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마태복음(14) - 마태복음 14:1-12

분당소망교회 2015. 4. 15. 09:35

마태복음(14)

 

 

 

마태복음 14:1~12

젊은 부인이 정신병에 걸려습니다. 원인은 돌아가신 시어머니에 대한 후회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이 며느리는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잘못 모신 것이 마음에 너무 걸려 늘 후회했습니다. 시어머니의 모습이 환상이 되어 자주 이 며느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어느 날 현관문을 열어놓고 있는데 하는 바람과 함께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나타났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이 며느리는 허공을 바라보면서 시어머니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했습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다시 살아서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잘못 모신 후회로 떠나보내지 못하고 마음 한편에 붙들어놓고 있던 시어머니를 본 것입니다. 자기 맘속에 있는 시어머니를 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형벌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의 대가를 치르고 용케도 잘 피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용케 잘 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죄지은 그 자체가 이미 형벌입니다. 시어머니가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이 며느리는 그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형벌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이스라엘 왕 헤롯에게 일어납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라는 본문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헤롯이 그러했습니다. 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이 여러 명 등장합니다. 그런데 다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한 집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헤롯이라는 같은 이름을 쓰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같은 사람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 탄생하실 때에도 헤롯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면 혹시라도 탄생하신 예수님이 자기 자리를 빼앗을까 염려했던 헤롯은 헤롯대왕입니다. ‘The great Herod’ ‘대헤롯이라고 부릅니다. 이 헤롯은 유대사람으로 로마에 공을 세워 이스라엘의 총독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뒤에 왕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리를 예수님께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던 이 헤롯은 예수님께서 탄생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는 죽기 바로 전에 나라를 셋으로 분할하였고 그의 세 아들들이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정식 왕이 아니라 하나의 통치자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그 세 분봉왕 중 한 사람인데 본이름은 헤롯안티파스이고, 성경에는 헤롯안디바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안디바가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나병이라는 것은 불치의 병인데 예수라는 사람이 나병을 깨끗하게 낫게 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한 번이 아니라 꼼짝 못하는 중풍병자를 번쩍 일어서게 했다는 소문, 평생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하던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는 소문, 말 못하는 벙어리를 입을 벌려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손이 말라 손의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가 만지니 성한 손이 되더라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헤롯은 이 소문을 듣자마다 단번에 그 예수는 자기가 처형한 세례요한이 환생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이 이렇게 말한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헤롯이 분봉왕일 때 로마에 살고 있는 동생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로마에 살고 있는 동생은 돈이 많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지만 권력이 없었습니다. 동생 집을 방문한 헤롯은 동생의 아내 제수씨 헤로디아를 보는 순간 마음을 다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헤롯뿐만 아니라 제수씨인 헤로디아도 헤롯을 보고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시숙 헤롯은 제수씨 헤로디아의 미모에 마음이 빼앗겼고, 헤로디아는 헤롯의 권력에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헤롯은 헤로디아에게 결혼하자고 유혹했고, 두 사람 간에 어느 정도 말이 진행되자 헤롯은 헤로디아에게 동생과 이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롯에게도 아랍 왕의 공주출신인 아내가 있었습니다. 헤롯은 제수씨인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 아내와 이혼하고 쫓아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주의 아버지인 장인이 분개해서 선전포고를 했고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헤롯은 장인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합니다. 로마 군대가 헤롯을 도와주지 않았으면 헤롯은 아마 목숨조차도 건지지 못할 뻔 했습니다. 이렇게 겨우 목숨만 건지게 됩니다.

 

