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어찌하여 (하박국 1:1-11)

분당소망교회 2012. 9. 27. 14:30

 

어찌하여

 

 

 

 

하박국 1 : 1~11 ═══════════════════

 

 

 

근대 시민사회는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그동안 마땅히 누려야했던 자유와 권리를 그제서야 되찾게 됩니다. 시민들은 그동안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자유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의 맛을 보게 되면서 한없이 기뻐합니다. 그때 당시 사상가들과 학자들은 만약 앞으로 시민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가 침해된다면 틀림없이 극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그 결과 사회는 앞으로 점점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고 점점 더 나은 쪽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주의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외부로부터의 무너짐이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무너짐이었습니다. 독일 나치의 파시즘이 대두했을 때, 시민들은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인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파시즘에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저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파시즘에 빠져서 열광했습니다. 그 당시 생각 있는 사상가들과 학자들은 그러한 비합리적인 현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네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저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연구결과 인간이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믿고 싶지 않지만, 역사와 그리고 현재의 인간 사회를 볼 때 인간이란 존재는 충분히 그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밝혀낸 사람 중의 하나가 정신분석학자이고 사회사상가인 에릭 프롬입니다. 에릭 프롬은 ‘사람들이 불안과 좌절에 빠질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합리적인 방향으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대신 자아를 포기하고 절대적 권위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고 싶어 하는 속성도 있다고 말합니다. 에릭 프롬은 이를 가리켜서 ‘자유로부터의 도피’ 라는 표현을 씁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정말 그럴 것 같습니까? 인간에게 그렇게 소중한 자유, 인간에게 그렇게 소중하고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인 인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속성이 있다는 말이 믿어지십니까?

믿기지 않고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인간 역사를 보면 그것은 엄연한 사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과거 역사를 보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과거 역사뿐 아니라 상당히 인지가 발달된 현대사회에서도 우리 주위를 보면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 자신 속에서도 이것이 있습니다. 내가 그렇다고 믿고 싶지 않겠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부터 그렇습니다. 자유로부터, 당연하게 누려야할 권리로부터 도피하고 무언가에 기대고 휩쓸리고 끌려가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모릅니다. 늘 함께 부딪히고 함께 지내고 함께 나누는 인간임에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이것을 가리켜서 ‘나도 모르는 나’ 라는 표현을 해왔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것에 대해서 ‘과연 그런가? 인간이란 존재가 과연 그런 존재인가?’ 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자유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 권리를 행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편하게 휩쓸리기 원합니다. 내 의지, 내 의사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포기하고 끌리는 대로 따라가고 싶어 하는 일들을 봅니다. 그런 현상을 보면서 과연 저게 사실일까 아니면 혹 내가 한쪽 측만 보는 것은 아닌지 수없이 많이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모릅니다.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참으로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너나할 것 없이 다 그렇습니다. 가끔씩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난 자’라는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기왕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참 특별한 사람이다,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사람들로부터는 ‘난 자’라고 인정받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지고 계시는 귀하고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고 귀한 것을 받으려고, 좋은 선물을 받으려고 하고, 내가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을 응답받으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을 주실만한 사람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당연히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시는 일,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해야 할 것, 그것만 하면 됩니다.

다시 여러분 앞에서 하나님께 소원을 합니다. ‘하나님,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회중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하나님을 알고, 더 많이 알고 그래서 하나님 또한 여러분의 심정을 잘 아시고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말기에 그동안 근동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앗시리아를 제압한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합니다. 나라에 쓸 만한 사람들을 전부 다 포로로 끌고 가고 맙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다에 남는 사람은 좋지 않은 표현 그대로 한다면 ‘쓸 만하지 못한 사람들’만 남아 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들이 유다의 정권을 잡고 유다를 통치하게 됩니다. 경제학의 원칙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이런데도 적용됩니다. 쓸 만한 사람들이 다 끌려가고 나니 그러지 못한 사람들, 우스갯소리로 한다면 쓸 만하지 못한 사람들이 정권을 가지고 사람들을 통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쓸 만하지 못했다고 생각되었던 사람이라면 이런 기회에 쓸 만한 사람의 모습을 가지면 좋을 텐데 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던 모습을 그대로 보이게 됩니다. 오히려 더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는가 생각하면서 정말로 평화로, 겸손함으로, 사랑으로 민중들을 통치하면 될 텐데 그 반대였습니다. 이게 웬 떡인가 하면서 백성들을 압제하고 착취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권력자들과 가진 자들의 횡포로 말미암아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가진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되었고, 권력자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더 많은 치부를 했습니다. 양극화 현상이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중간 계층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도탄하고 신음하는 것을 보고 당시 하나님의 종들이 책망하였습니다. 그러자 정권을 잡고 있던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종들마저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습니다.

