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마태복음 6:5~8
서양 속담에 ‘고난은 맞서서 이기고 죄는 피해서 이기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 옳은 말입니다.
고난은 피하면 다른 데서 또 찾아옵니다. 무서워 피하면 그보다 더 힘들고 더 고통스러운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죄에 대해서는 자신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죄 앞에서 자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맞서서 싸워서 이기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죄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야말로 죄의 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담의 말처럼 죄는 피해서 이기라는 말이 옳습니다.
그런데 죄가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어느 정도 이길 수 있겠지만 하나의 성향이고 마음의 상태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죄가 이미 우리 마음의 일부분이 되어있고, 우리 인격의 일부분이 되었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죄가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 죄만 따로 떼어서 뽑아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죄에 대해서 절규합니다. 사도 바울의 절규를 볼 때 꼭 생각할 것은 바울 사도는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도를 통한 뛰어난 성인이고 성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그가 그런 절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고 스스로 이길 수 없었으면 죄에 대해서 그렇게 절규하고 있을까요? 로마서 7장 15절~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알지 못하게 악을 행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내 속에 있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죄더라는 고백입니다. 이어서 그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죄는 우리의 전인격을 얼마나 오염시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이미 오염되었는지 아직 오염되지 않았는지 그것조차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죄와 싸울 태세를 갖추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우리가 아주 경건한 시간에도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태로 어디로 다가올 것인지 예의주시하면서 그것을 피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합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이 시간만큼은 성령님께서 충만히 우리 곁에 임하실 것이므로 죄가 덤벼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노립니다. 여러분이 무릎 꿇고 기도하는 그 시간을 오히려 더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회개하는 그때만큼은 죄가 다가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 순간도 죄가 노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가 신자들을 공격하기 제일 좋아하는 때가 언제인지 아는 것은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죄는 절대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 천 년 동안 인류를 보아 오면서 그 시간에 공격하게 되면 신자들은 여지없이 무너진다는 것을 죄는 알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죄에게 패배하기 쉬운 때 즉 죄가 가장 좋아하는 때가 언제인 것 같습니까? 성경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공격하기 가장 어려운 분이라는 것을 죄도 알고 사탄도 압니다. 죄가 위대하신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은 죄에게도 사탄에게도 두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에서 딱 한 번 공격한 때가 있었습니다. 40일간 금식기도 하고 난 후였습니다. 그 시간만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꼼짝없이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덤벼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사십 일간 금식기도를 끝냈습니다. 얼마나 큰 일이며 위대한 일입니까? 일주일만 금식하고 나서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사십일 금식기도하고 나면 무언가 얻은 것 같고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스스로 대단한 일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대견하다고 생각하고 게실 것 같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습니다.
사탄이 (사람을) 공격하는 인간 최대의 취약점은 자긍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순간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을 노립니다. 속지 마십시오. 나로서는 상당히 기분이 좋은 시간이지만 사탄은 그 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이 큰 일을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을 사탄은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이것을 종교적인 말로 표현하면 ‘자기 경배’이고 ‘자기 예배’입니다. 죄는 늘 그것을 우리에게 부추깁니다. 여러분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되도록 하고 여러분 스스로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도록 자꾸 부추깁니다. 여기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일을 한 대단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야말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부추깁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기도는 귀한 일이지만 사탄에게 하나의 기회를 주는 것이 됩니다.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과 교통하기 때문에 사탄이 달려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십 일간 금식기도 하고 난 그 때 달려들었습니다. 40일간 금식기도 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기도의 여운이 계속 되는데 그 순간에 달려들게 됩니다. 특별히 경건한 기도를 하는 사람, 열심이 있는 기도를 하는 사람, 혹은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람들이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사람이 사탄의 중요한 대상이고 그런 때가 사탄이 덤벼들기 제일 좋은 때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잔치하면 사탄도 잔치를 합니다. 마귀도 잔치를 합니다. 그들에게도 좋은 때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덜하지만 옛날에 잔치를 하게 되면 옛날 표현 그대로 하여 ‘거지’들이 많이 왔습니다. 어느 집에 잔치를 하면 거지들이 서로 연락하여 잔칫집에 모여 와서 하루 종일 있습니다. 그때는 뒤뜰 같은 곳에 거지들을 대접 하는 장소를 아예 따로 마련하였고, 걸인들에게 대접하는 상도 따로 마련하여 대접하였습니다. 마귀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잔치하게 되면 자기네들도 덤벼들어 잔치판을 벌입니다.
기도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고 귀한 것이지만 기도에는 참된 기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기도 중에 참된 기도,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가 아니라 나만의 이야기 일뿐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기도가 많습니다. 그런 ‘거짓 기도’는 자기에게 집중하는 기도입니다. 거짓 기도는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자기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서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눅18:10-11)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로 서서’ 기도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이 볼만한 곳에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덜 그런 것 같은데 요즘도 차량 안내하시는 분들 중 사람들이 잘 보이는 목 좋은 곳을 골라서 안내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똑같았습니다. 기도할 때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잘 보는 괜찮은 자리에서 하는가를 생각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만 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만 있습니다.
