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
로마서 16:1~15
새해가 시작된다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참으로 금방 지나갑니다. 그야말로 쏜 화살처럼 지나갑니다. 밀레니엄은 더합니다. ‘밀레니엄, 밀레니엄’ 하면서 그렇게 떠들썩한지 벌써 15년이 지났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연세가 드신 분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 지나가는 것은 누구나 빨리 지나갑니다. 눈 한 번 깜빡하고 나면 끝날 날이옵니다.
저는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갔을 때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 중에서 두 사람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아들 요나단 왕자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만나자말자 정말로 진실 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알아보고 다윗에게 빠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아끼고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심지어 자기에게 돌아올 다음 왕 자리도 기꺼이 다윗에게 양보할 마음까지 가졌습니다. 다윗이 자기 아버지 사울에게 미움을 받아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요나단은 기지를 발휘해서 어떻게 하든 다윗이 그 위기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다윗을 보호하고 도우다가 자기 아버지와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심지어는 다윗을 변호하다가 자기 아버지에게 정말로 들어서는 안 될 말, 듣지 못할 말을 듣게 됩니다. 번역한 것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이 못된 화냥년의 자식 놈아’ 라는 욕까지 들었습니다. 다윗을 위해서 그랬습니다. 요나단은 끝까지 다윗을 챙겨주었고 격려하고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다 요나단은 안타깝게도 전쟁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좀 더 오래 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더 그립습니다. 다윗이 약소국이었던 이스라엘을 위대한 왕국으로 세울 수 있었던 것,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옛날 역사에도 지금 역사에도 이스라엘의 존경을 받는 까닭은 요나단 같은 사람이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고 싶은 또 한 사람은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입니다. 바울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기독교 신자들을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뒤에 기독교로 전향했는데, 그리고 난 후 기독교 일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옛날 기독교를 박해했던 전력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외면했습니다. 이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바울, 아주 좋은 재목이 흙속에 파묻혔습니다. 시골에 들어가서 파묻혀 살았습니다. 이때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였던 바나바는 바울을 찾아 같이 교회의 지도자로 일하게 됩니다. 수 날을 시골 구석구석 뒤져서 찾아 동역자로 일했습니다.
이들이 안디옥에서 같이 동역하면서 바울은 점점 두각을 나타내서 무대 가운데로 들어오게 되지만 바울을 발굴하고 바울을 세웠던 바나바는 점점 더 무대 가장자리로 밀려나가고 무대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이 바나바가 그리운 까닭은 자기는 바울 때문에 더 작아질 가능성, 자기가 무대 중앙에서 무대 가장자리로, 무대 바깥으로 밀려갈 가능성을 충분히 알면서도 바울을 찾아갔고 바울을 세웠고 비울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저 개인으로서는 바울보다는 바나바가 더 보고 싶습니다. 다윗보다는 요나단이 더 보고 싶습니다.
이 바울이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로마서입니다. 이 편지 마지막에 하는 인사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는데 무척이나 많습니다. 1절에서는 뵈뵈가 나오고 3절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5절에는 에배네도, 6절에는 마리아, 7절에는 안드로니고, 유니아, 8절에는 암블리아, 9절에 우르바노와 스다구 10절에는 아벨레, 아리스도불로, 11절 헤로디온, 나깃수, 12절에는 드루베니와 드루보사 그리고 보시 13절에는 루포와 그의 어머니가 나오고 14절에는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 15절에는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올름바가 나옵니다. 또 쭉 이어서 21절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름 디모데가 나옵니다. 22절에는 더디오가 나오고 23절에는 가이오, 에라스도, 구아도가 나옵니다. 로마서 16장에는 서른여섯 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이름들 가운데 혹 들어본 이름도 있겠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전부다 바울을 도와서 하나님의 일을 했던 바울의 동역자들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들은 로마서 16장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이름들도 상당히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에게는 동역자가 많았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생각할 것은 바울이 그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고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바울의 소중한 동역자들이 바울 곁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바울도 대단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무대 중앙에 있는 사람들을 도운 그 사람들이 훨씬 더 귀할 수 있고 어쩌면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도 그런 사람들이 더 귀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에게는 늘 귀한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다윗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웅,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았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 그러나 다윗의 그 위대함은 결코 다윗 혼자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동역자들이 다윗과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역대상에는 다윗과 함께 한 수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역대상 11장에는 10절부터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며 26절부터는
‘또 군사 중의 큰 용사는 요압의 아우 아사헬과 베들레헴 사람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하롤 사람 삼훗과 블론 사람 헬레스와 드고야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26-28절) 등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렇게 47절까지 계속해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들이 다윗을 도왔고 다윗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다윗으로 하여금 그 위대한 일을 만들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다윗을 도왔는지 예를 들어서 보겠습니다.