 

이 결과 이스라엘은 국가 말기적인 현상이 완연하게 나타났습니다. 나라가 정치적으로 타락하고, 도덕이 붕괴되고, 종교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순서가 거꾸로 입니다. 종교가 잘못 되면 나라가 잘못 됩니다. 종교가 타락하게 되면 세상이 타락하게 되고, 정치가들도 당연히 타락하게 됩니다. 종교가 타락한 이유는 기독교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한결같았습니다. 종교가 부흥하게 되면 이런 현상은 항상 당연하게 따라오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교회가 부흥하고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하겠지만 사실은 꼭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나라 전체가 엉망이었습니다.

 

본문 3절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 났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곳곳에 악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집에서 편안하게 잠자고 있는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 있으며,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이를 붙들어 어떻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 있습니까? 곳곳에서 싸웁니다. 정치인들은 정치인들끼리, 정당들은 정당끼리 싸웁니다. 대통령에 출마할 사람들을 대신하여 이 사람, 저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법관은 법관대로 다 타락하고 법조계는 법조계대로 타락하고 있습니다. 돈 없는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변호사를 제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당연하게 주장할 수 있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말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것은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믿고 싶지 않지만, 결과를 보면 법관들이 정말로 정의를 행하고 있는가, 재판관들이 의인을 의롭게 판단하고 있는가, 악인을 악인으로 심판하고 있는지 믿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 말기적인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말기적인 현상은 정신질환자들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경찰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나라가 썩어서 그렇습니다. 왜 나라가 썩습니까? 교회가 썩어서 그렇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해야 할 말을 하지 아니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하고 딴 것을 말하고 딴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제 일 원인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종 하박국이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정의가 잘못 되었습니다. 정의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이 나라가 속히 회복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한 후 기대를 가졌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면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박국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하박국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도 하박국과 같은 심정을 당한 경우가 있을 것이입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앞으로 그런 것을 경험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박국이 이해하지 못하는 첫 번째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못된 것을 뻔히 두 눈으로 보고 계실 것인데, 왜 가만히 계시는가, 더구나 하나님의 종들이, 백성들이 신음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한탄하고 탄식하고 있음에도 침묵하고 계시는가?’ 2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라고 안타깝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렇게 안타깝게 부르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곳곳에서 악한 자, 힘을 가진 사람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흉악한 사람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못된 짓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피눈물 흘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두 눈으로 봅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도와줄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힘이 없어서, 도와줄 힘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챙기느라 아무도 이들을 도와줄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런 때쯤이면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야 하는데 가만히 계십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한참 만에 응답하시기는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그 응답은 하박국의 기도 그리고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대되는 응답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기대하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무섭게 치셨지만, 잠시는 이런 불의를 보고 계셨지만, 잠시는 이런 악한 일들이 있기는 있었지만 치시고 난 뒤 위로해주시고 좋은 것을 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지만 그만큼 치셨으니 이제는 그만 치시고 용서하시고 회복해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응답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많이 맞았느냐? 정말로 힘드냐? 그런데 아직 멀었다. 한참 더 맞아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6절부터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6~10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깜짝 놀랄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우리가 이미 이만큼 당했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또 당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렇게 기다렸으니 이제는 좀 은혜를 베풀어주실 만도 한데 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는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좀 일어설 수 있도록 안 해주시는가? 이제는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법도 한데 아직까지도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지 아니하고 왜 도리어 점점 더 힘들게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더 맞아야하고, 더 깨져야하고, 더 터져야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도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때리고 이스라엘을 치고 이스라엘을 깨는 나라가 하필이면 왜 바벨론인가? 라는 것입니다. 6절에서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라고 말씀하시는데,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입니다. 이스라엘은 당해야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터져야 하고 깨져야합니다. 망해야합니다.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바벨론이냐?’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바벨론은 이스라엘보다 더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깨져야하지만 바벨론은 더 깨져야합니다. 터져야하는 이스라엘보다 더 터져야하고, 이스라엘이 망해야한다면 바벨론은 더 빨리 망해야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이 어떻게 잘 되고 강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힘들고 괴롭게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이, 악한 방법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더 잘 벌고 잘 살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인 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첫 번째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기대와는 달리 침묵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간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고, 아무리 하나님께 기도해도 하나님은 무응답으로 우리들에게 대답을 안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합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지금쯤 마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응답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고 넓은 뜻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그 큰 계획을 알지 못합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우리 예상과 기대와 다른 응답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기도가 반드시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기도이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 그대로 들어주신다면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생각과 많은 것을 궁리하고 난 뒤에 우리 기도와, 우리 바람과는 다른 응답을 하실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합니다.

