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더 나은 본향(히브리서 11:8~16)

분당소망교회 2012. 10. 30. 15:18

 

더 나은 본향

 

히브리서 11:8~16 ================

 

저는 그렇게 좋아하던 노래를 몇 년 전에 어쩌다 끊게 되어 노래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참으로 오랜만에 노래를 했습니다. 아내가 잠깐 외출한 사이에 혼자서 제법 소리를 내어서 한 30분 이상 노래한 것 같습니다. 그때 제가 한 노래를 한 번 짚어보았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채동선>의 <망향>을 불렀고, <봄이 오면> 이라는 노래는 같은 시로 이홍렬씨와 김동진씨가 작곡했는데 둘 다 불렀습니다. 또 <옛동산에 올라>라는 노래도 불렀는데,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면 자꾸 이런 노래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태리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도 불렀고, 이태리 가요도 한 곡 불렀습니다. 제가 부른 이태리 가요는 <비련> 즉 슬픈 사랑이라는 노래로 번역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가수 조영남씨는 <내 생애 단 한번> 이라는 제목으로 불렀습니다. 또 소월의 시를 빠뜨릴 수 없어서 <옛 이야기>도 불렀고, 제가 아주 좋아하고 너무나 아끼기 때문에 오히려 잘 부르지 않던 홍난파의 <가고파>도 오랜만에 불렀습니다.

 

그러다 한동안 하지 않았던 창을 한 곡 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하고 말았다는 표현을 하는 까닭은 이 노래를 하면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기 때문입니다. 금년 명절은 저에게는 아주 특별한 명절이라 그런지 저도 모르게 이 창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 창을 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데는 특별한 까닭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대학입학 시험이 다 끝났을 때였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라 가려고 했던 학교를 포기하고 우여곡절 끝에 당시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제가 워낙 지방 한 구석에 있었던 터라 사실 그런 학교가 있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대학을 가기로 결정한 뒤라 상당히 착찹하고 쓸쓸했습니다. 저녁 무렵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 아버님이 계셨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대학 문제 때문에 제게 너무나 미안해하셔서 마침 제가 선택한 학과는 다음에 한 번 더 기회가 있는 학과이기 때문에 그때 가서 다시 하면 되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난 뒤, 두 분 앞에서 노래를 하나 하겠다고 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노래한 것이 두 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부모님이 다 계신 곳에서 노래했고, 또 한 번은 어머니만 계신 곳에서 노래를 했습니다. 그때 부른 노래가 <한오백년> 이었습니다. 부모님께 불러드릴 곡으로는 제일 좋은 노래라고 생각하고 불렀습니다.

 

뒷동산 후원에 단을 쌓고

우리 부모님 만수무강을 빌어보세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한 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환가

 

지금은 이렇게 얌전하게 불렀지만 그때는 정말로 어머님, 아버님이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시라는 심정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불렀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거기서 그쳐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2절까지 부르는 실수를 했습니다.

‘꽃같은 내 청춘 홀로 늙고 남은 반생을 어느 곳에 다 뜻 붙일꼬’

