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기도
마가복음 11:20~24
어느 나라든지 서점가에는 때가 되면 책 열풍이 한 번씩 붑니다. ‘초유의 베스트셀러’ ‘아마존 몇 주 1위’ 라는 거창한 프레이즈가 나돌기도 합니다. 광고를 교묘하게 하기도 합니다. 신문에는 광고면만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를 통해서 마치 기사처럼 광고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들이 순진해서 잘도 속는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들해집니다.
그 중 하나가 더 <더 시크릿> 이라는 책입니다. 전직 TV 프로듀서가 쓴 책으로 건강한 사람들, 재산을 많이 얻은 사람들, 행복을 얻은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을 연구하여 그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이것이다, 그 비밀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재산을 많이 얻고, 건강을 찾기도 하고,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무슨 비밀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었는가를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책의 내용을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나의 생각은 그대로 현실이 된다’는 것으로, 조금 더 설명하면 ‘내가 생각하고 이루어졌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그대로 결과가 되어서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말 그대로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책이 번역되어 출판된 지 약 10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책이 말하는 비밀 때문에 무엇을 성취했다, 어떤 일에 성공했다는 사례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 때문에 출판사가 돈을 많이 벌고 서점도 돈을 벌고 그리고 그 책을 쓴 사람은 득을 봤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 대신에 실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책이 말하는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상실감에 빠져든 사람들이 더 좌절하고 더 깊은 상실감에 빠져들었다는 보고는 쌓여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뒷받침해주는 성경구절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 예레미야 33장 3절에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부르짖기만 하면 응답받고 크고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에서는 대표적으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이야기입니다.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는데, 이 사람은 하늘도 겁내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사람이다. 이런 불의한 재판관에게 과부 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들고 찾아와서 그 억울한 일을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물론 그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다. 뇌물도 안 바치고 들어주어야 재판관에게 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부가 포기하지 않고 밤낮으로 찾아와서 계속해서 귀찮게 했다는 것이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만약 내가 끝까지 저 과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말라서 죽을 것 같다, 말라죽기 전에 저 과부의 부탁을 들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해결해주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주는 말씀은 성경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더욱 더 그런 느낌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전부 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열심을 다해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33장 말씀을 하실 때 그런 뜻으로 하셨을까요? 열심히 기도하기만 하면 다 응답받는다는 가르침을 주기위해서 일까요?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만 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말씀을 성경에서 볼 때마다 항상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연구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지식, 경험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신 상식을 가지고 성경에서 하신 말씀을, 때로는 목사님들이 이런 저런 말을 했을 때 그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성경을, 목사님들이 하신 말씀을 그저 ‘아멘’ 하고 받아들인다고 좋은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우선 앞에서 예로 들은 성경말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33장 3절의 말씀을 하실 때 당시 이스라엘은 죄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그렇게 경고하고 책망하고 권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없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고 결정하셨습니다. 그 결정을 하시고 난 후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분명하게 멸망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 전체가 멸망하는 가운데서도 나 하나님을 찾는 사람, 나에게 순종하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개별적으로 살 길을 주겠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나라 전체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망한다. 내가 그렇게 결정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후에라도 ’나라가‘ 나 하나님을 찾고, 그때부터라도 나에게 순종하고 나를 따르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길을 내가 주겠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너희들 이스라엘에게는 세상의 주권자, 세상의 주인인 내가 있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든지 간에 나에게 찾아오기만 하면 길이 있다, 그런데 이런 나를 두고, 이런 나를 찾지 않고, 아무 소용없는 곳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있느냐? 나에게 오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이라도 나에게 오기만 하면 길이 있다, 방법이 있다, 내 이스라엘 백성들아 나에게 오라, 나에게는 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매달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응답해주시겠다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시지만 무조건 소원을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가복음 18장의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이야기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분명하게 그 비유의 목적을 성경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1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가 목적이고 낙심하지 않는 것이 목적입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열심히 쉬지 않고 매달리는 기도를 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하라,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좌절하지 마라.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 라는 것이 그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이야기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6-8)
