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보혜사.. (요한복음 14:16~18 )

분당소망교회 2016. 6. 25. 15:35

보혜사..

 

 

 

요한복음 14:16~18   

 

어느 기독교 신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기독교인으로 살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충성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얼마동안은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교회 생활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면서 신앙자체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무덤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바로 이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신앙의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 또한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신앙도 신앙 활동도 활기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신자에게 강하게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자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기독교 신자의 삶인가?’ 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삶이란 선하게 사는 것이다, 정의롭게 사는 것이다, 바르게 사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인들만의 특유한 삶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도 선하고 바르게 살아야겠다, 의롭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선하게 살아야하고 더 바르게 살아야하고 더 정의롭게 살아야합니다. 기독교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신약성경 전체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 그렇게 살면 얻는 것이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즐거움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살면 나중에 심판대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칭찬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삶에서 얻는 보람, 즐거움 그리고 기쁨과 삶의 의미는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면 좋겠지만 지속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라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조금씩 사라집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전과 같이 되고 때로는 그 전보다 더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이 무겁고 짐으로만 여겨지고 이것이 정말 신앙의 삶인가?’ ‘이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고귀한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기쁨>이라는 노래 가사가 그것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사랑의 기쁨은 한 순간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사랑의 기쁨은 한 순간의 것, 사랑의 아픔만이 영원한 것이라오.’ 이런 내용입니다.

언젠가 주례할 때 예식 시작 전에 <사랑의 기쁨>이라는 음악이 나왔습니다. 깜짝 놀라서 일하는 사람을 불러서 이 음악을 튼 연유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음악이 어떤 음악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기쁨>이라는 제목이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은데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목만 보고 튼 것 같습니다.

 

세상적인 것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고귀한 사랑까지도 인간적으로 하고 세상적으로 하면 그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삶은 무엇보다도 기독교 특유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3자의 눈으로 볼 때 세상 사람들이나 기독교인들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다 똑 같이 노력합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고,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도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더 많이 한다, 적게 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인이나 아닌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가 가지는 매력을 모릅니다. 비슷비슷한데 구태여 시간 들여가면서 또 돈 들여가면서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가지고 계시는 계획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보다 조금 더 열심히 살고 더 바르게 사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기독교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돕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것, 물론 노력도 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기독교인들을 돕는 것 이것이 기독교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자기 힘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도움을 요청하면 우리 주님께서 뛰어오십니다. 어디에 계시든지 뛰어오셔서 도울 뿐만 아니라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늘 신도들을 보고 계십니다. 나의 노력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자의 삶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처럼 노력해야합니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더 많은 애를 써야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기독교인들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독특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이 하나님의 존재를 예수님께서는 보혜사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본문 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혜사라는 말을 원어로 보면 파라칼레토스라고 하는데 말 뜻 그대로 한다면 돕는 존재 혹은 대리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보혜사의 뜻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대리인으로서 신자들을 돕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혜사입니다. 그리고 이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도행전 1장에서는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4-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 성령님께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님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입니다. 알아야합니다. 막연하게 이런 분일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알면 그 분의 도움을 기대하게 되고 요청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란 어떤 존재인가? 관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알아야합니다.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설정해놓은 관념적인 존재, 추상적인 존재 혹은 인위적으로 상징한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을 가진 실제적인 존재입니다. 인격체입니다. 지정의를 다 가지고 계십니다. 지성을 소유하면서 생각을 하시는 존재입니다.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그냥 기계적으로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도와주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어떻게 도와주는 지까지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이 부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한다고 무조건 도와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지성을 가지고 늘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의지가 있는 분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해야 하겠다,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해야 하겠다고 나름대로 의지를 가지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육신의 부모와 같습니다. 자식들이 해달라고 하는 대로 다 해주는 부모는 진짜 부모가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도 지니신 분입니다. 때로는 여러분이 성령님을 슬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땐 성령님은 슬퍼하시고 마음 무거워하십니다. 성령님이 마음 아파하시고 무거워하시면 여러분의 마음도 무겁고 어둡게 됩니다. 때로는 나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무언가 어둡고 무거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성령님께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성령님이 슬퍼하실 때 나도 슬퍼집니다.