이런 헤롯 그리고 헤로디아의 결혼에 관해서 세례요한이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백성들은 세례요한이 책망하는 이 소리를 듣고 속이 시원했습니다. 자기들도 이것을 알고 마음이 안 좋았는데 자기들이 존경하는 세례요한이 이렇게 책망하니 백성들도 따라서 왕 헤롯을 비난하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고 이전처럼 그를 대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헤로디아 역시 견딜 수 없었습니다. 헤로디아는 칭송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좋아했는데 가는 곳마다 수군거리니 견딜 수 없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하든 세례요한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유부단한 남편 헤롯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헤롯의 생일에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헤로디아는 그 잔치를 세례요한을 처치할 기회로 잡았습니다. 헤로디아는 헤롯과 결혼할 때 열여섯, 열일곱 정도 되는 딸 살로메를 데리고 왔습니다. 살로메는 미모가 뛰어났습니다. 헤롯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하고서도 욕심이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의붓딸 살로메를 보니 또 정신을 잃어버리고 살로메까지 탐을 냈습니다. 이를 본 헤로디아는 분노 그리고 질투 때문에 견디지 못합니다. 거기다 세례요한 때문에 못살 것 같습니다. 이에 딸을 이용해서 세례요한을 처치하려고 합니다. 헤로디아는 딸 살로메에게 의붓아버지 생일잔치에서 춤을 추도록 만들었습니다. 살로메는 추한 욕심으로 가득 찼던 의붓아버지 헤롯으로부터 아버지가 정말로 기뻐하시는 춤을 추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것, 소원을 꼭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살로메는 춤을 추는데 얼마나 관능적인 춤을 추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아도 헤롯은 의붓딸 살로메에게 이미 마음이 다 빼앗기고 있었는데 관능적인 춤을 보자 정신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살로메는 의붓아버지에게 세례요한의 목을 베어서 쟁반에 담아달라고 말합니다. 어머니 헤로디아와 이미 다 짠 것입니다. 헤롯은 설마 그런 부탁을 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고민에 쌓였습니다. 세례요한을 처형하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불만이 많은 시민들인지라 그들이 들고 일어나서 폭발할 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의붓딸에 대한 추한 욕심이 또 유혹했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체면도 있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체면 그리고 의붓딸 살로메를 생각하면서 왔다 갔다 하다 할 수 없이 허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례요한은 처형되어 목이 잘려 쟁반에 담긴 채 살로메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헤롯에게 걸렸습니다. 죽이지 말아야했다, 하지 말아야할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의 능력 소문을 들으니 바로 생각난 것이 세례요한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400년 만에 다시 나타난 하나님의 종 세례요한의 인생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처형되어 목이 쟁반위에 담겨서 바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세례요한의 인생은 과연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는가?’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생명은 그것으로 끝났을지 몰라도 세례요한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헤롯에게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죽이고 난 뒤에도 세례요한은 헤롯의 가슴속에 밤에도 살아있고 낮에도 살아있었습니다. 꿈에도 살아있고 생시에도 살아있었습니다. 떠나지 않고 한편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통해서 헤롯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의 몸은 죽일 수 있었지만 영혼까지는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왕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천사라고 할지라도, 하늘의 악마라고 할지라도, 어떤 존재라도 우리의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도 여러분의 영혼을 죽이지 못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10:28)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당하십시오.

 

대신 여러분들은 세상, 세상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28)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두려워할 것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늘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여기서도 저기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런 때에도 저런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하실까, 이뻐하실까, 아니면 싫어하실까? 내 하는 일을 좋아하실까, 싫어하실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행복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행복은 세상에서 오지 않습니다. 물질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런데서 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늘 하나님과 함께 대화를 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행복해집니다.

 

두 번째, 세례요한은 예수님 이후 오늘까지 수십억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계속해서 살아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종, 세상의 권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았던 참 하나님의 종 세례요한, 이런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세 번째, 세례요한은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 속에 살아있었고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두고 제자들에게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11:9),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11:1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생명은 죽었지만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요한은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계속해서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헤롯과 헤로디아는 어떨 것 같습니까? 온갖 못된 짓과 악한 짓 다하고 행복하게 살 것 같습니까? 그 악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 다 가지고 다 이루고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적어도 성경만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므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2절까지만 볼 것이 아니라 성경 뒤를 보아야합니다. 사람들을 볼 때는 지금 그 사람의 그 모습만 아니라 나중이 어떻게 될지 그것까지도 볼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길게 보십시오.