부모님 앞에서 부를만한 예쁜 노래는 아닙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아버님은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님은 홀로 한 30년을 사시다가 15년 전, 우리 교회가 창립한 그 해 우리교회가 창립한 것을 다 보시고 교회 구경도 하시고 난 한 일주일 쯤 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이후에 저는 이 노래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님 살아계시는 동안 저는 고향에 부지런히 갔습니다. 아무리 길이 밀려도 갔습니다. 오늘도 시시로 뉴스를 보니 2부 바로 앞의 예배를 끝나고 난 뒤에야 고속도로 정체가 조금 풀리기 시작한다고 하는데, 요즘은 길도 많이 생겨나고 길이 좋아졌지만 그때는 고향에 가게 되면 보통 12시간이 걸렸고 제일 적게 걸리는 시간이 열 시간이었습니다. 제일 많이 운전했을 때는 22시간까지 운전했습니다. 그래도 갔습니다. 어머니가 오지마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딱 한 번 가지 않는 실수를 한 것 빼고는 계속해서 갔습니다. 노인네가 어떤 말씀을 하셔도 그건 진심이 아니었는데 실수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잘 가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고향은 고향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살던 고향집은 재개발로 완전히 다 없어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수없이 들어서서 제가 살던 집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렸을 때 멱을 감았던 하천을 보고서도 제 고향이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재개발 이후에는 더 이상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대신 부모님을 모신 산소는 빠뜨리지 않고 갑니다. 일 년에 두 차례 가는데 가봐야 무엇하겠습니까? 그냥 꽃 한 다발 들고 가서 한참 있다 그냥 돌아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빠지지 않습니다. 가기만 하면 왠지 마음이 편합니다. 그냥 무덤이고 산소도 꾸미지 않아 소박한 무덤일 뿐입니다만 왜 그렇게 마음이 편한지 모릅니다. 아마도 이제는 부모님 모신 산소가 제 고향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을 뵙고 산소를 돌면서 풀도 뜯고 그냥 돌아오는 것밖에 없지만 다녀오면 마음에 무언가 쌓이고 걸렸던 것이 다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고향마저도 얼마 있지 않으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곳이 될 것 같고 더 이상 제대로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고 이런 일 저런 일이 있다 보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은 저에게는 영원한 고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도 계시고 아버지도 계시고 저보다 먼저 죽은 제 동생도 보고, 형님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먼저 가신 우리 교우들도 많이 볼 것입니다. 먼저 가신 사랑하는 권사님, 제가 사랑하던 전도사님, 얼마 전에 가신 우리 장로님도 가서 뵐 것입니다. 그곳에서 장로님은 걸음걸이도 불편함이 없을 것이고 말씀도 잘 하실 것입니다. 거기는 쓸쓸하지 않습니다. 무덤도 없고 힘든 것도 없고 섭섭한 것도 서러운 것도 없습니다. 반갑고 너무 좋기만 한 사람들, 나쁜 기억은 없고 좋은 기억만 남아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주 반갑게 저를 기다려주는 고향, 그 고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말하는 본향이 바로 그것입니다. 16절에서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본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바벨론입니다. 그곳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한대로 왔습니다. 그렇게 온 곳이 가나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고 마지막 종착역이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마지막 종착역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이었지만 그곳을 완전한 정착지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고 타향으로 생각했고 곧 떠나야할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본문 9절에서는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약속의 땅에 다 도착했고 완전히 다 이루었지만 그러나 이방의 땅에 있는 것같이 생각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9절 마지막에는 ‘장막에 거하였더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나누어서 한 번 생각해보면 이방의 땅에 사는 것 같이 살았다는 말은 그 동네에, 그 마을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살고 있는 그 땅을 자기의 완전한 집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는 여전히 나그네, 떠돌이라는 심정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내가 떠나야할 것이라는 심정으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장막에 살았다는 말은 그곳이 텐트이든지, 콘크리트 집이든지, 흙벽돌집이든지 어떤 집이든지 관계없이 그 집은 내가 오래 살 집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곧 떠날 임시집이라는 의미가 장막에 살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로 옮겨온 지 이제 6~7년 되었습니다. 이전 교회인 창고교회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그 교회를 지을 때 속으로 한 5년 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년만 있다 새로 짓든지, 다른 데 이사를 가든지 또는 다른 방도를 취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을 지을 때, 예배당 짓는 기한을 6개월로 잡았습니다. 보통 2년 내지 3년은 잡아야합니다. 이 예배당을 짓는 데도 7년 걸렸습니다. 우리가 지은 것이 아니라 이전에 소유하던 교회에서 7년 동안 지은 것이 이 교회입니다. 2년 동안 다른 문제로 잠깐 쉰 것을 생각하면 실제로 5년 동안 이 예배당을 지었는데 우리는 6개월 동안 지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5개월 만에 다 지었습니다. 곧 떠날 집이고 잠시만 예배드릴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혹한기 훈련’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주 추울 때 하는 훈련으로, 날짜를 정해놓고도 날씨가 풀리면 그 훈련은 하지 않습니다. 훈련 때는 매일 열 두 시간 혹은 열 시간씩 걸어야 합니다. 눈이 무지하게 쏟아졌던 어느 혹한기 훈련 때 도착한 시간이 밤 2시였습니다. 텐트를 쳐야하는데 문제는 다음 날 출발이 4시라는 것입니다. 2시간 동안 자기 위해서 텐트를 치는 것입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텐트를 쳐야하는데 자기 텐트를 자기가 치는 것이 아닙니다. 배낭을 메고 다닐 때 매는 텐트는 반인용이라 두 사람이 어울려야 텐트 하나가 됩니다. 새벽 2시에 두 사람이 어울려서 텐트를 치고 또 4시에 기상하면 텐트를 뜯어야 합니다. 네 사람이 작당했습니다. 네 사람 다 텐트를 꺼내서 포갠 후 배낭만 벗어놓고 옷도 안 벗고 구두를 벗지 않으면 동상에 걸리기 때문에 꼭 벗어야 하는데도 구두도 벗지 않고 텐트 두 장 사이에서 네 명이 들어가서 잤습니다. 구두 벗을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1분이라도 더 자고 다음날 빨리 출발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 텐트는 임시 잠자리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은 내가 너에게 주는 약속의 땅이라고 말씀하신 그 가나안에 도착해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아들도 낳고 딸도 낳고 손자 손녀도 보았지만 임시라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에게는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물론 한참 걸리겠지만 친지들이 있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곳에 가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5절에서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자기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생각했다면 돌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진짜 고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여기서 오래 살고 터를 잡았지만 진짜 가야할 고향이 따로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 더 갈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고, 16절에는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다웠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고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한테는 고향이 따로 있다, 영원한 고향,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고향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가운데 계시고 성자 하나님이 오른쪽에 계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계시는 것처럼, 어머니가 계시는 것처럼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참된 고향은 바로 거기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아버지, 영원한 어머니 우리 하나님,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 그곳이 진정한 고향이다, 그것을 사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을 쳐다보라, 그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디를 사모해야하는가? 고향도 좋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부모님들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늘 사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제가 옛날 어머님이 계실 때, 그렇게 힘들게 고향에 가면 형님에게 인사를 한 후 곧바로 들어가는 곳이 어머니 방입니다. 어머니 방에서 제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냥 눕습니다. 10시간 이상이나 운전하고 왔으니 피곤하여 눕자마자 그냥 잡니다. 우리 어머님은 이 못난 아들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자다 깜빡 눈을 떠보면 어머님은 그냥 앉아서 저를 쳐다보고 계셨고, 어쩌다 또 보면 손을 잡고 계셨습니다. 아들을 너무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한 번은 오지마라고 해서 안 갔는데 당신이 오지마라 하셨지만 집밖에서 밤늦게까지 혹시라도 올까 해서 기다리던 어머니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들, 당신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16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간혹 부모의 애를 먹이는 자식들이 있습니다. 좀 심하게 애를 먹이는 자식들은 아무리 부모라도 부담스럽고 때로는 밉기도 합니다. 정도가 있어야지 너무 심하면 어떤 아버지는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너는 이제 내 자식이 아니니 그냥 나가서 살라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자식이 찾아오면 또 속 뒤집어놓는 어떤 소리를 할까하여 걱정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반면에 반대의 자식들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이런 반대의 자녀들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자식 때문에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잘 길러야합니다. 아버지라 부르기만 하면 너무나 좋고 전화만 와도 반가운 자식이 있습니다. 찾아오면 더 좋습니다. 혹시라도 무엇을 의논하려고 하면 무엇이라도 좀 해주고 싶은 자식이 있지 않습니까?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그런 자식이 되시고, 여러분의 자식을 그런 자식으로 키우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행복입니다.

