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마태복음 5:9
독일 숲속 어느 오두막집에 열두 살 아이와 어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참 전쟁 중인 194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모자는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습니다. 미군 병사 세 명이 찾아왔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죽은 것처럼 눈 위에 누워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아이는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닭을 잡고 요리를 합니다.
맛있는 음색 냄새가 한참 집안을 가득하게 할 무렵, 문에서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습니다. 또 미군이겠지 하고 열어준 문 앞에는 독일군 네 명이 서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는 공포감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도 열두 살의 아이도 적군인 미군을 도와주는 것은 반역 행위이고 총살감이라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어머니는 곧 독일군 앞으로 나가서 조용하게 인사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독일 병사들도 인사를 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들은 길을 잃었으니 하루 밤 묵고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부탁을 들은 어머니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물론 되고말고요.” 이 대답을 들은 독일 병사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반쯤 열린 문 안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곧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어머니의 말은 엄숙해졌습니다. “지금 다른 손님 셋이 계신데 친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더욱 엄숙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불량과자 사달라고 하는 아이를 나무라는 듯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예요. 오늘은 이곳에서 총을 들면 안 돼요.” 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독일군이 물었습니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어머니는 지체 없이 미국 군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에 곧이어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들어오세요. 부상을 입은 청년 하나가 지금 죽음과 싸우고 있고 그의 친구들도 여러분처럼 길을 잃고 배고파 지쳐있어요. 오늘밤만은, 이 크리스마스이브만은 사람 죽이는 일을 잊읍시다.”
독일군은 멍하게 어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한 2초나 3초 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이에게는 실제 시간보다 몇 십 배나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어머니가 망설이는 독일군들에게 결단을 내려주었습니다. “자, 이야기는 그만두고…” 라는 말과 함께 손뼉을 치면서 “총은 이 장작더미위에 내려놓으세요. 다른 사람들이 맛있는 닭고기를 다 먹어치우기 전에 어서 서두르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의 이 말에 군인들은 미군이나 독일군 할 것 없이 모두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이 고분고분 장작더미 위에 총을 내려놓았습니다. 기적은 이어졌습니다. 어머니가 음식을 더 마련하는 동안 독일군 하나가 안경을 쓰고 부상당한 미군의 상처를 치료해주었습니다. 독일군들이 배낭을 열었습니다. 거기에서 포도주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포도주를 꺼내 미군 병사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포도주가 부족했지만 반병은 부상당한 미군 병사를 위해서 남겨두었습니다.
어머니가 기도했습니다. “평화의 주님, 오셔서 저희들의 손님이 되어주십시오.” 어머니의 눈에도, 미군 눈에도, 독일군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습니다. 밤이 깊어졌습니다. 어머니가 제의했습니다. “우리 모두 밖에 나가서 별을 봅시다.” 부상당한 병사 하나만 제외하고 모두 하늘의 별을 쳐다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늘의 별을 찾고 있던 그 순간 전쟁은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평화만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평화를 깨뜨리는 일을 합니다. 예를 들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얼굴 펴는 것 하나만으로도 정말로 좋은 선교라고 이야기하고 좋은 구제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면 가족들 마음이 다 무겁습니다. 회사의 회장님, 사장님이 얼굴을 펴지 않으면 임직원들이 다 힘듭니다.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을 친구가 아니라 전부 다 내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왠지 모르게 안 좋게 또는 안 좋은 느낌이 들도록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게 이야기하고 좋게 시작하다가도 어느 틈엔가 그 사람이 말하는 제 3자와 내가 점점 멀어지도록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런 것을 이간질이라고 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경향이 있을까요? 왜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일을 할까요? 왜 다른 사람들을 멀리 하는 일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마음속에 있는 시기 때문입니다. 질투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시기 질투가 다 있습니다. 물론 시기 질투 때문에 발전하는 면도 있고 더 노력하는 면도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더 애쓰는 것도 있습니다. 좋은 면도 없지는 않지만 이것은 다 평화를 깨뜨립니다. 내 속을 시기가 가득차고, 질투를 가득 채우고 욕심을 가득 채우게 되면 이 욕심 때문에 저 사람을 독차지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은근히 좋지 않은 말을 하게 됩니다. 좋지 않은 인상이 들도록 말하는 것입니다.