 

세 번째 것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전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도대체 이런 것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인가를 생각할 정도의 방법으로 일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적어도 이것만은 안 된다는 방법을 들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들도 하나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저것으로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가 기도해도 엉뚱한 방향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했고, 이것이 당연하게 되어 질 일이라고생각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때로는 신앙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하고, 제대로 공부해야합니다. 엉뚱하게 배우면 우리 신앙이 잘못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일들이 있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이런 하나님인 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까지 그럴 수 있는가를 생각하겠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3절에서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라고 하나님의 종 하박국이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종도 잘못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하박국은 조금만 있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런 위로를 사람들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위로도 좋지만 그러나 그 위로는 하나님이 주신 위로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하박국까지도 이런 실패를 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종들이 그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5절 ‘여호와께서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이 말씀을 전할 때 믿고 ‘아멘’ 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왕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다면 절대적으로 잘못된 일만 아니라면 하나님의 종이 전하는 말슴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이 신앙을 가지기 바랍니다.

현대 신앙에 있어서 이런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배운 바로는, 내가 경험한 바로는 이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종의 말을 쪼개어 받아들일 것만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취사선택의 믿음, 하나님 종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다보니 신앙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들을 교훈하기 위해서 가끔씩 세상 사람들을 더 잘되게 하시기도 합니다. 더 성공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들보다 더 위에 서게도 하시고 더 앞장서게도 하십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은 내가 잘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내가 잘나서 성공하고 더 많은 돈을 모았고 더 높은 곳에 섰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신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 보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정말 잘못 알고 있는 것은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셨고, 때가 되어 하나님 뜻을 이루고 나면 그 사람들을 아무 쓸모없는 막대기처럼 부러뜨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목적 때문에 그들을 잠시 성공하게 하고 잠시 앞서나가게 하셨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교만할 때 어느 순간 하나님 뜻이 다 이루어지고 나면 여지없이 부러뜨린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또 성경에서 하시는 말씀을 통해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는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믿는 사람들 세계뿐만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세계까지도 전부 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 뜻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이 세상은 우연은 없습니다. 어쩌다 저 사람이 잘 된 것은 없습니다. 어쩌다 잘못된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뜻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하나님이 마음대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믿으십시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역사의 주인,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 가정의 주인, 여러분의 회사의 주인, 이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다시 믿으십시다.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너무도 사랑하십니다.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심지어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칠 때에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시겠는가?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는가? 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지 아니한가? 생각하십시다.

하나님을 볼 것이 아니라 나를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잘못 했고, 어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 보아야합니다. 가야할 길을 가지 아니하고, 내가 설 자리에 서지 않았는지 이것을 보아야합니다. 다시 확인할 것은 하나님은 너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치시고 그 결과 우리가 너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답답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십시다.

 

세 번째는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버리지 말고 갖도록 하십시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너무 속상하고 고통이 길어지고 하나님께서 더 힘들게 때리시는 것 같아도 그러나 소망은 버리지 말도록 하십시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해주십니다. 때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그 때는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돌아와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그런 모습을 가질 때 하나님은 분연히 일어서셔서 악한 자들을 물리치십니다. 여러분이 선할 때, 여러분이 바른 길을 갈 때, 바른 자리에 섰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올리시고 한없이 귀하다, 한없이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잘 아시고 서야할 자리에 서십시다. 가야할 자리에 가고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십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