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 부르짖는 자들의
누가복음 18:1~12
합격만 보장된다면 재수는 필수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재수란 참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괴롭습니다. 재수하는 학생들 특히 세 번 이상 하는 학생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합격이 보장만 된다면 재수는 필수적으로 해야 할 만큼 인생의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도가 똑같습니다. 응답이 보장만 된다면 기도하는 것, 그것만큼 귀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자주 기도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기도를 했는데도 응답이 없고 또 기도를 더 해도 그 기도가 응답될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응답을 받을 수 있다면 더 기도하겠는데 응답도 받지 못하면서 헛되이 기도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 때문에 기도하다가 중단하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느 도시에 아주 악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의 한 과부가 원수에게서 원통한 일을 당했습니다. 과부의 그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재판장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재판장을 찾아갔습니다. 한두 번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귀찮을 정도로 찾아갔습니다. 끊임없이 찾아가서 제발 내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재판관을 불의한 재판관이다, 악한 재판관이다, 하나님도 안 무서워하고 세상 사람들 눈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돈 없고 배경 없는 과부의 원한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재판장이었습니다. 과부가 수차례 찾아왔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앞으로 더 찾아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장에게 과부의 이 일은 골칫거리였습니다. 이만저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재판장은, ‘과부를 저대로 그냥 두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올 것이며 밤낮으로 귀찮게 할 것이다, 이러다가 저 과부가 죽기 전에 내가 먼저 말라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차라리, 돈 없고 아무 배경 없는 저 과부로부터 얻는 것은 하나도 없다하더라도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편하겠다고 판단하고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저런 악한 재판장, 돈만 밝히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못된 재판장, 힘없고 불쌍하고 억울한 일 당하는 사람들, 국민과 나라를 생각하지 아니하는 저런 못된 재판장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호소하니 들어주지 않았는가?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 불쌍한 사람들을 늘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치 당신께서 그 억울한 일을 당하신 것처럼 생각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는가?’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또 ‘과부는 그 재판관에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돈도 되는 것도 없고 연줄을 통해서 부탁하는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과부였다, 그런데 그런 아무것도 아닌 과부, 아무 관계도 없는 과부가 그렇게 호소하고 부탁하니 들어주었다, 너희들은 하나님께 얼마나 귀한 자식이냐? 하나님이 너희들의 아버지가 아니냐? 그런 너희들이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 얼마나 너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느냐? 그런 하나님이고 이런 너희들인데 왜 기도하다 낙심하고 중단하고 포기하고 마느냐?’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들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타깝게 호소하고 기도하는 너희들의 기도를 안 들어주시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으실 것 같은가?’ 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6-8절)
예수님께서 안타깝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여, 기도하다 낙심하지 마라. 기도하다 포기하지 마라,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라.’ 그렇게 기도하게 되면 반드시 응답을 받고야만다고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내게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11:5-8절)
어디 다른데 부탁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 친구에게 부탁하면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찾아온 친구의 부탁을 할 수 없이 들어주었는데, 그 친구의 부탁을 들어준 까닭이 친구라서가 아니라 하도 와서 간청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주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와서 그렇게 간절하게 간구하고 하소연하면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11:9-10)
이 말씀 중에 ‘구하라’ 라는 말의 원어로는 ‘아이테오’입니다. 이 ‘아이테오’라는 말에는 불쾌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구하는데 사람 마음을 편하도록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가지도록, 싫도록 그렇게 구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의를 갖추면서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와서 부탁하고 또 와서 강하게 부탁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또 두드리라는 말씀의 원어는 ‘클루오’ 라고 하는데 이 말씀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무 소용없지만 그냥 계속해서 두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안에 사람이 없을지라도 계속해서 두드리는 것, 안에서 대답할 가능성이 거의 없을 때에도 계속해서 두드리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끝까지 두드리고 구하고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10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가득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식인 여러분들이 그렇게나 간절하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틀림없이 열어주십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간구하는데 여러분의 아버지가 응답하지 않으시겠는가? 아니다,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구하게 되면 받을 것이요, 계속해서 찾게 되면 찾아낼 것이고, 계속해서 두드리면 틀림없이 여러분들에게 문이 열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혹 인생 살다가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기도하고 또 더하여 기도해도 아직 응답되지 않을 때, 그러나 그럴 때라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 그러면 틀림없이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기도하면 절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실망할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척만 하고 실제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시늉만 하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고보서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4:2)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지 않고 또는 기도해도 기도하는 척만 하고 진실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몰라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은 이런 일을 모르는 경우가 없도록 하십시오.
