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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인간에 불과(하박국 3:16-19)

분당소망교회 2013. 1. 3. 11:40

한낱 인간에 불과


하박국3:16~19

지금의 청계천은 맑은 물이 흐르고 많은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지만 한참동안 시멘트로 덮여있었고 그 위에는 고가도로가 있어서 아주 삭막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지금처럼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청계천 북쪽 일대를 북촌이라고 불렀고, 남쪽을 남촌이라고 불렀습니다. 북촌은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고, 남산 기슭을 중심으로 하는 남촌은 양반의 자손이기는 하지만 몰락한 선비들 그리고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불우한 선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이 남촌에 있는 선비들을 가리켜서 사람들은 ‘남산골샌님’ 혹은 ‘남산골딸깍발이’ 라고 놀렸습니다. 돈이 없어서 나막신이나 혹은 짚신 같은 신발을 신고 다녔는데 그 신발에서 소리가 났기 때문입니다. 이 남산골샌님 이야기를 ‘딸각발이’ 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쓴 이희승 선생은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설상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만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 라는 글을 썼습니다. 뗄 나무를 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선비 체면에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추위를 막아줄 집도 변변치 않고 불을 뗄 땔감도 없고 이부자리마저 시원치 않았던 남산 샌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남산골샌님들에게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큰소리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은 아무리 춥고 추위가 맹위를 떨친다고 하더라도 내년에 봄은 틀림없이 다시 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선지자 하박국에게 내가 바벨론을 들어 범죄한 유다를 치겠다, 그것도 대강 치는 것이 아니라 무섭게 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계시를 받은 하박국은 아직 바벨론의 공격적인 침공이 시작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6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또 군대 가기 전 대학 다닐 때에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대학 다닐 때에는 제시간에 글을 쓰지 못한다고 선배들에게 맞았고 또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맞았습니다. 군대 가서는 그 당시 최전방에는 대학 다니는 학생들이 별로 없다보니 대학 다니다 왔다는 이유로 참 많이 맞았습니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것은 맞을 때보다 맞기 전입니다. 그때가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차례대로 맞는데 ‘퍽퍽’ 하고 맞는 소리가 나면 내 순서가 언제 오는가 생각하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막상 맞으면 그럭저럭 맞을 만합니다. 맞기 전이 많이 고통스럽다는 것이지요.

하박국이 그러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유다는 당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이스라엘, 유다, 내 나라 내 민족, 내 형제들이 혹독하게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나니 너무도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래서 ‘창자가 떨렸다, 입술이 떨렸다,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라고 말합니다.
하박국의 이 모습이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하박국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종입니까? 그리고 유다가 하나님에게 당하는 것은 사실 하박국이 하나님께 먼저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 저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좀 보셔야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당한다, 터진다, 깨진다, 망한다고 생각하니 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강한 인간, 연약한 인간, 담대한 인간 똑같이 모든 인간들에게 있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에게 그러했습니다. 사울왕은 사무엘이 세운 왕입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서 너에게 기름 부으라고 말씀하셨으니 왕 노릇 잘하라고 말하면서 왕으로 세웠고 자기가 키운 사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세우고 키운 사울왕은 아무리 보아도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 나는 이제 사울을 버렸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사무엘의 귀에 들렸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막상 그런 말씀을 듣고 나니 너무도 사무엘의 가슴이 아팠고 슬펐습니다. 이로 인해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서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했는데 너는 언제까지 그를 위해서 슬퍼할 것이냐?’ 라고 책망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세운 왕. 신앙적으로 보면 자기 자식과 같은 사울이 왕 자리에서 쫓겨난다고 생각하니 자기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해주기만 하는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위대한 것도 소용없습니다. 인간은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칭찬을 받았습니까? 창세기 6장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의인이었던 노아가 포도주를 많이 마셨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의인이면 무슨 소용이 있고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많이 마시면 취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온몸에 하나도 걸치지 않고 벌거벗을 정도로 마셨습니다. 그때 한 아들이 와서 다 벗고 추한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에 대해서 밖에 나가서 놀릴 정도였습니다. 도리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란 그런 한계가 있고 약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니다.

세례 요한을 생각합니다. 그 누구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당당한 군인들보고도 큰소리 쳤고, 세리들보고도, 정치가들보고도 ‘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자기에게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게 된 세례 요한은 조급하고 초조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불러 예수님에게 가서 ‘당신이 만약 우리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하겠습니까?’ 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만약 당신이 메시야라면 오로지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사람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만 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 죽게 된 나를 왜 그냥 내버려두십니까?’ 라는 답답함이 들어 있습니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이 인간의 연약한 모습, 한계진 모습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예수님도 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당신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아시고 제자 열한 명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많은 제자들 중에서 열 한명을 데리고 가셨고 그 중에서 적어도 이 세 제자만큼은 나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라고 확신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님이면서도 이 땅에 내려오신 인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런 연약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도 안다’ 하나님도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부탁을 들은 제자들은 처음부터 잤습니다. 성경을 보면 기도할 생각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번 와서 보니 자고 있었고, 두 번째 와서 보아도 또 자고 세 번째 와서 보니 또 자고 있었습니다. 나중엔 예수님께서 아예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은 떨렸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박국은 이러다간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할 것 같으므로 하나님께 이스라엘에게 손을 좀 봐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렸습니다. 조금 정도가 아니라 창자가 흔들릴 정도였고 입술이 덜덜 떨릴 정도였습니다. 뼈가 썩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인간인 이상 피할 수 없는 한계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다 있었습니다. 우선은 여러분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아시고, 또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사회적으로 기업적으로 정치적으로 대단한 사람 모두 다 마찬가지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인간 이해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한계 있는 사람이라고, 약점 있는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다 약점에 눌려서 살아가고, 한계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한계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약점 때문에 초라하고 누추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계를 발판삼아서 위대함에 이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좀 가난하고 사람은 좀 넉넉한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전부 다 초라하고 누추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함에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넉넉하고 제법 여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보다 때로는 거지보다 더 누추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이 오면 어떤 이는 날개가 더 강해지고 어떤 이는 지팡이를 짚고 산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 중요한 말입니다. 바람이 세게 불면 센 바람을 이기기 위해서 더 힘 있게 펄럭이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센 바람이 불면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지팡이를 짚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자들도 인간인지라 나름대로 어떤 사람은 이런 한계, 어떤 사람은 저런 약점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 신자라면 무언가는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거룩함입니다.

