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3)
룻기 3: 1~13
나오미의 가족은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떠났다가 그만 죽은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압에서 남편 엘리멜렉 그리고 두 아들을 다 잃어버리고 어쩔 수 없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올 때 하나 건진 것은 롯이라는 아주 이쁜 며느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내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내 머리가 좋다고,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세상을 그리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겸손해야합니다. 똑똑하고 많이 알수록, 잘났다고 생각할수록, 지금까지 세상을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 겸손해야합니다. 지금까지 성공은 아주 얄팍하고 별것 아닌 성공이었지만 교만해지게 되면 잃어버리고 실패하는 것은 커다란 실패가 되고 커다란 잃어버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갔다가 딱하게도 홀로된 아내와 남편도 자식도 없는 며느리들만 남겨놓고 이 세상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로서는 할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젊은 룻은 그나마 밭에서 이삭줍기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밭의 주인 보아스가 이 룻을 각별하게 보호하고 배려했습니다.
추수 막바지가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아주 어려운 말을 했습니다. “얘야, 너도 이제 재혼해서 안정된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재혼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너가 지금 이삭줍기 하고 있는 밭의 주인 보아스는 우리의 기업을 무를 자이다.’ 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입으로 전하기조차 거북스러운 말을 며느리에게 지시했습니다.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2-4절)
물론 이것은 당시의 관습입니다. 그러나 설사 그것이 관습이라고 하더라도 말이 좋지 않고 모양이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무리 관습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생각 없이 관습을 따라 살 것인가? 남이 다 한다고 나도 그대로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는 성경이 어떤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인지, 혹은 아주 특별한 경우의 일인지, 아니면 성경 속의 잘못된 어떤 사람들의 모습인지 잘 살펴보아야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실패한 인생을 산 한 사람이 이제부터는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만 살겠다고 크게 작정하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첫 번째 펼친 성경 말씀이 마태복음 27장 5절이었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것은 아니다 싶어 다시 성경을 폈는데 두 번째 편 곳이 누가복음 10장 37절이었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것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한 번만 더하자 싶어 펼친 곳이 요한복음 13장 27절이었습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나오미는 누가 들으면 참 거북한 일을 며느리 룻에게 지시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볼 때 당장 우리 눈에 보이는 그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왼쪽도 생각하고 오른쪽도 생각하고 위도 생각하고 아래도 생각하고 뒤도 생각할 줄 알아야합니다. 나오미가 며느리에게 거북한 일을 지시했지만 그 지시는 사실 나오미로서는 대단한 자기 포기입니다. 나오미는 늙고 힘이 없습니다. 가진 것 하나 없습니다. 지금 나오미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며느리 룻 하나밖에 없습니다. 룻이 재가를 하게 되면 자기는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혼자밖에 남지 않습니다. 보통은 며느리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거부하고 싫어하고 방해할 것입니다.
저도 이런 경우를 몇 번 보았습니다. 배우자가 돌아가시고 남편이나 아내 홀로 남았고 연세도 들었습니다. 나이 들어 혼자 사는 것은 힘이 듭니다. 특별히 남자들은 혼자 사는 것이 더 힘이 들어 재혼하려고 할 때 자식들이 심하게 반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할 수 없어 때로는 자식들을 불러 내가 당신 아버지가 홀로 있는 것이 너무나 안 되었으니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식들이 어머니 이야기를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당신 어머니를 생각한다고 하지만 아마 어머니도 틀림없이 잘했다고 하실 것이다, 혹 당신 어머니가 뭐라고 하면 내가 천국에서 말씀드리겠다는 말까지 한 마디 더합니다. 심지어는 결혼을 못하게 말리지 않았다고 와서 따지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도리어 며느리에게 재가하여 안정된 삶을 살라고 말했습니다. 이 나오미가 자기 포기를 하는 ‘나오미의 자기 포기’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는 압니다. 며느리의 자기 포기가 있었습니다. 젊은 남자를 만나 얼마든지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가 가진 것 없는 시어머니를 홀로 둘 수 없다 싶어서 자기 포기를 했더니 시어머니도 자기 포기를 한 것입니다. 며느리의 헌신이 시어머니의 헌신을 만든 것입니다. 헌신은 헌신을 부릅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따랐습니다. 보아스가 하루 일을 마치고 타작마당 한 끝에 자리를 펴고 누웠습니다. 타작 때는 보통 주인들이 타작마당에서 밤잠을 잤습니다. 룻이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밤중에 보아스가 자는 이불 아래를 들고 거기 들어가서 누웠습니다. 보아스가 자다가 놀라서 깨어 ‘누구냐?’ 라고 묻자 ‘룻입니다 보아스님은 우리 집의 기업을 무를 자입니다. 제 청혼을 받아주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보아스는 기꺼이 룻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보아스가 이 룻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룻이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너무 귀하다는 이유를 듭니다. 참 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귀한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늙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시어머니를 모시기로 한 것, 그리고 그 시어머니를 정성을 다해서 모셨다는 사실, 그 사실은 이미 동네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바였습니다. 그것이 너무 귀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룻이 젊은이를 두고 나이 든 자기에게 청혼한 것이 참으로 귀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젊은 남자를 선택하지 아니하고 시댁의 후손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나이든 남자를 선택한 것 그것은 시댁을 생각한 자기포기라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것에 대해서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10절) 라고 칭찬했습니다. 이렇게 귀한 사람이 부탁하는 것을 내가 어찌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들어줄만한 부탁은 들어주어야하겠지만 쉽지 않은 부탁인 경우는 어떤 사람에게 들어주는가? 사람도 하나님도 어떤 사람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가를 오늘 성경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룻이 현숙한 여인인 것이 너무 귀하다고 말합니다. 