엘르아살이라는 다윗의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이 이름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엘르아살은 다윗과 함께 전쟁하다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적군들이 물밀 듯이 몰려왔습니다. 이 위기의 때, 전부 다 도망가지만 엘리아살은 도망가지 아니하고 끝까지 다윗을 지켜 보호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역대상 11장 12절에서 14절의 말씀에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세 용사 중 하나이라 그가 바스담밈에서 다윗과 함께 있었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와서 치니 거기에 보리가 많이 난 밭이 있더라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그가 그 밭 가운데에 서서 그 밭을 보호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으니 여호와께서 큰 구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하는데 이스라엘은 산 위에 진을 쳤고 블레셋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진을 치고 있던 산 위는 물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 다윗이 무슨 정신이었던지 고향 베들레헴 우물의 물을 마시고 싶다는 소리를 했습니다. 때가 어느 때인데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 훌륭한 다윗이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할 것은 사람은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나도 이럴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보완해주고 이런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는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혼자서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계시는 까닭은 가장이 혹시 모자랄 때 주부가 도와주고, 아내가 모자랄 때는 남편이 도와주고, 부모가 모자랄 때는 자식이 도와주고, 교우들이 있는 까닭은 다른 교우들이 부족할 때 도와주고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람이 부족할 때는 도와주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못난 다윗의 말도 안 되는 애들 투정 같은 말을 듣고 부하 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기어이 적진을 헤치고 나가서 베들레헴까지 가서 물을 길어왔습니다. 다윗이 그 물을 받아들고 난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마시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여기서 하나 잘 볼 것은 모자라는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을 가장 잘 지적하고 잘 도와줄 수 있는가? 입니다. 여기서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가르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나서서 지적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책망할 것이 아니라 도와주다 보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다윗은 이렇게 해서 다윗으로 태어났고 이스라엘은 위대한 나라로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역대상 11절에서
‘삼십 우두머리 중 세 사람이 바위로 내려가서 아둘라 굴 다윗에게 이를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세 사람들의 진영은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갈망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꼬 하매 이 세 사람이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고 이르되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이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그들이 자기 생명도 돌보지 아니하고 이것을 가져왔으므로 그것을 마시기를 원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15-19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윗 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런 위대한 사람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에게는 여호수아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어디를 가든지 늘 빠지지 않고 모세와 함께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빠져나와서 홍해를 건너서 가고 있는 중에 아라비아 사막 시내산으로 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도자들과 함께 오라고 말씀하시면서 지도자들은 그 산 아래까지만 오고 모세만 올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른 사람들은 다 산 아래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 혼자만 올라오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여호수아는 데리고 함께 올라갔습니다. 늘 함께 했던 여호수아, 모세에게는 너무나 필요한 여호수아였고 또 하나님께서 충분히 용납하실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모세는 여호수아를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여호수아는 가장 필요한 동역자요 가장 중요한 동역자였습니다. 모세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여호수아는 그 모든 일들을 다 대신 도맡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첫 번째 전쟁을 하게 됩니다. 아말렉 군사가 쳐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전혀 전투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직 전열을 정비하지도 못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이 무엇인지조차도 몰랐습니다. 430년이나 노예로 살면서 그저 일이나 하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전쟁에 내보내면서 여호수아를 앞장세웠고 모세는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기도하는 손을 두 사람이 양쪽에 서서 들어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조차도 힘든데 여호수아는 하루 종일 전쟁을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처럼 여호수아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모세를 도와주기 위해서 늘 앞장섰습니다.