 

하나님께도 그런 자식이 있습니다. 물론 당신의 자식들은 다 좋아하십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그러나 자식이라고 다 똑같은 자식이 아닙니다. 더 예쁜 자식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 자식이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좋아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부르면 벌떡 일어나서 ‘내가 무엇을 할까, 무엇을 도와줄까’ 생각하는 그런 자식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을 불러도 대답도 하기 싫고 쳐다보기도 싫은 자식이 되면 하나님도 좋지 않으시고 여러분도 좋지 않습니다. 부르기만 하면 곧바로 응답하시는 그런 자식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 하나님의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은혜를 주십니다. 예배당에 그저 왔다가 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대답하시고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아니하시고 자랑스럽고 기쁘게 여기시는 자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은혜를 주십니다. 아무리 좋아도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좋고 좋은 일이 많고 좋은 사람이 많아도 늘 본향을 사모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계시는 곳, 어머님이 계시는 곳을 사모하시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두 번째는 16절 마지막에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성일까요? 이걸 알아야 우리가 더 사모하게 됩니다. 눈으로 다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21:2-4)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만 믿으면 누구든지 이 성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저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무언가 좀 다를 것이라고 느낍니다. 똑같은 천국이 아닙니다. 무언가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사랑하지만 무언가 다른 자식이 있습니다. 더 예쁜 자식이 있습니다. 오면 더 반가운 자식이 있고 무어라도 더 해주고 싶은 자식이 있습니다.

 

조금 더 지나서 21장 18절부터 보겠습니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로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계21:18-20)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들어갈 성의 모습으로 전부 다 비유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성이 하나님의 자녀인 기독교인들에게 준비되어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중에서도 더 나은 그리고 더 특별한 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성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거기다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가 본향을 사모하게 되면 어떤 것이 정말로 좋을까요?

여러분을 제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정말로 어렵게 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어려운 환경이 아닙니다. 욕심 때문에 힘듭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아프게 한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수식어가 있습니다.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수식어입니다. 사랑해도 좋습니다. 사모해도 좋습니다. 너무 사랑할 것은 아닙니다. ‘가장’은 하나님께만 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사람도 사랑하고 일도 사랑하십시오. 다른 어떤 것도 사랑하십시오. 그런데 ‘가장’은 하나님께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여러분들이 덜 힘듭니다. 너무 사랑하게 되면 너무 힘듭니다. 정말로 애타게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께만 하십시오. 너무 애타게, 너무 절박하게 사모하고 소원하는 것들이 여러분들을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께만, 본향에만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하나님도 좋으시고 하나님도 여러분을 좋아하시고 여러분이 이 땅에 살면서도 좋습니다. 그것이 행복이고 평안입니다. 일이 다 풀린다고, 넉넉하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대강 하십시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본향을 사모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여러분에게 ‘최고’를 선사할 것입니다.

 

명절입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좋은 사람 많이 만나시고 좋은 일로 잘 지내십시오. 그러나 꼭 하나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할 것은 본향 없는 사람처럼 살지 마십시오. 사람을 만나거나 무슨 일을 할 때나 나는 본향이 따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마음이 참 편안합니다. 행복합니다. 하나님도 행복하시고 여러분도 행복하고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행복합니다. 참된 행복은 바로 이런데서 나옵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본향을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방법으로 여러분들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이미 그런 사람들은 이 땅에서 복을 받습니다. 평화와 평안의 복을 받습니다. 이런 명절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