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적 권위
로마서 13:1~7
이 땅에 평화가 없습니다. 세상에 평화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가정의 평화마저도 찌꺼기만 남고 흔적만 남아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어느 곳에도 평화가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먼저 국제적인 사회를 보면 침략전쟁이 고대 중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자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민족분쟁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고 오히려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국경분쟁은 멀리 나가지 않아도 우리나라와 일본이 그렇고 중국과 일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도 그렇습니다. 종교전쟁은 더 심합니다. 최근에 IS가 얼마나 못된 일들을 저지르는지 볼 수 있고 역사적으로 통계가 말하는 것도 있습니다. 국경분쟁, 민족분쟁 이런 것보다도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이 종교전쟁입니다. 어떻게 종교가 그런 결과를 만들 수 있는지 생각될 수 있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국내로 시선을 돌려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자들은 조그마한 힘만 있으면 횡포를 부리려고 합니다. 있는 사람들, 가진 사람들과 작당을 하여 은근하게 악행을 저지릅니다. 결과는 없는 사람, 가지지 못한 사람, 약한 사람들에게 돌아옵니다. 사회적으로도 가진 자들이 온갖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권력으로,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부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최근 대법관 출신들에게 변호사 개업을 못하게 하자는 말들이 나왔는데,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비참한 현실이 있습니다. 그것을 막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다 법조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 것을 막고 있습니까? 대법관 출신이 변호를 하거나 도장을 찍으면 현역 판사들이 그의 손을 들어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법관출신 변호사들에게 몰린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긴가민가할 수도 있지만 그 다음을 봅시다. 대법관의 판결이 그쪽으로 쏠리게 되면 변호사를 제대로 사지 못하는 사람들은 억울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법관들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큰소리치지 못하고 다만 탄식만하고 힘이 없어 비난을 하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사랑한다던 부부가 서로 등 돌리고 헤어질 때는 조금 더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례를 할 때마다 그렇게나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젊은이들이 행복하게 끝까지 살아야할 텐데 라는 걱정이 많아서 더 기도하게 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버림받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부모가 갈라서게 되니 아버지를 잃든지 어머니를 잃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도 있고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일까지도 최근 언론을 통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가정마저도 이러고 있습니다.
거기다 자연재해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기억에서 없애지도 못하는 동아시아의 수십만 명 생명을 앗아간 쓰나미, 지금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네팔 지진, 어디에든 평화가 없습니다. 정의가 사라지고 평화가 온 데 간 데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혹시 생각해보셨습니까? 왜 이럴 것 같습니까? 세상은 풍성해지고 도구도 기구도, 모든 제도도 더 발달된 것 같지만 평화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이 정도라면 틀림없이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 원인에 대해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선악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부족함 없이 평화와 행복만 가득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해주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수많은 과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다 먹어도 좋지만 단 선악과 하나만큼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기어코 따먹고 말았습니다. 결과는 죽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인간이 죽게 되었고 눈이 밝아져서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먹고 죽는 존재가 되었다, 먹고 눈이 밝아져서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네들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간섭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대로 살겠다는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와는 영원한 행복 완전한 평화가 있는 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인간의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없는 평화를 누릴 수 있고 한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인간들의 세상에서 평화와 행복이 사라졌습니다. 인간에게 돌아온 것은 슬픔과 죽음이었고 이제는 그것만 남아있습니다. 오늘날 인간 세상의 모든 비극의 원인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면 평화를 다시 찾을 수 있고 행복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거꾸로 돌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인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사회에서도 국제적으로도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람이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 지 2년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블레셋의 어마어마한 전력에 이스라엘은 겁을 먹었습니다.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제사를 지내려고 했는데 와야 할 제사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점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 사울이 제사장 대신 제사를 지내고 말았습니다. 제사를 마친 뒤에 도착한 하나님의 종 제사장이 사울이 대신 제사를 지낸 것을 알고 무섭게 책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왕의 지위를 박탈했다고 무섭게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사울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징계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제사장이 오지 않아 급한 마음에 제사를 드린 일은 물론 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중요한 일 앞에 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귀한 마음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섭게 징계를 내리시고 버리신 것은 과하지 않은지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보실 것은 사울의 이 문제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만든 문제와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제사를 드렸는지 아닌지 또 누가 제사를 집전했는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었는가? 그래서 눈이 밝아졌는지가 문제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제사를 집전할 사람은 제사장이라고 정해놓으신 하나님의 권위를 거역한 것입니다.