가나안 정탐꾼 사건 때입니다. 이때는 여호수아가 그 어떤 때보다 모세의 큰 힘이 되었습니다. 열두 명 정탐꾼이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열 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 열 명의 정탐꾼들은 각 지파 중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이 부정적이 되면 따르는 사람들이 다 부정적이 되고 지도자가 흔들리면 다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을 잘 섬기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잘 따르고 하나가 되도록 하는 지도자로서의 역할, 권세와 책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 두 명의 지도자 중 열 명의 지도자들의 부정적인 보고는 백성들을 사정없이 흔들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올라가보니 저 사람들은 다 거인이고 우리는 메뚜기 같아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지도자들이 이런 말을 하자 이스라엘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기어이 최고 지도자인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세를 죽이고 다른 지도자들 세워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돌멩이를 들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럴 때 여호수아가 갈렙과 함께 그들을 가로막았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모세보다 더 먼저 당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에 여호수아는 자기는 조금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모세를 지켰고 하나님의 일을 해나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가나안 사람들을 겁낼 것 없습니다. 저 사람들의 신은 떠났고 우리의 신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절대로 겁낼 필요 없습니다. 나갑시다.’
얼마나 큰 힘이 되었습니까? 이런 여호수아가 모세의 옆에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모세를 극진히 섬겼는가를 보여주는 일이 있습니다.
모세는 혼자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는 성막에 들어가서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일이 있으면 모세를 성막으로 부르셨고 모세 역시 하나님께 여쭐 일이 있으면 성막으로 들어갔습니다. 모세는 성막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이야기를 다 하고 난 뒤 일이 끝나면 성막을 나와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지만 늘 모세와 함께 하던 여호수아는 모세는 돌아가도 모세를 따라 돌아가지 않고 성막을 지켰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저는 젊었고 모세님은 이제 연세가 있으시니 집에서 쉬시고 계시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리면 제가 빨리 쫓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때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시면 됩니다. 그러니 댁에 가서 쉬십시오.’ 이렇게 모세를 섬겼습니다. 이런 여호수아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그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세도 처음에는 얼마나 징징거리는 모세였던지 모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이집트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해야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두 손 두 다리 다 들어서 거부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나를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이집트 지도자들이 나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라고 극구 사양했습니다. 사양정도가 아니라 거부까지 했습니다. 또 자기는 입이 뻣뻣하니 말을 잘 하는 사람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너무 사양하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 잘하는 입을 누가 만들었고, 말 못하는 입을 누가 만들었느냐? 다 내가 만들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보내면 틀림없이 말을 잘 하도록 만들지 않느냐? 그런데 나를 믿지 못하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눈 밝은 사람, 눈 어두운 사람 누가 만들었느냐? 내가 만들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 이제는 내가 시키는 대로 이집트로 가라’ 라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가야할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모세는 또 징징거렸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징징거리지 마십시오. 죽을 각오하고 한 번 해보겠다고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한 번 작정하시면 꼭 보내십니다. 모세가 제발 좀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참다못해 크게 화를 내셨고 그때서야 모세는 깜짝 놀라서 순종하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모세가 이백만명이나 넘는 이스라엘 민족을 40년간이나 인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불평이 많고 불만이 많고 원망이 많고 일만 있으면 지도자들에게 탓을 돌립니다. 그저 피하려고 하고 빠지려고 하고 주저앉아버립니다. 힘 드는 일, 손해 보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430년이나 노예살이를 했으니 노예근성이 가득했습니다. 노예근성이 무엇입니까? 시키는 일만 하고 요령만 부리고 쉽게 하려고 하고 어려운 일만 있으면 원망하고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려고 하는 근성입니다. 모세가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아주 성공적으로 일을 해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혼자가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같은 동역자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할 동역자를 찾고 계십니다. 옛날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찾을 것입니다. 늘 찾습니다. 동역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일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말기 무렵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제 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중요한 일을 맡길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성전에 들어간 하나님의 종 이사야는 뜻밖에 하나님으로부터 탄식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갈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왜 가지 않으려고 할까요? 가보아야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으라고 일하고 고생해보아야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 듣지 못하고 밉상을 받고 어려움이라는 어려움은 전부다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서려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탄식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하나님께서 이런 탄식을 하실지 모릅니다.
