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이사야 41:8~16
지난 연말 대기업 회장으로 일하던 친구가 일을 그만두면서 퇴임 인사말을 보내왔습니다. 퇴임 인사말과 함께 작은 시집 한 권을 보내왔는데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집이었습니다. 친구는 인사말 속에 시집 속의 시 한수를 언급했습니다. 시집 이름과 시 이름이 같은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였습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절친했던 친구였지만 너무 오래 보지 못한 친구가 보낸 시라 특별히 그 시가 가슴에 더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가슴에 다가오는 것이 많았고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을 뛰어넘는 시 같았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동쪽의 페르시아가 초강대국으로 부상합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이집트가 바벨론과 동맹을 합니다. 페르시아를 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계 역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요즘도 중국에 대응하여 일본과 미국 또 호주가 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는 바벨론과 동맹을 하고 군사력을 강화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페르시아를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습니다. 군사력만으로는 모자랄 것 같아 신에게 의지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기왕의 신상을 더 거대하고 화려하게 꾸밉니다. 마침내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와 바벨론 동맹국은 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페르시아에게 무참하게 패배당하고 맙니다. 이로써 페르시아는 당시 근동지역에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이집트가, 그렇게 강대한 바벨론이 저렇게 힘없이 당했다면 우리 이스라엘 정도야 페르시아에게 한 주먹거리나 되겠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숱한 나라들의 수많은 침략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늘 이집트를 상전으로 모시고 조공을 바쳐야했고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남 유다도 망할 뻔했습니다. 앗수르의 공격을 겨우 견뎌내었더니 그 다음에는 바벨론이 일어나서 침공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침공에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에게 망할 때 나라의 쓸 만한 사람들은 전부다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이러던 차에 바벨론이 힘이 좀 약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혹 기회가 오지 않나 하고 기대를 했지만 바벨론보다, 이집트보다 훨씬 더 강한 페르시아가 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큰 실망과 절망과 좌절에 휩싸이게 됩니다. 지금도 죽을 맛인데 장차 이 일을 어떻게 할지 걱정이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 오늘 본문 41장입니다. 주 내용은 이렇습니다.
‘페르시아가 참 대단하다, 여러분들이 보기에도 페르시아가 대단하지? 그런데 그 페르시아를 누가 일으켜 세웠는가? 누가 페르시아를 그렇게 대단하게 만들었는가? 페르시아가 본래 그렇게 대단한 나라였던가? 저절로 그렇게 대단하고 강력한 나라가 된 것 같으냐? 천만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내가 페르시아를 그렇게 강력하게 만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32장 39절에서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라고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저 대단하던 이집트를 낮추고 바벨론을 낮추고 아무것도 아닌 페르시아를 저렇게 강대하게 만든 것이 누구냐? 바로 내가 아니냐? 그 내가 누구냐? 너희 아버지가 아니냐? 너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니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렇게 했다. 너희 이스라엘이 저 멀리 있을 때 불러낸 것 그리고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했을 때 불러 낸 것이 누구냐? 바로 내가 아니냐? 그렇게 멀리 있던 너희 이스라엘을 불러내고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너희를 불러낸 내가 너희를 내버려 둘 것 같으냐? 여러분들이 죄를 짓고 나에게 불순종하고 못된 행실을 했기 때문에 잠시 내가 내버려두어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당하긴 했지만 내가 끝까지 그냥 내버려 두겠는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동안 그렇게 고통을 당한 것은 내가 가만히 있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죄 때문에, 여러분의 불순종 때문이었을 뿐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잘못 했어도, 아무리 불순종했어도,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계속해서 그냥 당하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겠느냐? 그렇지는 않다, 너희들은 내 아들이고 내 딸이 아니냐,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을 지켜주겠다, 내가 붙들어주겠다. 도와주겠다, 지금까지 너희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던 모든 자들을 내가 꺼꾸러뜨려 다시는 너희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영화 <쇼생크탈출>을 참 좋아합니다. 일부러 찾아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가다 <쇼생크탈출>이 나오기만 하면 중간이라도 봅니다. 제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는 마지막 장면 때문입니다.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던 주인공은 감옥에서 탈출해서 악랄한 교도소장으로부터 빼돌린 돈으로 멀리 멕시코에서 평화롭게 삽니다. 바닷물이 출렁출렁하고 그 옆에서 배를 수리하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아마 열대여섯 번은 본 것 같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 감옥에 있을 때 죄수들을 아주 악랄하게 괴롭히던 정말로 못된 간수가 있습니다. 덩치도 아주 좋고 힘도 좋습니다. 죄수를 때려서 장애인으로 만드는데 얼마나 때렸는지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악랄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죄수들을 여럿 죽이는데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죽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무렵에 이 간수장이 죄수들을 살인한 것이 밝혀져서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갑니다. 간수장이 끌려가는 광경을 목격한 죄수들이 모여서 통쾌하게 웃으면서 말합니다, ‘그 간수장 말이야 끌려갈 때 여자애처럼 질질 울면서 끌려가는데 얼마나 가관이었는지..’ 죄수들을 그렇게 괴롭히던 그 간수장은 더 이상 죄수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되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기가 죄수가 되어서 도리어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11-12절) 또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들을 날리겠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15-16절) 지금까지는 힘없게 살고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았지만 이제는 마음껏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한탄했지만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에 태어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자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라고 부르십니다. 