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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2) - 룻기 2:1-13

분당소망교회 2013. 9. 21. 10:38

 

룻기(2)

룻기 2:1-13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떠나서 모압으로 갔던 나오미, 그러나 남편과 두 아들은 다 잃어버리고 오히려 죽은 모습이 되어서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며느리 룻도 함께 동행했습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10여년만입니다. 지금까지 나오미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모압 땅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적인 문제가 당장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것이 되는 때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장중에 들어갔다고 곧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현실적으로 가시적인 그 무엇으로 나에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되려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알아야합니다.

 

먹을 것이 없으므로 먹을 것을 구해야 했습니다. 늙은 시어머니가 나갈 수는 없고 젊은 며느리 룻이 먹을 것을 구하러 나섰습니다. 이삭줍기를 합니다. 다행인 것은 마침 나오미가 이스라엘에 도착한 때가 추수 때였습니다. 더욱이 감사한 것은 이삭줍기는 품위를 지킬 수 있습니다. 구걸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약 이삭줍기를 할 수 없었다면 이 가족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요? 단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최악의 길입니다. 젊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 그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당신이 역사하실 그 하나님의 때까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너무나 힘들 때는 피할 길도 주시고 피할 그늘도 주십니다. 뜨거운 길을 가지만 중간에 그늘을 주셔서 잠시라도 쉬게 하십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자상하십니다.

 

그러나 이삭줍기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 허락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우연하게도 룻이 이삭줍기 나간 곳이 시댁의 친족 보아스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연하게라고 말씀하십니다. 룻이 우연하게 친족의 밭에 가서 이삭줍기하게 된 것이 룻에게는 우연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고 하나님의 섭리였고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것입니다.

 

옛날에 요셉이 죽을 고생을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많은 고생, 가혹한 고통과 고난이 다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형들에 의해서 참으로 고통스러운 노예로 팔린 것, 이것은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가슴의 고통이 있습니다. 형님들이 저럴 수 있는가? 보디발의 집에서 잘해서 살만했는데 그만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단호하게 뿌리쳐서 유혹을 이겨내었지만 누명을 덮어쓰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요셉은 감옥에 갑니다. 이것도 전부 다 하나님의 연출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그 감옥이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었던 고위관리들을 만나게 됩니다. 꿈을 해석 받은 술 관원장이, 자기가 나가면 요셉의 억울한 일을 다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정도 고위 관리 같으면 그런 문제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단히 약속했던 술 맡은 관원장은 감옥을 나가서 2년 동안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성경은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연출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이집트 총리로 만드셔야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모든 고난 고통을 다 연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룻의 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하게도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주시는 말씀이 4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라는 말씀입니다. 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보아스가 어떻게 추수하고 있는지 밭에 한 번 나가보아야하겠다고 생각하고 나갔더니 마침 그때 룻이 이삭줍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인생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필연밖에 없고 하나님의 섭리밖에 없습니다. 쓸데없이 원망하지 마십시오. 누구 탓하지 마십시오. 세상도 사람도 탓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고 생각하십시오. 성경의 모든 곳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혹시 현재 삶이 여러분 마음에 안 든다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고통스럽기도 하고 서러움을 당하기도 하고 정말로 가슴 아픈 일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얼른 아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우연은 없습니다.

 

밭에 도착한 보아스가 일꾼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보아스가 나눈 인사에 눈길이 갑니다.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니 일꾼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인사를 자세하게 보면 그냥 인사가 아니라 무언가 남다릅니다. 주인도 그냥 하는 인사가 아니고 일꾼들도 그냥 하는 인사가 아닙니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마음을 다해서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일꾼들은 보아스로 말미암아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그런 주인의 위치에 서면 일꾼들을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나 아니면 저 사람과 저 사람의 식솔들이 어떻게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나는 저 사람에게 대단한 일을 해준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회사 직원들에게 혹은 나에게 주문을 받아가는 사람들에게, 하청업자들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꾼들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요즘 많이 말이 되고 있는 갑을관계에서 보아스는 갑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존중해주었습니다. 주인과 일꾼들 주종 간에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것을 이 인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보아스의 인격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이런 인격을 소유하시는 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제일 사랑받는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왔던 백부장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면서 제자들과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치하한 까닭은 그 백부장이 자기의 중풍 병든 하인을 지극히 아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찾아온 것도 아니고, 자기 가족들을 위해서 찾아온 것도 아니고 하인을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이런 모습은 쉽지 않습니다. 로마인이 유대인인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 로마인 고위관리가 유대인 젊은 랍비를 찾아와서 부탁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백부장을 보고 예수님이 깜짝 놀라십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그래서 백부장이 얼마나 큰 복을 받습니까?