본문 11절에서 보아스가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라고 말하는데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숙’ 말 그대로 홀로 사는 젊은 여인의 몸가짐이 평소에 늘 바르고 조신하다는 것입니다. 참 쉽지 않은 일인데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치하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렇게 귀한 사람, 현숙한 사람이라면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시댁 가문을 위한 계대결혼을 하기 위해서 룻이 자칫 잘못하면 추하게 보일 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시어머니가 시켰고 가문을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여자의 몸으로 남자가 자는 곳에 들어가서 몸으로 청혼하는 일이 추하게 비칠 수 있는데 그것도 자기의 탐욕이나 정욕 때문이 아니라 시댁의 후손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그것까지도 감수했다는 자체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오미의 집 기업 무르는 일에 자기보다 우선 순위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먼저 그를 만나 그가 하겠다고 한다면 도리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보아스는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2절) 라고 말하고 마음이 급했든지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려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13절) 라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이 밤에 여기 머무르라 그리고 아침까지 누워있을지니라’(13절).. 아침까지 누워있다 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아스가 이 말을 한 이유를 잘 이해해야합니다. 보아스의 농사짓는 밭은 성문 바깥에 있습니다. 성문은 밤 동안은 닫히고 날이 밝아져야 다시 열립니다. 지금 보아스가 룻을 보내면 룻은 갈 곳이 없고 위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아스의 인품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관습이라고 할지라도 덕망 있는 사람이 밤새도록 남의 여자와 같이 있었다는 비난의 눈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연약한 아녀자를 어두운 밤에 길거리로 내칠 수도 없었으므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여기서 보아스는 자기를 먼저로 하지 않습니다. 최악의 경우 자기가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아름다운 사람, 연약한 룻을 그냥 길거리에 내칠 수는 없기 때문에 성문이 열릴 때까지 있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이 룻이 온 것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기 어려운 그래도 조금은 어두울 때 떠나라고 말합니다.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할 것이라 하였음이라’(14절)
룻이 밤에 찾아온 것은 당시 관습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쓸데없는 오해나 억측이나 구설수를 만들게 되면 마을에 덕이 되지 않겠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먼저는 연약한 여인 룻도 위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의 덕도 생각했습니다. 보아스는 룻도 배려하고 마을도 배려했지만 ‘자기’는 개의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인격이고 진짜 어른의 모습입니다.
2008년 한 영화배우가 70대 노인을 폭행했다는 비난이 언론에 보도 되었습니다. 당사자는 폭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언론들은 그렇게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언론들은 나중에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흥밋거리를 말하기 좋아하고 기자들은 자기 취재력을 들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첫날부터 아무개 영화배우가 노인을 폭행했다, 연예인 폭력이 도를 넘었다는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건 발생 사흘 뒤에 그 배우는 기자회견을 자청했습니다. 기자 회견장에서 그 배우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이번 일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내 자신이 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는데 누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무슨 변명을 늘어놓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만약 자기와 피해자 진술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부 다 자기 잘못이라고 미리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진술 내용에 자기 잘못이 있다면 자기를 용서하지 말라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 후에 사건을 조사한 검찰은 그 배우에게 무혐의 발표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영화배우는 산속으로 들어가서 2년 동안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 후 방송에 나왔을 때 사회자가 이 영화배우에게 무혐의라는 것을 자신이 가장 잘 알 텐데 왜 기자회견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이 영화배우는 ‘억울한 것은 내 사정일 뿐입니다. 일단 나이 드신 분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상당히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세상은, 많은 경우에 사실과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배우는 자기가 영화배우라는 자리에 있으므로 이것까지도 생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배려가 있는 성숙한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배우의 기자회견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 연출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의 하나 연출이라고 하더라도 그 영화배우의 그 모습은 대단히 훌륭한 연출입니다. 상당히 대단한 연예인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위대한 신앙적 배려를 가르치십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질문했습니다. 바울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우상에게 바쳐졌다고 음식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그런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신앙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 사람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 믿음이 흔들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먹지 않겠습니다.’
배려할 줄 아는 신앙, 이것이 참다운 신앙입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배려하는 사람들입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배려했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며느리 룻을 배려했습니다. 보아스는 룻도 배려하고 룻의 시댁도 배려하고 마을도 배려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 번 더 기대해봅니다. 이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은 어떤 은혜를 내리실까? 하나님께서 마냥 고생하게 내버려두실까? 아니면 아름다운 사람 나오미, 룻 그리고 보아스에게 어떤 놀라운 선물을 주실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