다른 성경에는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번역되어있습니다. 표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소리를 듣게 된다면 별로 기분이 유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나님께서 하셨을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버러지 혹은 지렁이라고 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네들을 향하여 한 말입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고 아픔이 오래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네들을 마치 지렁이 보듯이, 버러지 보듯이 내버려둔다고 생각한 이 말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 중에 ‘발가락 사이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여성분들을 참 어려웠습니다. 남정네들 가운데는 바깥에서 온갖 못된 짓을 다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본처를 괴롭히면서 사람 취급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 어머니들이 나중 세월이 많이 지나간 후에 자식들에게 너희 아버지가 나를 발가락 사이 때만큼 여기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께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챙겨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게 당하고 앗수르에게 당하고 기어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고 돌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생각하고 ‘버러지 같은 우리, 지렁이 같은 우리’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경제 문제, 오래 가면 힘듭니다. 참 고통스럽습니다. 정말로 어렵습니다. 가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 문제로 힘든 사람은 차라리 내가 돈이 없어서 경제 문제로 힘든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병으로 고통당할 때 이런 약을 쓰고 저 병원에 가도 도무지 낫지 않을 때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너무 힘들게 되면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하지 않으신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챙겨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너희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잠시는 그냥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리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당해야 정신 차리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만 내가 너희들을 떠날 리가 없다, 내가 너희들을 버러지처럼 생각할 리가 없다, 나는 항상 내 자리에 그냥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너희들이 내가 멀리 있는 것처럼, 내가 너희들을 쳐다보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까닭은 내가 여러분들을 버렸고 내가 여러분들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나를 멀리 떠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교회에서 사택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도사 2년 동안 출퇴근을 했습니다. 제가 살던 집은 고덕이었고 다니는 교회는 대치동이었기 때문에 한 시간정도 걸렸습니다. 전도사 하는 동안 거의 새벽예배를 인도했는데 다섯 시에 새벽 예배를 인도하려면 적어도 세시 반에는 집에서 출발해야하므로 세시쯤에 일어나서 준비해야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돌아오는 것은 8시나 9시면 빠른 시간이었고, 금요일에는 1시나 1시 반되어서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늘 비몽사몽간이었습니다. 이러다 사고가 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길동을 지나면서 빨간 신호등이라 가만히 서 있는데 뒤차가 와서 제 차를 박았습니다. 뒷 차 운전사가 졸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상등을 켜고 길가에 세워 차에서 내리자 말자 ‘어떻게 운전을 그렇게 하셨습니까?’ 라고 좋은 말로 하고 있는데 옆에 지나가던 차가 창문을 열면서 뒤차가 제 차를 박은 것이 아니라 제 차가 뒤로 후진해서 박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제가 졸아서 브레이크가 풀린 바람에 뒤로 밀려서 뒤차를 박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잘못하고도 다른 사람이 잘못 한 것처럼 야단을 쳤으니 그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웠습니다. 이후로는 신호등 앞에 서면 브레이크를 단단히 밟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자기네들이 떠나고도, 자기네들이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자기네들을 쳐다보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스라엘에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잠시도 너희들을 떠난 적이 없다, 너희들이 왜 버러지이고 왜 지렁이냐? 나는 한 번도 너희들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너희들은 나를 잊었을지라도, 너희들은 졸고 잤을지라도 나는 졸지도 아니하고 자지도 아니하고 항상 그 자리에서 너희들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지 않는지 늘 쳐다보고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오늘 본문 8절에서 10절입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의 이야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박인환의 나이 서른한 살 때였습니다. 그 해가 박인환이 죽은 해였는데 몇 몇 사람이 모였을 때였습니다. 시인도 모였고 음악 하는 사람, 가수도 모였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던 가수에게 노래하나 하라고 했습니다. 그 가수가 그날은 기분이 좋지 별로 않아서인지 오늘은 할 노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음악 하던 분이 박인환에게 시를 하나 쓰면 자기가 곡을 붙여주겠다고 합니다. 박인환은 시 하나를 그 자리에서 썼습니다. 아마 평소 늘 생각하고 있던 시였던 것 같습니다. 그 시가 <세월이 가면>입니다. 음악가는 그 자리에서 곡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그 좋은 노래 <세월이 가면>이 탄생했습니다. 이 시는 남녀 간의 사랑으로 끝나는 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더 깊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내 자식, 여러분들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혹 잘못하고 나를 떠나고 나에게 못된 행실을 보여주어도 나는 여러분들을 떠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너희들을 버리지 않는다, 너희들을 절대 잊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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