이것을 몰라 제일 크게 실패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입니다. 사울 말년에 나라에 아주 큰 일이 생겼습니다. 강력한 외적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스라엘은 이때 블레셋의 대적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블레셋이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두렵고 떨렸습니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자기를 도와주고 지도해주던 스승 사무엘은 죽었습니다. 살아있어도 사울은 왕이 되자 사무엘을 무시했습니다. 그 사무엘마저도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제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 밖에 안 계시는데 하나님을 막상 찾아가려고 하니 면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늘 외면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도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은 사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할 수없이 하나님께 찾아가서 기도했습니다. 속으로 ‘이런 나에게 응답하실까?’ 하는 마음으로 찾아가서 기도했는지 사울은 조금 기도하다 포기해버립니다. 사울 자신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실 것인지 의아심을 가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고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난 뒤 전쟁에 나갔습니다. 전쟁에 나가서 대패를 당했습니다. 중상을 입고 하루 종일 신음합니다. 여기저기 밀리고 끌려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아주 창피한 꼴로 죽을 것 같아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날 사울의 사랑하는 아들 셋도 함께 전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도 큰 아쉬움이 있습니다. 만약 사울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다고 뒤돌아서서 무당을 찾아갈 것이 아니라 ‘그래도 나는 의지할 데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아옵니다.’ 라고 했다면 끝까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성경 전체를 찾아볼 때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싫어서 떠난 사람도, 뒤돌아선 사람도, 그렇게 불순종한 사람도 그러나 돌아오면 너무나도 좋아서 기뻐하시고 반겨주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부탁하면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집을 나간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못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자기에게 나누어줄 상속을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졸라댔겠습니까? 기어이 그 상속분을 받아 외국에 나가서 다 탕진했습니다. 돈이 다 떨어져 쫄쫄 굶어야했고 돼지가 먹는 돼지 밥도 제대로 얻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견디다 못해 이 아들은, 차라리 아버지 집에 가서 아들이 아니라 머슴이나 일꾼으로라도 받아달라고 해보자고 생각하고 아버지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 집 저 멀리서 이 아들은 망설였습니다.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눈도 잘 안 보이는 아버지가 어떻게 그 멀리서 보았는지 이 아들을 보고 쫓아 뛰어나옵니다. 아마도 신발도 신지 않고 쫓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마치 아들과 시간을 약속한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밤낮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쫓아 나와서 아들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왕자가 돌아온 것처럼, 그 집 주인이 돌아온 것처럼 빨리 잔치를 베풀고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찾아다 이 아들에게 입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반지를 끼어줍니다. 신발도 신겨라, 잔치를 하는데 그냥 대강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제일 좋은 송아지,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하자고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기쁘게 받아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들이 부탁하면 부탁에 대답하는 것은 물론이고 부탁하지 않아도 좋은 것으로 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사울이 이 하나님을 찾았더라면, 계속해서 하나님을 불렀더라면,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사울보다 더 못된 이 아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도 좋아서 사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큰 잔치를 베풀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인줄 몰랐습니다. 적당하게 기도하고 기도하는 척하면서 모양만 낸 후 하나님 대답을 포기했다고 말하면서 무당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 가슴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무당을 찾아갔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온 집안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33장에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르짖어라’ 이 말씀 안에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계속해서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응답하겠다. 응답 이상의 응답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겠다는 것은 네가 기도하지도 상상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응답까지도 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이 말씀과 함께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여기에 대해 ‘나 하나님은 일을 행하는 하나님이다. 기도하라고 말만 하고 여러분의 일에 대해서 나 몰라라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일을 행하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나 하나님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응답에 필요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필요하다면 없는 것도 만들어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하는 소중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다. 내가 간절하게 기도하면,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반드시 응답하시고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이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계시는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고 필요하다면 우리를 위해서 창조하시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고 새로 만들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산에 올라가셨다 산을 내려와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본 사람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 아들을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어떻게 하든 구해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렸는데 넘어지면 물에 넘어졌는지 불에 넘어졌는지 모릅니다. 물에 넘어져서 얼마나 많이 빠졌는지 모르고 불에 넘어져서 얼마나 많이 데었는지 모릅니다. 이런 제 아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살려주십시오. 제가 선생님 제자들에게 제 아들을 데리고 갔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도 딱하여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도 똑같이 했는데 왜 고치지 못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이 기도 이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뿐이다, 기도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간질병 걸린 아이를 치료할 때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틀림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하신 것을 늘 보고 있다가 산위에 올라가신 선생님 대신 기도할 때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에게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이것에 대한 이유를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마17:20) 라고 말씀하십니다.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믿음의 기도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모양만 있는 기도, 모양만 있는 믿음은 믿음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내가 기도합니다. 저에게도 믿음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은 기도도 아니고 믿음도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누가복음 18장 8절 마지막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라, 포기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중단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 그리고 기도할 때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도하게 되면 응답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크고 은밀한 일까지 보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니라’ 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있기만 하면, 믿음이 있는 기도를 하기만 하면 이런 일까지 생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받으시고 믿음으로 사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지금도 이런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잘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대단한 기도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기도, 믿음을 가지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좌절하지 아니하고 중단하지 아니하는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를 하다가 중단합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기도하다 낙심합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중단하지 아니하고 기도하는 사람,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 속에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기도, 계속해서 기도하는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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