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종이 되겠다!
창세기 44장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은 이집트 총리가 되어서 곡물을 사러왔던 형들을 만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사랑하는 친동생 베냐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열두 형제가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냈으나 요셉의 형제들은 여전히 총리가 요셉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헤어질 때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지난번처럼 곡식과 돈을 넣어주면서 이번에는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은잔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길을 떠났습니다. 조금 후에 요셉의 하인이 그들을 따라가 큰소리로 ‘사람들이 은혜를 어떻게 이렇게 악으로 갚을 수 있느냐’ 하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느냐 절대로 그럴 리가 없으니 조사해 보아라. 하면서 자기들의 자루를 내려놓고 누구든지 그 은잔을 훔친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죽을 것이고 우리는 종이 되겠다고 자신들을 내어놓습니다. 그랬더니 하인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은잔이 발각된 사람만 종이 되면 된다고 하면서 조사를 하니 막내 동생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형제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가슴을 쳤습니다. 하인은 발각된 사람만 두고 가면 된다고 하지만 형들은 어떻게 이 동생만 두고 가느냐고 하면서 다 따라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총리 요셉과 만나서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냈는데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살려달라고 애걸해야 하는 그런 참담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조금 뒤의 일을 알지 못하고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큰소리 칠 것도, 교만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언제 우리에게 충격적인 사건들이 생겨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런 것을 미리 아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건강해도 한 순간 건강이 나에게서 달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지금은 내가 풍성하다 할지라도 어느 한 순간 그것이 휴지 조각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제 그 형들이 요셉 앞에 끌려나와 땅에 엎드려 큰절을 하고 대표로 유다가 해명을 합니다.
유다의 해명 가운데 ‘어떻게 우리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이런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민망함이 생깁니다. 20여 년 전에 그들이 요셉에게 한 짓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렇게 애원하던 동생을 노예로 팔았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짐승에 찢겨 죽은 줄 알고 있는 아버지 야곱을 아직까지도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과연 그런 그들이 나타낼 정직이란 있는 것인가요?
요셉의 형들이 정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참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인생의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죄를 짓지 않았다고 ‘나는 잘못이 없고 깨끗하고 정직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요? 이런 모습이 요셉의 형들만의 모습이 아니고 우리 인생 모두의 모습인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이들이 조금씩 변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이란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 하셨으니..’ 하나님이란 말을 하는 순간 그들은 자기 죄악을 보기 시작했고 겸손해졌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은 죄가 없으나 지금까지의 죄악을 기억해내고서는 요셉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해명하고 항변하다가 대낮같이 환해서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나가니까 자기 죄악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죄가 발견된 사람만 종이 되고 다른 사람은 가라고 하지만 그들은 함께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유다는 자기 아버지가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이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면 아버지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사정을 하고 난 뒤 마지막에 결심을 합니다. 자기가 대신 종이 되겠으니 이 베냐민만은 돌아가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44장은 끝이 나고 아울러 지금까지 요셉 형제들의 모든 어려움이 다 끝이 납니다.
요셉이 왜 계속해서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요셉이 정말 형들이 미워서 그럴까요? 아니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총리의 세도를 과시하기 위해서 일까요? 여러분의 느낌으로도 그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요셉은 아직 형들을 믿지 못하여 형들의 마음을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는 한 형제, 한 가족, 하나로 살고 있는가? 어머니가 다르다고 아직까지 베냐민을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요셉이 베냐민을 보기 전에는 어쩌면 베냐민이 자기처럼 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자기 아버지가 막내 베냐민을 보내지 않은 이유가 아직까지 저 형들이 막내를 없애려고 기회를 엿보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충분히 가졌을 수가 있습니다. 또 이제 요셉이 베냐민을 만났을 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지만 걱정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탄탄하게 보호해 주셨는데 시므온 때문에 그를 요셉에게 보여주기는 했으나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에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그 두려움이 요셉에게 이런 시험을 하도록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요셉이 그 형들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형들을 시험해 오면서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입으로는 믿고 사랑하며 충성하고 하나가 되었다고 하면서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너무 많이 보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조차도 믿는다는 순간은 한 순간이고 어느 틈엔가 사람이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그 모습, 그리고 입술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손 하나 꼼짝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입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기도조차도 하지 않는 이 모습을 하나님께서 고발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람들, 말뿐이 아니라 삶과 인격이 변화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보고 싶어 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서 그 모습을 찾고 싶어 하십니다.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시험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믿음이 좋은 듯 하다가도 그렇지 아니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주었습니다. 아들을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자기 아내의 종에게서 난 아들을 상속자로 하겠다고 하였고 또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주는 믿음의 시험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제야 하나님께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사랑하며 충성하고 믿는 것을 원하십니다. 한 번 사랑했으면 조금 불만이 있더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형제들의 마음이 하나하나 변화되는 것을 불 수 있습니다.
맨 처음, 후회하고 자책했습니다. 후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팔고 난 뒤 후회했습니다. 이들이 아직까지 회개까지 가지 아니하고 후회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한 걸음 나아갑니다. 아직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아버지를 사랑하는데 까지는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걸음 올라갑니다. 형제애가 성숙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절 말씀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이제 형제를 사랑하는데 까지 간 것입니다.
또 한 걸음 더 올라갑니다. 지난번 방문 때 자루에 돈이 가득 들어있는 것을 보고 이들이 깜짝 놀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만 그때는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그쳤으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16절에서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지은 죄악을 하나님께 다 노출시켰으니 이제는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기고 속일 것이 없으므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문제의 대단원으로 갑니다. ‘사랑’ 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에 이르렀을 때 모든 문제가 다 끝이 납니다. 33절의 유다의 호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결론적으로 확인해야 할 사항은 한 번 충성하기로 작정했으면 끝까지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보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은잔으로 자기 형제들을 시험하는 것은 그들을 골탕 먹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잠시 사랑하고 충성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진실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형들을 점차 변화 되게 하였습니까? 시련이고 고난입니다. 고난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시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기에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에까지 올라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고난과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고통으로만 받을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진정한 축복을 하나님께서 주시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고난으로 변장한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시련을 만났으면 빨리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시련이 끝이 나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그 시련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른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더 볼 것은 요셉의 형제들의 시련이 무엇으로 끝났는가? 입니다. ‘사랑’ 입니다. 희생이 있는 사랑,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했던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 개인적이나 가정적으로 또는 이 나라, 이 사회에 있는 시련과 고난이 언제 끝날 것인가를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 서로 먼저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 라고 할 때에 이 시련이 끝이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대신 종이 되게 하시고’ 라고 고백할 때에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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