전체의 뜻은, 하나님은 세상의 불의한 재판관 같은 사람들과는 전적으로 다르시다, 불의한 재판관은 판결할 때 옳고 그름을 따라서 판결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따라서 자기에게 득 되는 쪽으로 판결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옳고 그름에 따라서 판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무거나 들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일이 신자들의 일이라면, 옳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오래 지체하시지 않고 빠른 시일에 판결을 내려 끝내주신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임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혹시 속상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억울한 일이 있어도 힘들다고, 억울하다고 세상 전부를 부정적으로 보고 나쁜 말 할 것이 아니라 기다려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정의를 이루어주신다, 억울하고 아픈 가슴 다 해결될 날이 온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을 읽을 때, 성경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기도하고 믿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잘못 아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기독교신자들이 그 말씀을 그렇게만 생각하고 마법의 주문처럼 연발하는 말이 있습니다. ‘믿습니다.’ 라는 말 그리고 ‘아멘’입니다. 더 크게 더 강하게 ‘아멘’하고 더 많이 되풀이하면 틀림없이 응답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하신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용도 없고 생각도 없는 빈 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7-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본받지 말고 배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우습게 됩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라는 23절 말씀에 대해서 거의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이 말씀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옳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 아주 특별하게 지혜로운 사람들을 두고 ‘산을 옮기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무슨 일이 있을 때 그 분에게 가면 ‘길이 생기는’ 지혜로운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당시에는 ‘산을 옮기는 사람’ 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아주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해결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을 때 주변에서 ‘그런 문제라면 저 분을 찾아가면 길이 생길 것!’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22절의 ‘하나님을 믿으라’ 라는 마지막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 모든 것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이다, 꼭 필요한 일, 정말로 답답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정말로 속상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으라, 그러면 길이 생길 것이다!’
이런 말씀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기도란 무엇인지 그 정의를 생각해봅니다. 먼저 기독교의 기도가 아닌 것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무리 소원하고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매달려서 무엇을 요구하고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할지라도 어린 아이에게 사탕 주는 정도라면 할 수 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이 자기 욕심대로 자기 소원만 요구하는 것,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아닌 것임에도 달라고 매달리는 것, 밥 안 먹고 잠 안 자고 기도한다고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만약 그런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 기독교는 샤머니즘과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기도란 무엇인가? 간단하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틈만 나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노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딸이 엄마를 만나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는 것, 부부가 산책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하는 것, 그런 것이 기도입니다. 또 하나는, 그 모든 것 뒤에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이 세 가지를 나누어서 생각해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것입니다. 혹자는 ‘너무 단순하고 당연한 문제까지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어떤 건수, 어떤 ‘꺼리’가 있든지 간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는 이것이 기도입니다. 절대로 불가능하고 다 끝난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풀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끝난 것 같지만, 더 이상 안 될 것 같지만 그것을 그냥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간에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란 어떤 일이든지 간에, 일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가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자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 D. L 무디가 기도에 대해서 아주 단순하고 좋은 정의를 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하나님을 만나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대화 즉 ‘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께 말합니다. 이것을 부탁하기도 하고 저런 이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도 나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기회를 드려야합니다. 하나님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하나님께 말씀하실 기회를 더 많이 드리는 것입니다. 자꾸 드려야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이 훨씬 많습니다.
