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시편 133:1~3)

분당소망교회 2013. 4. 23. 13:50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시편 133:1~3

찬송가 305장은 참 아름다운 곡입니다. 봄이 되면 모든 교회가 이 노래를 합니다. 단란하고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생각할 때마다 이 곡을 많이 생각합니다.
‘사철에 봄바람이 불어있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부모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형제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 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여러분은 기쁨 중에 어떤 기쁨이 더 기쁠 것 같습니까? 어떤 일이 있을 때 더 기쁠 것 같습니까?
기쁨은 더 기쁜 것, 덜 기쁜 것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할 사람이 있을 때 기쁨은 더 기뻐지고 슬픔도 만찬가지로 함께 내 슬픔을 나눌 사람이 있을 때 그 슬픔이 훨씬 덜 합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기쁨과 설움도 같이 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아버지, 어머니 아침에 일하러 나가시고 아이들은 공부하러 나가고 저녁에 다 모여 이 일, 저 일 하루 지난 일을 이야기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소원대로 다 이루어지고 마음대로 가지고 싶은 대로 다 가진다고 행복한 가정은 아닙니다.

이 곡을 작시한 분은 <전용택>이라는 분입니다. 독립운동하신 분이었는데 독립운동하다 보니 자기 집에서 살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늘 그리운 것이 가정이었습니다. 내 집, 내 아내가 있고, 내 자식이 있고 부모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곳이 없습니다. 10년 전 네덜란드 배낭여행을 다닐 때였습니다. 잠 잘 곳을 구하지 못해서 1월 추운 겨울에 대여섯 시간 비를 맞고 여기저기 다닌 적이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정신 때문에 집의 내부를 숨기지 않습니다. 커튼을 가리지 않고 집안이 훤히 다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어떤 집은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어떤 집은 먹을 것을 먹으면서 TV를 봅니다. 너무 부러웠습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집에 가봐야 별 것 없는데 그것이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이 노래를 하면서 그런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그 모습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도 그 모습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오늘 1절 말씀에서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꼭 기억하면 좋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이 선하다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면 하나의 감탄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선한 사람, 선한 가정,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삶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독일어 ‘타트 보르트’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좀 더 풀이하면 하나님 말씀은 한 번 말씀되어지기만 하면 반드시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현실창조의 언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이 있다 말씀하시면 그런 곳이 복이 있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복스럽고 행복하고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이 되기 원합니다. 누구든지 다 원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복을 어떻게 받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은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곳'에 내가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곳에 복을 주실까요?
먼저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물론 당연하게 혈연입니다.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 자매, 남매, 삼촌, 사촌, 오촌 이런 혈연인 친인척이 다 포함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 이것이 먼저입니다. 그런 형제들이 명절에 다 모여서 우애 있게 지내는 그곳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지금은 각 가정에 다 흩어져서 따로따로 밥벌이도 하지만 나중에 다 함께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이런 가족들이 연합해서 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가족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면 모든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인류는 모두 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는 노아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입니다. 얼굴이 검든 희든 누렇든 어떤 사람이든 간에 전부 다 형제고 자매고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면 동물과 식물과 자연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형제입니다.