또 필요할 때는 힘있게 역사하시고 행동하는 실존입니다. 여러분이 원하시든지 아니든지 성령님이 판단하시게 되면 힘 있게 일하십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여 사람들이 성령님을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심부름꾼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같은 하나님입니다.

 

성령님은 신자들을 도우십니다. 여러분들을 도우십니다. 여러분들은 성령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도우실까요? 여러분이 살면서 필요한 모든 일들을 도우시는데 대표적으로 몇 가지를 보겠습니다. 먼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선한 일을 할 능력을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알아서 내가 선한 일을 하겠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들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것은 천지 차이가 납니다. 내가 하겠다고 하면 금방 식지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오래 오래 지속됩니다.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10:38) 라는 말을 했습니다. 성령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선한 일을 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실제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이 이런 일을 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선한 일을 하도록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자꾸 선한 일을 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선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생각하다가도 주머니를 생각하게 되고 자꾸 쪼그라들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면 넉넉하게 하려다가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성령님의 역할이 이런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열심히 충성하려고 했을 때 이상하게 충성심이 줄어들 때가 있습니다. 크게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줄어들 때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충만했다가 충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덜 일하시면 그런 결과가 나옵니다.

 

또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유혹이 참 많습니다. 죄의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악의 유혹도 참 무섭습니다. 그런 유혹이 있을 때 성령님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때로는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이럴 때 성령님께서 도우십니다. 이것은 잘 기억하십시오. 다 그만두고 싶을 때 성령님께서 도우십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게 되면 그런 마음을 없어집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희한합니다. 지난번에도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포기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새로 시작하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그런 역할을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사람을 아름답게 변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칫하면 추하게 바뀝니다. 세월이 지나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자꾸 추하게 됩니다.

누구나 아름답게 되고 싶습니다. 다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믿는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바꾸어주기도 하십니다.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변하게 해주시고 저급한 사람, 품격이 모자라는 사람들을 품위가 있는 사람, 품격이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니까, 성령님으로 충만하니까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신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성령님이 오십니다. 자신이 인식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예수님을 내 주님으로 모시기만 하면 성령님이 오십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속에 성령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님이 오셨다고 해서 모든 신자들이 성령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조금만 일하십니다. 또 어떤 때는 성령님이 계시기는 하지만 돕지 못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강력하게 도우십니다. 다 다릅니다.

 

한 신앙인이 거의 이십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삶은 소작농의 삶과 같았다. 나는 그 삶이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그 외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오래했는데 소작농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소작농의 삶이란 열심히 일하지만 자기가 일하고 농사지은 모든 것을 자기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거의 다 가지고 가는 삶입니다. 이처럼 자기는 아주 조금만 얻는 것 같은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나름 열심히 하지만 때로는 기쁘기도 하지만 너무도 자주 슬럼프에 빠집니다. 마치 조울증에 걸린 사람 같습니다. 열심히 하다가 하기 싫은 현상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못 믿게 되면 아주 추한 사람이 됩니다. 변덕 많은 사람이 됩니다.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저 사람이 예수 믿더니 옛날보다 더 못해졌다는 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삶을 산 것은 아무도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몰랐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당연하게 그런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 삶이 달라진다,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성령님이 힘 있게 역사하시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완전한 기쁨이 있습니다. 무거움, 어둠이 섞여 있는 기쁨이 아니라 완전한 기쁨,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가 아니라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이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말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령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충만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실제적으로 우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몇 가지를 말씀합니다.

