 복이고, 기도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응답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세 번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부도 명예도 다 버렸고 건강까지 바쳤습니다. 죽을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그가 다른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자 건강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가 이미 너에게 준 은혜가 족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달라고 한 것을 안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놀라운 것은,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이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바울은 도리어 크게 기뻐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 응답하시지 않을 때는 틀림없이 그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찾아냈습니다. 자신의 약한 곳을 위해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심에 대한 까닭을 ‘약한 그 곳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려 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한 두 번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도 하고 권세를 받아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받았음에도 권세를 받았는지, 능력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한 번 받고 난 후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소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 자리에 계신 우리 귀한 성도들, 특히 젊은이들이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시고 능력을 주셨을 때 잠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오래 받아 소유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지나쳐 지나가고 맙니다. 기회를 많이 놓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내 약한 것을 고쳐주시지 않는 것에는 하나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가만히 보니 그곳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계속해서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응답하지 않으셨다는 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응답을 받든지 받지 않든지 기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떤 기도도 좋습니다. 도움 기도도 좋습니다. 감사기도도 좋고 간구기도도 좋고 회개기도도 좋습니다. 때로 하나님께 따지기도 하십시오. 진짜 신앙인들은 그렇습니다. 무조건 ‘예, 예’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회에서도 ‘예, 예’ 하는 사람은 믿지 못합니다. 너무 좋다고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꼭 말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이렇게 하십니까?’ 라고 따질 줄도 알아야합니다. 때로는 억지도 부릴 줄 알아야합니다. 도무지 이것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고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것 같은 기도도 필요합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할 최고의 신앙인인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이 못된 짓을 했습니다. 아이를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못된 짓을 해서 아이를 가졌으니 그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그렇게 신앙이 좋고 하나님을 잘 아는 다윗이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알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잘못하였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그 기도를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일주일간이나 철야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신하들이 정말로 걱정할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지만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밧세바와 처음으로 낳은 아들은 죽었습니다. 그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이후를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삼하12:24-25)’라고 말씀하십니다. 살려달라는 기도에는 응답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응답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꼭 기도하십시오. 말이 되는 기도도 물론 하시고 말이 되지 않는 기도도 하십시오. 도무지 말이 안 되고 이런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도 기도하십시오. 기도에는 길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길이 열립니다. 없던 길이 생기게 됩니다. 막힌 길이 뚫리게 되고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이 말씀에 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