하박국처럼 국가적인 위기를 당할 수도 있고, 가정적인 위기, 경제적인 위기, 자녀들의 위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진정한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이런 경우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 있습니다. 17절과 18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 이상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하나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한계진 인간으로서, 약점을 가진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나 여건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지 참된 기독교 신자로서 가장 멋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분석해봅니다.

하나는 참된 기독교 신자라면 요행을 바라지 않습니다. 간혹 초신자들은 그럴 수 있겠지만 참된 신자라면 요행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만 특별한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매 맞는 이야기를 했으니 매를 예로 든다면 단체로 매를 맞는데 나만 열외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서 자대로 배치된 곳은 전방 중에서도 최전방이라 정말로 많이 맞았습니다. 이등병 때 자대에 배치되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방의 병사들은 제대할 때가 되어도 병장이 거의 없었습니다. 거의 상병으로 제대했습니다. 제가 이등병이었을 때 제 대학 후배가 바로 제대를 앞둔 상병이었습니다. 그 후배는 최고 고참이었고 저는 방금 들어간 이등병 졸병이었는데도 다른 사병들 앞에서 저를 ‘김 이병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군대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줄을 서서 매를 맞으려고 준비하고 있으면 ‘김 이병님 일어나십시오.’ 라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때 다른 병사들은 꼼작도 못하고 매를 맞았는데, 밖에 있는 저는 더 불안했습니다. 그리고 또 ‘양 상병’이라는 사람이 저를 좋아해서 이 사람에게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체로 맞을 때 맞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제대하고 나니 그때까지 그 사람들한테 미움을 받던 사람들의 미움이 누구한테 가겠습니까? 다 저한테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병사들보다 훨씬 더 많이 맞았습니다. 차라리 옛날에 같이 맞을 때 맞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참된 독교 신자들은 요행을 바라지 않습니다. 국가적 위기, 사회적 위기가 오면 같이 당합니다. 이것을 기독교 신자들은 알아야합니다.

두 번째는 현재 일어난 일을 인정해야합니다. 미국 재정 위기를 재정 절벽이라고 말합니다. 한국도 나라 빚이 워낙 많아 재정절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행히도 한국은행 총재의 더 이상 큰 위기는 없을 것이라는 말에 위로를 받지만 그럼에도 당분간 위기가 지속될 것이라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사업하시는 분들, 회사 다니시는 분들은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지금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기독교인들에게도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역사속의 하나님이 과거에 어떻게 일하셨는지 기억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나는 아브라함의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과거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이고 미래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구해주셨다, 열 가지 재앙으로 이집트 사람들을 치셨다, 홍해를 건너가게 해주셨고 사람들에게 만나를 주셨고 메추라기를 주셨다, 더운 날 길을 갈 때에 구름 기둥을 보내셔서 햇빛을 피하게 해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보호하셨고 우리 길을 인도해주셨다, 그 하나님은 과거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지금 내 하나님이고 앞으로 내 아들딸들을 인도하실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네 번째, 참된 기독교 신자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야기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실적인 하나님으로,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고 나는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참된 기독교 신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이시다, 최악의 것도 최상의 것, 최고의 것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나는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에서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12: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을 저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저주받을 것이라고 믿습니까? 만약 믿지 못하신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할 만큼 사셨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만약 여러분을 축복하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바르게 신앙생활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대강 믿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신자들은 당당합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이긴다는 자신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나에게는 안 돼!’ 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는 이긴다고 큰 소리 치고 있습니까? 이런 믿음을 여러분의 아들에게 주었습니까? 여러분의 딸에게 주었습니까? ‘너는 이긴다. 그 누구도 너에게는 이길 수 없다.’ 라는 믿음을 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진정한 기독교 신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이런 당당함이, 이런 자신감이 있는 신자에게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저절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노래하게 됩니다. 속으로만 아니라 입 밖으로 소리 내어서 노래하게 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됩니다. 19절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얼마나 좋습니까? 사슴이 얼마나 힘차게 뛰어갑니까? 또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노래를 할 수 있는 사람, 이런 당당함이 있는 사람, 이런 큰소리를 칠 수 사람이 참된 기독교 신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런 신자가 되어서 당당하고 자신감 있고 큰소리 치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노래를 할 수 있기를 소원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