경쟁심 때문에 그런 것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경쟁심이 어느 정도는 있는데 이 경쟁심 때문에 사람들에게 자꾸 안 좋은 소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사회에서는 더 합니다. 은근하게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화를 깨뜨립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왜 내가 그런가, 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가에 대해서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쟁을 잘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조용한데 괜히 큰소리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잘 다투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고발을 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준법정신은 좋은데 고발을 많이 하기 때문에 고발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쪽지도 쓰는데 사실 쪽지라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름을 밝히지 않고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몸 건강하십시오.’ ‘우리 집사님 얼굴 뵈니 평화가 있어서 좋습니다.’ 라는 좋은 말을 쓰면 참 좋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쪽지는 무기명이다 보니 비난하고 험담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여 마음을 무겁게 하는 말을 많이 씁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든지 이런 경향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이것을 누르지 못하고 이것을 삶에서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적어도 그런 일을 하는 동안에는 악마입니다. 평소에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사람들은 사실은 악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첩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간첩이 늘 간첩질을 합니까? 아닙니다. 십분의 일도 또 어떤 사람들은 오십분의 일도 간첩질을 하지 않습니다. 아주 좋은 시민으로 있다가 어느 때 간첩노릇을 하면 그 사람은 간첩입니다. 악마가 그렇습니다. 악마는 대체로 다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에 악마의 노릇을 합니다. “저 사람은 본래 사람은 좋은데…” 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합니까? 그 속에 악마의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얼마간 악마적 속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다 악마적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천사와 악마의 요소가 반씩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반씩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게 말하려고 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악마적 요소가 좀 더 많고, 어떤 사람은 천사적 요소가 좀 더 많습니다. 그러다 아차 틀어지면 둘 다 같이 있었지만 열 가지 중에 악마적 요소가 하나밖에 없어도 악마적 요소가 힘을 발휘하게 되면 아홉 가지 천사적 요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악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마 노릇은 참 하기 쉽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차’하여 입을 약간만 열게 되면 악마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알면서 악마노릇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 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평화를 깨뜨립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고, 직장의 평화를 깨뜨리고, 사회의 평화를 깨뜨리고, 때로는 교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자신을 힘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쉽게 생각해봅니다. 먼저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혹시라도 이것이 상처를 준다면, 무겁게 한다면, 마음을 어둡게 한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고 꾹 참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회사에서 어디서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참는 것입니다.
“이 말은 꼭 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그것이 반드시 일을 좋게 만들어 갑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평화를 깨뜨려서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직원들로 하여금, 임원들로 하여금 일을 더 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사람을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그런 말 대신 항상 따뜻한 말을 합니다. 위로의 말을 하고 부드러운 말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참 편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사이를 평화롭게 합니다. 바로 이 사람이 화평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제 3자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참 좋은 말로 합니다. ‘speak well of' 라는 미국말로 하면 표현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좋게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할 때, 누군가 마치 잘 아는 듯이 ‘이 사람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 괜찮은 사람 한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에 적어도 새로운 좋은 사람 한 사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까? “그 분이 선생님에 대해서 참 좋게 생각하십디다.” 라고 말하면 행복해집니다. 나도 행복해지고 저 사람도 행복해지고 이 사람도 행복해집니다. 이런 사람이 화평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혹 사이가 나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 사이에 쓴물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관계가 안 좋은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하든 그들의 관계가 좋도록 하려고 하고 화해하도록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자기 돈을 들여가면서 식사를 대접하면서까지 관계를 좋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갈라진 틈을 메워주고 쓴 관계를 달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내가 있는 곳을 평화롭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가정을 평화롭게 만드십시오. 특별히 아버지 되시는 여러분들, 남편 되시는 여러분들이 애를 많이 쓰십시오. 가장이 애를 쓸 필요가 있습니다. 얼굴을 펴십시오. 웃으십시오. 아내에게, 자식들에게 이것보다 더 큰일 하는 것 별로 없습니다. 활짝 웃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장, 여러분의 회사에서 활짝 웃으십시오. 여러분들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 있을수록 더 그렇게 하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의 직원들이 다 행복합니다. 모두 다 행복합니다.
큰 소리 칠 일이 있어도 가능한 큰 소리 치지 않고 조그마하게 이야기하십시오. 큰소리로 말하면 잘 알아들을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큰소리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귀를 막아버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좋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그네 옷을 벗긴 것은 세찬 바람이 아니라 부드러운 훈풍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혹시라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야할 때가 있어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지 아니하고 분쟁을 일으키지 않아야합니다. 혹시라도 분쟁이 일어나 시끄럽게 되면 다음에 하자고 하십시오. 얼마나 좋은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다음에 그때에도 여전히 그렇다면 또 다음에 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없어집니다. 꼭 다 풀고나가야 합니까? 풀어도 다음에 또 생깁니다. 내일이 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는 곳 그곳을 편안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야 그렇게 합니까? 대통령이 나라를 평화롭게 하던가요? 나라의 대단한 사람이 평화롭게 하던가요? 그런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예수님을 소개할 때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12:18-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그만 지위만 있으면 또 조금만 높은 자리에 있으면 큰소리치려고 하고 할 말 있다고 자꾸 말하려고 합니다. 주님도 할 말이 많으셨습니다만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온유한 분이셨고 평화를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내가 죽을 때 ‘그 사람은 언제나 잡초를 뽑고 꽃을 심은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대통령이 되어서 나라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에서, 회사에서, 이웃에서 이런 일을 하게 되면 여러분이야말로 화평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최고로 화평화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화평하게 하는 최고의 일일까요? 예수님은 화평, 평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고 근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는 항상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경험으로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으로 경험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예수님이 오시면 평화롭습니다. 가정에 예수님을 모셔보십시오. 