하나님 탄식하시게 만들지 마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위로를 받으시고 여러분 때문에 힘을 얻으시게 하도록 하시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하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힘을 얻으십니다. 다 하지 않으려고 할 때 하겠다고 하는 한 사람을 찾게 되면 하나님은 얼마나 좋으신지 모릅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 시대입니다. 나라가 깜깜하고 어둠에 둘러싸여있고 암흑에 덮여있습니다. 곧 멸망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조금이라도 버티게 해야 하고 망하지 않으려고 해야 하는데 왕 아합이 문제였습니다. 사람을 보내야하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러 다니셨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한 시골 골짜기에서 찾았습니다. 이름을 듣지도 못하는 디셉이라는 시골마을에 엘리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시고 난 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엘리야에게 ‘엘리야아 가거라,’ 라고 명령하셨는데 엘리야는 아니나 다를까 ‘가겠습니다. 알았습니다. 무슨 말을 할까요?’ 라고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엘리야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말을 해서 살아남을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합왕은 듣기 좋아하는 말만 좋아하는 왕이었습니다. 그에게 간다는 것은 죽는 길이었지만 엘리야는 갔습니다. 아합왕에게 ‘당신 때문에 이 나라에 흉년이 들어 앞으로 3년 동안 비 한 방울도 안 내릴 것이다.’ 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죽음을 무릅쓴 말이었습니다. 이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충성으로 말미암아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때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엘리야 같은 동역자를 필요로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은 대단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신약성경의 반 정도를 바울이 썼습니다. 그리고 이 바울 때문에 온 세상이 복음으로 덮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 혼자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바울의 동역자들은 어떻게 바울을 도왔습니까? 오늘 본문의 경우 몇 가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1절) 라고 말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2절) 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고달프게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위기들이 있었겠습니까? 이럴 때 뵈뵈는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또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3절) 라고 말하면서 부부인 이들에 대해서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4절)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바울의 사역을 위해서 자기들의 목은 언제든지 내놓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바울이 먹고 자는 것을 이 사람들이 책임졌고 심지어 바울이 어려움을 당해서 외국으로 쫓겨 나갈 때 아예 함께 이민 갔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여기에 있으라고 하면 거기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또 고린도에 있을 때는 자기 집을 하나님의 교회로 바친 사람들입니다.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5절) 라는 말씀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집을 교회로 바친다는 것은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들의 식사까지 대접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힘든 일인데 이런 일까지 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바울 옆에 있었습니다.
또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7절) 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의 죄가 아닙니다. 바울 때문에 옥에 갇혔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바울을 도왔다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몸 약하고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은 바울이 혼자 감옥에 두면 언제 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부러 자원해서 감옥에 갔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울 옆에 있었습니다.
또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13절) 라고 말하면서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13절) 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도왔던 것이 아닙니다. 루포의 어머니가 바울을 아들처럼 챙겼습니다. 여러 가지 필요가 많은 바울, 어머니가 아들을 챙기듯이 바울을 챙긴 루포의 어머니입니다. 여러분 중 누가 모자라고 부족하고 병약한 하나님의 종들을 도와 그의 어머니가 되시겠습니까?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듯이 하나님의 종을 위해서 기도하고 혹시라도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을까 하여 밤잠 못 주무시는 어머니, 누가 이런 어머니가 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사람, 이런 어머니를 찾고 계십니다.
이들을 보면서 환상을 봅니다. 이 사람들이 천국에 갔을 때 주님께서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뵈뵈를 보고는 ‘이 사람 뵈뵈를 보아라, 이 뵈뵈는 위기에서 나를 지키고 언제나 나의 보호자가 되었던 나의 보호자이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가리켜서는 ‘이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내놓았던 나의 은인들이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들 하나 하나를 소개할 때 마다 수많은 사람들은, 앉아서 듣지 못하고 일어서서 박수를 칠 것입니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보면서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나와 함께 옥에 갇혔던 사람들이다.’ 라고 말씀하실 것이고 루포의 어머니를 보고는 ‘보아라, 내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이 분 또한 나의 어머니이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도운 하나님의 종들의 동역자는 곧 우리 주님의 동역자이고 주님을 도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다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좀 빨리 들어가고 또 어떤 사람은 좀 늦게 들어가겠지만 다 천국에 가실 텐데 여러분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을 만나게 되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떻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주님으로부터 어떤 말을 듣고 싶습니까? 어떤 말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