복 받는 사람은 항상 복 받을 사람의 모습을 가집니다. 우리는 얼른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런저런 복을 받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받을만한 이유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무언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에게도 사랑받고 하나님에게도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이러한 보아스의 인격은 우리는 하인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향해서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하인들이 대답합니다,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이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7) 여기서 집이란 땡볕을 피할 수 있고 잠시 쉴 수 있는 그늘집을 말합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하인들은 주인의 허락을 받기도 전에 이삭줍기를 부탁한 룻의 부탁을 허락했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인은 당연히 허락하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꾼을 통해서도 보아스의 인격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속의 인격은 바깥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속에 있는 것으로 삶을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룻도 그러했습니다. 보아스가 사환에게 이는 누구의 소녀냐’(5)‘ 하고 물었습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물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삭줍기 하는 사람들이야 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삭줍기 하던 다른 사람, 혹은 그때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들에 비해서 룻의 모습은 무언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태도 다르고 표정도 다르고 행동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태, 행동 다 표시가 납니다. 부하직원들을 많이 거느리고 오래 거느려 본 사람들은 부하직원들의 뒤통수만 보아도 저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고 말합니다. 보아스에게 그것이 보였던 것입니다. 무언가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이삭줍기를 허락한 하인들도 말합니다,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이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7)’ 룻에게 그것이 있었습니다. 속에 있는 인품 인격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나중에 보아스가 룻에게 말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11) 이것으로 보아 보아스는 이미 룻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룻을 직접 만나보니 과연 소문이 지나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

보아스가 룻을 불러서 말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아버지가 딸에게 이야기하듯 다정합니다.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 지니라(8)’ 못된 사람들도 있고 멀리 가면 덥고 힘들고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상당한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감동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랑을 베푸는 보아스가 룻에게 하는 것을 보면 사실 그런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됩니다. 사랑을 베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무언가 감동되는 사람이 있고 특별하게 무언가 해주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다시 룻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룻은 고향땅 모압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젊은이를 만나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늙은 시어머니를 홀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가진 것 하나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는데 나라도 시어머니 곁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어머니를 선택했습니다. 모압의 신과 이스라엘의 신 가운데 완전한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모압의 신을 완전히 버리는 선택을 할 것인가? 시댁의 신인 이스라엘의 신을 완전히 선택할 것인지 생각해야했습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상당히 무서운 보복까지도 생각되었지만 두려운 대가를 각오하고 룻은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을 선택했습니다. 이 선택은 희생이 없이는, 헌신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자기 포기가 없으면 되지 않습니다. 생명을 각오한 결단 없이는 이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룻의 선택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최고의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룻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시어어니를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룻에게 어떤 사랑을 주실지 궁금했는데 우선 보아스의 각별한 사랑,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더 예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룻에게 주시는 상이 이것으로 그치겠는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서 룻이 시어머니에게 그날 일을 말하면서 그 은혜를 베푼 사람이 보아스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보아스를 축복하고 치하합니다. 그때 나오미의 그 말을 보면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0)

여기서 죽은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죽은 나오미 남편을 말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과거에 자기 남편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보아스를 과거에도 은혜를 베푼 사람이고 지금도 은혜를 베푼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는 죽은 자가 남편이 죽은 나오미의 집을 가리킨다면 살아있는 자는 나오미 집 이외 다른 가난한 사람 집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나오미의 집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늘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보아스는 과거에도 은혜를 베풀고 지금도 은혜를 베푸는 사람, 불쌍한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궁금증을 가집니다,‘이런 보아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을 내리실까?’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갈라디아서에서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6)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 받을 자에게 반드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매달리고 애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애걸복걸할 필요가 없이 은혜 받을만한 사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은혜를 주십니다. 이런 사람으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하는 것은 좋지만 나로 하여금 예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나 때문에 행복하시게 되는 내가 되게 해주십시오.’ 라는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꼭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기만 하면 복을 주고 싶어서 안달하신 분이시고 복을 주시지 못해서 병이 나신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그런 삶을 사는 여러분들에게 복을 아끼겠습니까? 절대로 아끼시지 않습니다.

 

이때 나오미에게 번뜩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혹시 저 보아스가 우리 집의 기업을 무를까..’ 20절 말씀 마지막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

기업 무를 자는 히브리말로 고엘혹은 가알이라는 말로 특별한 친족을 의미합니다. 특별한 친족이란 가문의 손실을 예방하고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빚 때문에 가문의 사람이 종으로 팔려갈 때 대신 빚을 갚아주어 종이 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거나 토지를 팔았을 때 그 토지를 대신 사주어서 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 의무 중에는 아주 특별한 의무도 있습니다. 가문의 사람이 후손 없이 죽었을 때 그 미망인과 결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를 이어주기 위한 것인데 이것을 계대결혼이라고 합니다. 이 계대결혼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계대결혼이 특별한 것은 기업 무를 자가 그 땅을 사도 그 땅은 자기 땅이 안 되고 미망인의 본래 남편 집안의 땅이 됩니다. 혹시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은 자기 자식이 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자식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맨 처음에는 이 율법을 잘 지켰지만 세월이 지나가면서 점차 무조건적으로 지켜야할 의무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 선택에 따라서 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이득이 될 때만 계대결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아는 나오미는 지금까지 들은 보아스, 며느리 룻을 통해서 들은 보아스 정도 된다면 어쩌면 율법 본래의 가르침에 따라서 계대결혼을 수락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걸기대라고 합니다.

22절에서 나오미가 룻에게 말합니다,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무언가를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좀 지나친 기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상당히 부담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신자들의 약간 지나치고 약간 과한 걸기대도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시기도 합니다. 그럴만한 사람에게 이런 걸기대를 응답해주기도 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하나님은 가끔씩은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 신자들의 걸기대, 놀라운 꿈도 들어주십니다. 다만 그냥 어쩌다가 소위 운이 좋은사람들에게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럴만한 사람들의 걸기대를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