내 인생에, 내 가슴속에 예수님을 가득 채워보십시오. 이상하게 평화롭습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경제도 잘 안 풀리고 몸도 좋지 않고, 자녀 문제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내 속에 예수님이 충만하게 되면 이상하게 평화롭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전하게 되면, 복음을 전하게 되면, 선교를 하게 되면, 여러분들에게 먼저 그리고 여러분에게 더 큰 평화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여러 사람이 일하다 보면 이런 저런 문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 전하는 일을 감당하게 되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내 가슴속에서 금방 평화가 가득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전하게 되면 내가 먼저 평화롭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벤허를 생각해봅니다. 벤허는 집정관을 구하고 집정관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이후 벤허가 유대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집정관은 반지를 빼서 주었습니다. 양아버지의 반지를 받은 벤허는 자기와 자기 집을 완전히 파멸시킨 친구인 고관을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에게 옛날에는 아무 소리도 못했지만 이제는 그를 찾아가 내 어머니와 누이를 찾아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벤허는 양아버지 집정관이 준 반지로 도장을 찍으면서 이 사람의 이름으로 명령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명령에 따라야 했습니다. 사실 벤허는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집정관의 아들일 뿐인데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권한으로 명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곧 벤허가 집정관이라는 것입니다. 유대도 그렇고 로마에도 이런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 그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복이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혹시라도 “하나님께 저에게 권세 주십시오. 능력 주십시오.” 라는 기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미련한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이 평화를 만들면 아무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의 자녀가 그런 권세와 능력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달라고 한다고 무조건 주시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런 것은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내 남편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 내 아들, 딸이 하나님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면 이는 곧 하나님께 권세와 능력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권세 받고 능력 받고 대단한 복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저도 그렇고 모든 사람은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저로 하여금 하나님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 라는 기도는 참 지혜가 있습니다. 같은 기도라도 이렇게 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소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님을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는다는 두 번째 의미를 보겠습니다. 고대 히브리어는 명사가 형용사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간혹 그런 용례가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복을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대신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일을 대신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일을 대신하신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곧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해 주시는데 복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를 제대로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욕심에 채워서 ‘하나님, 복 주십시오, 권세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여러분들이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것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일을 여러분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일을 대신 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복 받는 사람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선교를 ‘하나님의 선교’라고 합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복음을 대신 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업, 여러분의 건강, 여러분의 자녀를 대신 돌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수많은 역사, 수많은 일들이 증거하고 있으며,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평화롭게 하십시오. 화평하게 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정말로 능력 있는 사람입니까? 우선 내 가정부터 평화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늘 편안하게 웃고 좋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전부다 순환입니다. 남편들이 아내를 편안하게 해주고 화평하게 해주면 또 아내가 남편을 평화롭게 해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능력 있고 권세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많은 역사가 이야기해줍니다. 똑똑해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롭게 하는 사람, 하나님 일을 좋아하는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성공은 3P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을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공통적으로 보면 세 가지 P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 Patient 즉 인내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한 번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우여곡절 끝에 성공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칠전팔기 끝에 일어선 사람들이 성공하기 때문에 이들은 다 견디어냅니다.
두 번째는 Practice, 실천입니다. 하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잠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동안 하는 것입니다. 잠시는 누구든지 다 합니다. 잠시 충성하고 잠시 사랑하고 잠시 진실하고 잠시 신실한 것은 다 합니다. 그런데 오래 하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오랫동안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Peace 평화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평화가 성공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이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태리의 아씨시 프란시스코는 제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성자입니다. 이 분이 어느 날 자기 집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나가보니 대문 앞에 험상궂은 표정을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얼굴과는 달리 그 사람은 아주 간절한 목소리로 너무 추우니 잠시 집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프란시스코는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얼굴이 험상궂어 보인 까닭은 나병 때문이었습니다.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따뜻한 저녁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시스코는 저녁을 준비하여 그 사람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했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습니다. “내 몸이 너무 춥습니다. 미안하지만 선생님 그 몸으로 저를 좀 따뜻하게 데워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시스코는 그 자리에서 옷을 벗었고 벗은 몸으로 그 사람을 안고 몸을 데워주었습니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프란시스코가 깨어나 보니 그 환자는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왔다 간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프란시스코는 곧 그가 주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님, 나같이 비천한 사람을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리고 또 기도했습니다. 이때 프란시스코가 드린 기도가 바로 조금 전에 불렀던 평화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조금 전에 평화의 기도를 불렀는데 금년 한 해 동안 계속해서 노래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모두 일어서서 이 평화의 기도를 기도하시는 마음으로 찬송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름다운 것을 도모하십시오. 세상은 참 어렵습니다. 불확실한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불확실하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여러분들이 아름다운 것을 도모하는 한 여러분이 사는 곳은 평화로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화평을 이루십시오. 평화를 만드십시오. 그래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우리 주님의 놀라운 선물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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