얼마 전에 눈이 많이 와서 아직 교회 주변에 눈이 많이 쌓여있습니다. 이번에 에티오피아에서 돌아왔을 때, 쌓인 눈 위에 보자기를 펼쳐둔 것을 몇 개 보았습니다. 보자기 위에 새 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마음이 참 좋았습니다. 눈이 많이 오면 새들이 먹을 것이 없습니다. 눈이 많이 오면 뒷산에 고라니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닙니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해서 어디에 먹을 것이 있을까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동물들을 생각하며 먹이를 펼쳐두는 마음, 이것이 형제입니다. 내 가정, 가족들 그리고 인류, 지구를 뛰어넘어 바다를 넘고 강을 건너고 그것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과 자연까지도 전부 다 우리의 한 가족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런 형제들이, 그런 가족들이, 그런 사람들이, 그런 나라들이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회사들이 복을 받으며 어떤 집안이 복을 받는가를 말씀하시면서 ‘연합동거’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연합과 동거는 같은 뜻으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연합이란 어떤 연합인가? 그 형제들이 그 가족들이 어떻게 연합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명령하실까요? 연합은 물리적인 연합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연합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유대관계가 있는, 유대의식이 있는 연합, 이 연합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연합이 참된 연합인가에 대해서 성경에 한 좋은 예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을 잘 아실 것입니다. 두 여인이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와서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면서 솔로몬 왕을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이 부하에게 큰 칼로 아이를 잘라 한 쪽은 이 여인에게, 다른 한쪽은 저 여인에게 주라고 명령합니다. 그때 한 여인은 어차피 이렇게 될 바에는 반쪽이라고 가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여인이 한 말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아기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더라’ 이것이 연합입니다. 가짜 어머니는 그 아이와 연합이 없었습니다. 유대관계가 없었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저 욕심만 부리는 것입니다. 말만 내 자식이라고 하고 내 부모라고 하고 내 형제라고 하지만 정말로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어머니는 유대관계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죽으면 꼭 내가 죽을 것 같습니다.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내 소유를 포기하더라도, 내가 그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저 아이를 죽일 수 없는 유대관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는 바는 바로 이런 유대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복을 원하면서도 이런 유대가 없습니다. 부모에게도 이런 유대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아니하고 형제간에도 이런 유대 의식 관계가 있는 사람은 점점 더 적어져갑니다. 민족, 국민들 간에도 그렇고 국제관계에서는 물론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 풍요로워지고 더 풍족해지고 더 풍성해지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복은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것 같고 행복한 사람은 점점 더 적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의식이 있는 사람들, 그런 가족들, 집안, 회사, 나라에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33편은 연합의 의미를 아주 멋진 비유로 설명하시는데 두 가지 단어로 설명하십니다. 하나는 기름이고 하나는 이슬입니다.
2절에서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같고’ 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어른은 대제사장입니다. 제일 큰 어른의 머리라는 말은 제일 위를 의미합니다. 그 광경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대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 기름이 흘러내려서 얼굴을 타고 내려와서 수염으로, 그 다음 옷깃을 적시게 됩니다. 그렇게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은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헐몬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높은 산입니다. 그곳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옵니다. 3절의 시온의 산은 이스라엘의 산입니다. 이스라엘의 산들은 눈이 오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눈이 와도 잠깐 뿌리고 맙니다. 그러다보니 높은 헐몬 산에는 항상 습기가 많고 차갑지만 이스라엘의 산들은 건조하고 덥습니다. 헐몬산의 차가운 공기와 시온산의 더운 공기가 합해지면 이슬이 생겨납니다. 그 이슬이 북쪽 높은 산에서부터 시온의 산들에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전 마을, 가정 가정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 이 두 가지를 두고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연합이란 위에서 아래로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는 나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그동안 늘 어른들을 존경해 왔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참 좋습니다. 요즘은 좀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어른들도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언제까지나 내가 젊은 아이들에게 대접받겠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진짜 어른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어린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하고,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먼저 안부를 묻고, 먼저 내가 챙기는 이런 어른들의 노릇 이것을 참된 연합이라고 하십니다.