먼저, 내 안에 성령님이 게시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의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속에는 성령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그 성령님을 자주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내 속에 계시는 성령님은 내가 바라는 성령 충만함보다도 훨씬 더 원하십니다. 한쪽 구석 귀퉁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 내 영혼 속에서 힘 있게 역사하시기 원하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령님께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탁하지 않아도 성령님께서 먼저 그렇게 하시고 싶은 마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기독교신자들은 이것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한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 속에 오시는 것은 여러분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잘 되고 모두 함께 잘 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오십니다.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선한 일에 이기게 해 주실 것이고 내 모자란 부분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추한 부분을 성령 하나님께서 바꾸십니다. 바꾸기 원하십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못하더라도 5년 지나면 더 나은 사람으로 바뀔 것이다, 10년 지나면 더 나은 사람으로 바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성령님께서 만드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가운데 생겨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불안함이나 답답함이 있을 때 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령 하나님께서 아주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것을 위해서 간구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이여 이 사람을 돌아보십시오. 이 사람을 위해서 내가 드리는 기도를 성부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역사하십시오.’ 성령님께서 끊임없이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중보하시는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거부하지 않는 중보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는 내 안에서 선한 것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성령님은 반드시 선한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서 때로는 밑바닥까지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절망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또 어떤 사람은 완전한 항복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희망과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답답함입니다. 안타까움입니다. 빨리 하나님을 찾으면 되는데 온갖 노력을 다 하다가 더 이상 희망이 없고 길도 없을 때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서 이 의사 저 의사 찾아가다가 돈이 다 떨어지고 난 뒤에야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탈출구가 보이는 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눈에 보이는 탈출구를 찾아갑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극한의 상황을 주십니다. 일이 잘 안 풀리게 하시기도 하고 질병을 주시고 하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주시고 자녀문제도 주십니다. 절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완전한 항복의 단계에 이를 때 그때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때가 바로 성령충만, 하나님 충만의 때입니다.

시편 18편은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18:6) 라고 노래합니다. 부르짖을 때 드디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시편 118편은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118:5) 라고 노래합니다. 바닥에서 부르짖을 때 그때가 바로 성령 충만할 때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여러분을 성령님의 지배아래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두려움이나 슬픔과 거의 유사합니다. 슬픔과 두려움이 있으면 다른 것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오로지 슬픔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미움이 이와 같습니다. 미운 것이 있으면 다른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누가 말려도 소용없습니다. 이런 것 대신 하나님으로 성령님으로 내 가슴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내가 채우는 것보다 내가 성령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가득 찬 것을 성경은 성령에 취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18) 라고 말씀하십니다. 술을 마시면 취하고 술기운이 가득합니다. 이런 성령 취함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의 일에 있어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간절하게 생각하다 보면 성령 충만을 위해서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할까? 꼭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라는 것을 없애야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님께서 나를 지배하도록 나는 힘을 다 빼고 하나님께, 성령님께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선교사 존 메카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지는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햇빛과 공기를 얻고자 부단히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꽃에는 아름다움을 잎에는 푸르름을 가져다주는 생명의 기운을 얻고자 노력한 결과도 아니다. 단순히 나무의 본체에 순종해서 그것과 하나가 된 결과이다. 꽃이나 열매는 자연적인 성장에 나타난 결과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노력과 투쟁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주 예수그리스도에게 집중시켜야한다. 주께 온전히 내려놓고 항복해야한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확고히 자리 잡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엄마 품에 안겨있는 아기처럼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선교사의 말씀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이 기독교 신비를 대표적으로 말씀하시는 말씀이 갈라디아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한 노숙자를 위해 봉사하던 분이 말했습니다. ‘나는 봉사를 오래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그들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대한 요구가 통하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탈진했을 것이다. 나는 상냥하게 꾹 참고 불량한 말투와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서 친절한 반응을 이끌어 내게 했을 것이다. 그들의 고약한 행동을 내 실패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불에 본 듯 뻔하다. 그랬다면 아마도 나는 진즉 노숙자 봉사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배우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내가 하나님께 집중하는 법을 배우면서 사람들을 일 중심으로 태하던 내 태도가 변했다. 나의 내면에 새로운 안식이 찾아왔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라는 인식이 싹텄다. 결과는 천지차이였다. 나는 당장 열매가 없어도 끝까지 충성하는 헌신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성령충만 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도움으로 얻게 되는 결과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이런 노력, 저런 애씀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