세 번째, 기독교인들 가운데, 기도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빠뜨리기 쉬운 것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서 기도하고 난 뒤,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 ‘나의 고백’이 있어야 진정한 기도가 됩니다. 지금까지 알던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을 만나보니 또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는 이렇게 살았는데 앞으로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제 소원만 생각했는데 하나님 소원을 이제 알았습니다. 제가 늘 제 부탁만 드렸는데, 아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군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었군요, 알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지금까지는 먹고 살고 노후 준비하느라 그저 나만 생각했는데, 하나님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때까지 노후준비만 하다 끝나겠습니다. 저는 이제 덜 먹더라도 이렇게 살겠습니다.’ 등의 고백을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때 생각이 바뀌십니다. 그 소리 듣고 나서 기뻐하시면서 준비하신 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 결단, 그런 고백이 있을 때 그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고백할 때 그 고백에는 몇 가지가 포함됩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만나보니 너무나 대단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좀 배우기도 하고 능력도 좀 있었고 재주도 좀 있었습니다. 힘도 조금 있습니다. 그것으로 살아왔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뵙고 나니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하나님 힘으로 살겠습니다. 일만 있으면, 때가 되기만 하면 하나님을 찾겠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도 좋아하시지만 그것을 참으로 좋아하십니다. ‘지금까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웃었고,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그렇게 못했는데 하나님을 뵙고 나니 하나님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옳은 것 같습니다.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결과가 어떠하든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능력 있는 기도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없이 좋아하십니다. 이런 사람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기 저기 온 땅을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백에는 당연하게 ’하나님 제가 오랜만에 좋은 결심을 했는데, 이 결심대로 이 고백대로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라는 것이 포함됩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기도는 쉬운 길을 가겠다, 내 편한 길을 가겠다, 내 소원, 내 욕심을 채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도가 아닙니다. 어려운 길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있다면 저로 하여금 가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기독교의 기도입니다. 어떻게 하든 다른 사람의 소원은 제치고 내 소원만큼은 꼭 들어주셔야하겠다고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간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예수님처럼 흉내도 좀 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만약 이것이 하나님 뜻과 상치되는 것이라면 제 뜻 말고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마음속에 얼마나 간절한 소망이 있는지 다 아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도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이렇게 바르게 알고 옳게 기도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란 어떤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보다 ‘기도하는 그 자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느라 정작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기도입니다. 잘못 해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들으십니다. 어떤 것보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틈만 나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은 무슨 반찬을 할까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정도의 차이는 나지만 한계에 이르게 되면 다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주저앉습니다.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다른 때는 당황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실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습니다. 주저앉았다가도 기도하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황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옛날에는 도무지 넘어가지 못하는 담이었는데, 넘어가도록 해주십니다. 상황을 이길 수 있는,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전에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산으로, 술(酒)로 어디로든 피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현실과 직면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붙들고 늘어지면 안 됩니다. 풀어주시든지 아니든지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평화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슬픔,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화를 얻게 하십니다. 편안합니다.
호레이시오 스패포드(H. G. Spafford)는 시카고의 성공한 변호사였습니다. 린드 대학교, 시카고 의과대학의 법리학 교수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독실한 기독교신자였습니다. 이 스패포드 교수가 마흔세 살이 되던 1871년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시카고 대화재를 만나게 됩니다. 전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스패포드 교수로 하여금 많이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그 직전에 큰 아들을 전염병으로 잃어버린 일이었습니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패포드는 휴식 차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유럽 여행이었습니다. 1878년 11월 15일 스패포드는 아내와 네 딸과 함께 프랑스 여객선을 타고 뉴욕항을 출발했습니다. 배가 떠나기 바로 직전 스패포드는 아주 급한 연락을 받고 배에서 내려야했습니다. 아내와 네 딸들만 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배는 칠 일간 순항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일주일 뒤인 1873년 11월 22일 새벽 2시,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잠든 그 시간에 이 사람들이 탄 배가 대서양 한 가운데서 영국 철갑선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필사의 구출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다행히 스패포드의 아내는 구제받았지만 스패포드의 네 딸을 비롯해서 222명의 승객들이 바다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영국에 도착한 스패포드 부인이 남편에게 ‘saved the alone’ 라는 짤막한 내용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받은 스패포드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망연자실해 있던 스패포드가 정신을 차렸는데 바로 아내 때문이었습니다. 네 딸을 잃어버리고 여기저기 정신없이 헤매고 다닐 아내를 빨리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스패포드는 배를 타고 영국으로 출발했습니다. 출발 며칠까지는 그럭저럭 잘 견뎠지만 사고 현장에 이르렀을 때 스패포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선실에 뛰어 들어가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제가 누구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저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토록 큰 시련을 주십니까?” 한 없이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울부짖던 스패포드가 조금씩 조금씩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밤새 울부짖고 기도하던 스패포드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겨납니다. 처음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평화가 하나도 없었는데 그 슬픔이 조금씩 빠지고 평화가 들어왔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점 더 슬픔은 적어지고 평화가 많아졌습니다. 마지막에는 더 이상 슬픔은 남지 않고 평화만 가득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스패포드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고백이 흘러나왔습니다. ‘It is well’ ‘괜찮습니다.’
스패포드가 그 고백을 글로 옮겼습니다. 그 시가 바로 찬송가 470장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