 

그로부터 몇 년 뒤 요단강 건너를 다스리던 분봉왕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죽게 됩니다. 로마 황제가 요단 건너를 다스리는 사람으로 아그립바라는 사람을 보냈는데, 그때 로마황제는 아그립바를 보내면서 지금까지처럼 분봉왕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정식 왕으로 보냅니다. 당시 정식왕과 분봉왕은 상당한 차이가 났습니다. 분봉왕은 왕에게 크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헤롯에게 이것은 대단한 콤플렉스였습니다. 헤롯은 요단 건너의 이 소식을 듣고 너무나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헤롯보다 더 속상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헤로디아입니다. 그래서 장가를 잘 가야합니다. 좋은 아내를 맞아야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내 때문에 망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남편이 가정의 모든 일들을 다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남편이 그 가정을 주장하는 것 같은지 몰라도 속으로는 아내들이 다합니다. 아내가 어떤가에 따라 그 가정이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아내를 맞는가에 따라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사람이 세상을 날아다니고, 세상을 얼마든지 날아다닐 것 같은 사람이 아내를 잘못 만나서 나는 것이 아니라 기어 다니고 여기저기서 수치스럽고 꼴불견인 모습을 연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헤로디아는 남편보다 더 속상했습니다. 속상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수치와 질투심으로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견디지 못하고 남편 헤롯에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가지고 있는 모든 금과 은을 다 동원하더라도 로마황제에게 가서 왕의 지위를 가지고 오라고 밤낮으로 졸라댔습니다. 헤롯은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았지만 결국 아내를 이기지 못합니다. 남편이란 존재는 이렇습니다. 아내 된 여러분 잘 하십시오. 여러분이 잘해야지 남편이 일어섭니다. 남편이 주저앉지 않습니다. 헤롯은 어쩔 수 없이 아내 때문에 많은 뇌물을 준비하고 로마에 갈 채비를 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요단 건너에서 정식 왕이 된 아그립바가 듣게 됩니다. 이 아그립바도 자기 외 그 누구도 정식왕이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선수를 쳐서 로마 황제에게 사람을 보내 헤롯 안디바스가 역모를 꾸민다고 고발했습니다. 로마황제는 아그립바의 말을 믿고 헤롯의 지위를 다 빼앗고 영토와 재산을 다 몰수한 후 귀향 보내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헤롯은 귀향 가서 쓸쓸하게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해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헤롯, 이 헤롯의 인생은 실패의 악순환, 불행의 연속을 이루었습니다.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여 치욕을 당하였고, 왕도 되지 못하고 영토와 재산을 빼앗기고 권력을 다 잃어버린 채 황량한 귀향지에서 비참한 최후를 보냈습니다.

 

어디서 이런 불행, 이런 실패가 연류 되었습니까? 욕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동생의 아내가 예쁘다고 빼앗고 거기에다 아내의 딸까지 넘본 욕심, 이 헤롯의 추한 욕심이 그보다 더 악한 사람 헤로디아의 탐욕을 만나서 탐욕의 절정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욕심이 욕심을 만나고 탐욕이 탐욕을 만나고 악한 사람이 악인을 만나면 그것이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죽음으로 치닫습니다. 멸망으로 치닫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죽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꼭 이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려워서 절절 맬 때 이 두 사람은 넉넉한 재산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욕심을 또 부렸습니다. 이것도 얻고 저것도 가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탐욕, 욕심 때문에 거짓말을 버리지 않아 끝끝내 멸망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욕심에 대해서 야고보서에서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14)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1: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낫는다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5)..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행복할 사람, 행복할 모든 여건과 조건을 갖춘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금 더’ ‘요것만 더라는 말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그것만큼 사람들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점점 더 좋아지고 있으면서도 점점 행복하기 어려워지고 불행만 가까이 오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사회, 한국인들에게 있는 가장 큰 불행 중 하나입니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한국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은 날이 가면 갈수록, GNP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점점 더 그 수가 줄어가고 있습니다.

‘less is more’ 건축학 용어입니다. 건축학자가 건축에 관해 한 말인데 이 말은 건축보다는 인생에 더 잘 어울립니다. 욕심을 버릴수록 인생은 더 아름다워진다, 욕심을 버릴수록 인생은 더 풍성해진다, 욕심을 버릴수록 인생은 더 행복해진다, ‘less is more’입니다.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하다라고 고백하고, 그 고백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고 그런 삶을 살아보십시오.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 ‘되었습니다.’ 기독교신자들은 특히 더 어떤 상황에서든지 간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충분합니다. 이것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제 그만해도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주인이시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우리들에게 만들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하다면 새로 만들 수 있고 없앨 수 있고 사람을 보낼 수 있고 쫓아낼 수 있고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되었습니다. 충분합니다. 만족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바울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1~12)..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압니다.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얼마든지 만족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에게 능력주시는 하나님에 힘입어 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욕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욕심이 없는 사람, 욕심을 버린 사람은 작은 것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