기도 내용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눅18:11-12) 바리새인은 전부 다 잘 하고 있다는 자기자랑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선다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 같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했어도 적게 한 것밖에 없습니다. 부모님께 정말로 효도한 사람은 효도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효도를 제대로 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부모님께 이것도 해드렸고 저것도 해드렸다고 말하고, 남편에게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가 남편에게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자식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것이 없습니다. 꼭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바리새인에게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자기만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집중합니다.
이어지는 13절에서 말씀하시는 세리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눅18:13) 세리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멀리 섰습니다. ‘나는 예배당에 나오기도 부끄럽고 성전에 와서 예배드리기도 부끄럽지만 하나님은 꼭 뵈어야하겠다’고 성전에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은 무어라고 하든 간에 어떤 욕을 먹든 간에 하나님을 뵙고 가야겠다는 그런 심정으로 나왔습니다. 세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만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세리는 죄를 많이 지었지만 ‘하나님 있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내용도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들으면 저 세리는 다른 세리보다 더 많은 죄를 지었거나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식했습니다. 그야말로 혼자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스스로 기도를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기도를 부탁하면 사양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기도를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정말로 기도를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 주변에 기도를 잘 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잘하는 기도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못하는 기도가 잘하는 기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만다라>라는 불교소설에 스님 한 분이 나오시는데 참 엉망입니다. 이 스님은 보통 사람도 하지 않을 일들만 골라서 하여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습니다. 스님들 가운데서도 그 사람은 스님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실제 이 소설을 쓴 작가 김성동씨도 이 소설을 쓰고 난 후 그런 이야기를 썼다는 이유로 불교계에서 파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무렵에 이 스님은 술 한 잔 마시러 내려갔다 밤이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동료 스님은 그 스님이 술에 취해 정신을 잃어버려서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날 동료 스님이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이상한 눈덩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여느 눈덩이와 좀 달라 열어보니 지난밤에 대포 마시러 간다고 한 그 스님이 죽어있습니다. 그런데 죽어있는 그 모습이 평소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경건한 모습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죽어있었습니다. 저는 그 소설에 나오는 스님 생각이 자주 납니다. 술 마시고 나쁜 짓하는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죽을 때 그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비쳤든지 간에 이 스님의 마음속에는 신을 향한 마음이 있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대화를 할 때의 말씨는 아름다운 말씨가 아닙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말씨입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녀와서 어머니에게 이야기할 때 아이의 말에는 논리가 없고 조리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했다 저 이야기했다 합니다. 이런 말씨가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런 말은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내 어머니가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기도는 다른 사람이 나를 기억하고 내 기도를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으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없는 기도는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씨일 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전제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기도가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5)라고 말씀합니다. ‘정말로 말하는데 그 사람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참 딱한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조금 칭찬받는 것, 그것으로 기도결과가 끝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안 된 일입니까?
요즘 어부들이 참 힘들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최근에 도다리가 풍어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 도다리와 광어를 구별하지 못하지만 어부들이 고기잡이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것을 보았는데 물고기들이 계속해서 올라옵니다. 추운 바다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으면 그처럼 건져내어야하는데 그물을 던졌는데도 조그마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다면 얼마나 안 된 일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기도는 그런 물고기 한 마리만 잡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씀입니다.
7절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한 말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하는 것을 중언부언이라고 합니다. 기도를 못하는 사람이 되풀이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7절에서 또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중언부언하는 이유는 ‘나는 기도를 오래 하는 사람이다,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다, 잘 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나 스스로도 인식하고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므로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 그런 기도는 나하고는 관계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려면 바른 기도, 참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길든지 짧든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기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기도를 함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기도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것임을 아는 것이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기도란 내가 하나님과 만나는 일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다른 것은 의식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만 집중합니다. 이것을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해야합니다. 장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걸어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38편에서는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119편에도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간구하였사오니’ 이처럼 ‘전심으로’ 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본질 중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과만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기도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8절에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해야합니다.
가끔 기도할 때 하나님께 자기의 상황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차트를 그려서 프리젠테이션 하듯 하는데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무엇을 설명합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모르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프리젠테이션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 까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니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기도는 이방인들 즉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눅12:6) 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이천 원이라면 한 마리에 400원 정도라는 것인데 그 400원짜리도 하나도 모르시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12:7)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무엇이 필요한지, 내 맘속에 무엇이 있는지 전부 다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3:20-21)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에 대해서 두 번째 알 것은 하나님께서는 나의 필요, 나에게 꼭 있어야할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기도입니다.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저’ 믿는 것입니다.
미국 중서부에 가뭄이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그 마을에 비가 더 오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문제가 심각해지자 교회에서 대대적인 기도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교인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 전부 모이라고 연락했습니다.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서 기도회를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맨 앞에 열 살 쯤 되는 아이가 빨간 우산을 들고 왔습니다. 이 아이는 우산을 들고 아주 기쁜 듯이 웃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표정은 비가 오지 않아 어두웠지만 이 아이만 달랐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했으니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고 우산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호흡과 같습니다. 꼭 먹어야하는 식사와 같습니다. 호흡을 하는 것도 식사를 하는 것도 바르게 할 때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가 무엇인지 알고 기도할 때, 바르게 기도할 때 우리 기도는 언제나 기도 본래의 기도가 될 수 있고 하나님과 바른 교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기도가 얼마나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는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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