또 하나는 권력의 위층입니다. 최근에 청문회를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이름들이 나올 때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너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위장전입이 있을만한 사유도 있을 것입니다.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지 못하는 사유도 있을 것입니다. 세금을 안 낼 만한 사유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왜 그렇게 높은 권력에 앉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런 높은 권력에 있었고 그에 따라 당연하게 국가로부터 대접도 많이 받은 사람들일수록 세금을 더 내지 않고 위장전입이 더 많은지요.. 없는 자식들에 비해서 신체도 건강할, 더 잘 먹을, 더 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자식들이 어떻게 더 군대에 가지 아니하는지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개별적인 사정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이름 올라오는 사람들마다 다 그런 사람들만 올라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은 오히려 법을 바꾸어서라도 세금을 내려고 하는데 세금 내지 않으려고 온갖 작태를 부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연합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연합입니다. 그런 사람이 복을 받고 그런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손해 볼 줄 알고 겸손할 줄도 알아야합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가진 사람들입니다. 가진 사람들이 손을 펼쳐야합니다. 돈이 좀 넉넉한 가정들이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돈 많이 버는 회사들이 이런 일을 좀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부자와 나사로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부자가 지옥에 갔습니다. 성경은 어떤 곳에서도 부자가 지옥에 갈만한 다른 죄를 지은 것을 기록해놓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부자가 가난하고 먹지 못하고 온 몸에 헌데가 나는 병이 들어 곧 죽어가면서 자기 집 대문 앞에 있는 환자 나사로를 챙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있는 사람이, 권력이 있는 사람이, 가진 사람이, 어른이 먼저 이 일을 해야 하는데 먼저 챙기지 않았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연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형제 연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동거란 것이 무엇인가? 위로부터 가진 사람, 나이든 사람, 힘 있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챙기는 것 이것이 연합이라고 말씀하시고 이런 집에, 이런 사람에게, 이런 회사에, 이런 나라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은 해외에 나가면 기분이 좋습니다. 옛날에는 코리아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면 코리아라는 말을 아예 알지 못했는데 요즘은 다 압니다. 가는 곳마다 광고가 참 잘되어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한편에 씁쓸한 것이 있습니다. 최근에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국내에서도 대기업들이 많은 돈을 벌었다고 신문에서 계속해서 보도되고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나라에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지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돈 많이 버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혼자 벌었습니까? 이제는 국민들과 나누어줄 줄도 알아야하고 해외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과도 나눌 줄 알아야합니다.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세금 내지 않으려고 시늉 내는 것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아플 때가 많습니다. 먼저 위로부터 해야 한다, 나이든 사람들로부터 해야 하고, 가진 사람들로부터 해야 하고, 높은 사람들부터 해야 합니다. 이것이 동거이고 연합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래 오래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15년을 지나 16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개척하고 난 후 1년 만에 지난번에 있었던 창고교회를 샀습니다. 3년 동안 분할 상환하는 조건이었으므로 석 달마다 대금을 내어야했는데 속된 말로 피가 마를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제 머리가 다 빠졌습니다. 게다가 돈도 없는데 교회 건축한다고 시작했습니다. 다섯 달 동안 지었는데 석 달마다 땅값 내는 시간은 다가오고 인건비, 자재비를 내야하는데 정말로 피가 마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교회 땅값을 내고 건물을 지을 때 한 번도 연체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사랑한 한 교우가 때마다 연락했기 때문입니다. 저보다 먼저 알고 땅값이 낼 때가 되었는데 얼마나 준비되었으며 얼마나 모자라는지 물었습니다. 공사 대금도 그렇게 챙겨주셨습니다. 지금 기억해보면 한 번도 제가 아쉬운 부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늘 먼저 연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연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기름이 내리는데 그 기름이 내릴 때 얼마나 부드러운지 주부들이나 공업 쪽에 일하시는 분들은 잘 알 것입니다. 부드럽게 아무 소리 없이 흘러 내립니다. 이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잘 퍼집니다. 국 한 솥을 끓이는데 참기름 한 숟가락만 넣어도 온 그릇, 솥에 참기름 냄새가 가득합니다.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떠들지 않고 조용하게 그리고 풍성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찔끔찔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표만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했다고 자랑하려고가 아니라, 내 이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문에 내 이름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용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하는 것, 이것을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비가 잘 내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공업이 많이 발달하지만 옛날에 이스라엘은 주로 목축을 하였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그 나라에 목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슬이 비가 오는 것보다 더 많이 내립니다. 아침에 목자들이 양들을 데리고 나가서 풀을 먹이면 풀도 먹고 하루 먹을 수분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습니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답이 바로 이슬입니다. 그렇게 풍성하게 내립니다. 소리도 없이 오는 것이 모든 가축들이 먹을 수 있도록 내리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주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룻기에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 보아스가 자기 집 타작할 때 이삭을 거두러 오는 과부를 보게 됩니다. 젊은 과부인데 이 과부는 나이든 시어머니 과부를 모시고 삽니다. 그 당시 과부는 먹고 살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보아스가 하인들에게 “여보게들 자네들이 곡식을 거둘 때 저 과부가 마음대로 이삭을 주워가도록 하게.” 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냥 이삭만 주워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곡식 단을 나르다가 슬쩍 슬쩍 단 중에서 조금씩 떼서 땅바닥에 떨어뜨려 두게. 그 사람들이 주워가도록 말이야.”라는 말까지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레위기 19장에서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레19:9-10)라고 말씀하십니다. 넉넉하게 남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12월에 이어 며칠 전에 에티오피아에 또 다녀왔습니다. 이번에 가게 된 까닭은 우리 교우 한 분의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에티오피아 아동 800명을 공부시키고 먹이고 있고 서른 교회의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전적으로 대고 있습니다. 또 극빈가정 100가정을 돕고 있고 다른 여러 가지도 하고 있는데 전부 다 계속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몇 년 전부터 하나님께 기도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은 자기네들이 스스로 먹고 살 방법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것을 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우선 먹고 사는 게 급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극빈 아동, 극빈 가정을 돌보는 일들을 했는데 그 교우가 그 일을 담당하겠노라 제안해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방법을 가르쳐주면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것 같아서 급히 에티오피아에 가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일하고 왔습니다. 현재 계획대로 한다면 이제 매년 4천 내지 5천 가정을 자립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회사를 했든지 다른 무엇을 했든지 돈 있으면 부탁받기 전에 누가 요청하기 전에 내가 그런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이전에 우선 내가 먼저 행복합니다. 이런 가정이 행복합니다. 말만 들어도 좋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3절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런 사람에게, 그런 가정에게, 그런 기업에게, 그런 나라에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명절입니다. 여러분들이 시편 133편에서 말씀하시는 의미의 연합을 이루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하십시오. 돈 있는 회사, 돈 버는 회사, 돈 많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마시고 금액이 얼마나 되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먼저 나누어주고 먼저 베풀고 여러분들이 섬기십시오. 금액은 관계없습니다. 여러분이 섬기기만 하면, 시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나머지 일을 하십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하시고 회사에서 하시고 가정에서 하시고 집안에서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보시고 기억하시고 절대로 잊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복을 명령하십니다. 복은 그런 사람들이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아실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은 세상이 절대로 빼앗아 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설픈 복은 없어지고 사그라지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런 복은 절대로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이 복은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이어지는 참된 복이고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복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