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일 이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사울에게 보냈습니다. 너는 이제 악한 나라 아말렉과 전쟁해서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가축까지도 하나도 살려놓지 말고 다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또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왕을 살려주었고 아말렉 가축 중 좋은 것들은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아무것도 살려두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사울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가? 하나님을 얼마나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나의 말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너를 버렸다고 심판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권위는 이처럼 엄중합니다. 곳곳에 하나님의 권위가 어디 있는지 잘 보시고 그 하나님의 권위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여러분은 에덴동산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정에서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처럼 무섭고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엄중한 권위를 당신 혼자만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특정한 일에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하고 어떤 곳에서는 또 다른 권위를 맡겨주십니다. 그것을 신적 권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부분에 있어서는 당신의 권위를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맡기십니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교회 지도자들에게 맡기십니다. 법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의 심판에 있어서는 법정의 재판관들에게 맡기십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나라의 지도자, 교회의 지도자, 법관들은 단순히 왕으로서, 대통령으로서,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권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위, 신적 권위도 함께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와 충돌되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복종하여야합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의 지도자, 교회의 지도자, 법관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권위와 충돌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불복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제국에 세금 바치는 것이 옳은지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아주 재치있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 나라의 통치자들,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침공한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에게 주신 통치권 또한 세상의 통치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도 함께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사울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전쟁에서 중상을 입어 살아날 가망이 없는 것을 안 사울은 자기 칼을 세워서 그 위에 엎드려 자살하였습니다. 사흘 후에 한 젊은 병사가 다윗을 발견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다윗을 괴롭혔는지, 다윗이 사울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잘 아는 젊은 병사는 다윗에게 사울에 대해서 사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 보고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중상을 입고 살 가망성이 없는 것을 안 사울이 자기에게 죽여 달라고 말해서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하면서 증거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은 그 자리에서 그 젊은 병사를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삼하1:14)
이것이 죄목입니다. 사울이 아무리 악행을 저질렀던 왕이었든지, 사울이 나에게 얼마나 악하게 했든지, 나에게 얼마나 미운 원수이든 간에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신적 권위를 주셨으므로 신적권위를 가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사람,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뿐이다, 네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울의 목숨을 빼앗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대신해서 처형한다고 말하면서 심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신적 권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사울과 사울을 죽였다는 젊은 병사 그리고 다윗에게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권위, 신적 권위를 알면서도 무시하고 거역했습니다. 혹 몰랐다고 하면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알아야할 사람은 알아야합니다. 사울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젊은 병사는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신적 권위에 대해서 아예 몰랐습니다. 이에 비해서 다윗은 하나님의 권위도 알았고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신적 권위도 알았고 세상의 모든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신적 권위를 준 사람들에 대한 심판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이 신적 권위를 얼마나 귀히 여기고 중요하게 여기고 두려워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였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살아있는 한 자기 자리가 안전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용변이 마려워서 굴속에 들어가서 용변을 보았습니다. 굴밖에는 부하들이 진을 치고 경호를 하기 때문에 물 샐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굴속에 다윗과 그 부하들이 숨어있었습니다. 이것을 모른 채 사울은 용변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부하들은 사울을 죽이자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 마음속에 얼마나 갈등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렇게 결정합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삼상24:6)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좋은 기회를 버리고 말았습니다. 버렸는지 아닌지는 여러분들이 아실 것입니다 .
똑 같은 일이 한 번 더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가 살아난 것을 모르고 또 다시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들판에서 야영할 때 피곤해서 불침번까지 다 잠에 빠졌습니다. 이 일을 알고 부하가 또 다윗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강하게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이니 이제는 다윗이 나설 것 없이 자기가 사울을 찔러버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윗도 갈등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기회를 주신 것은 이제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다윗은 결정합니다,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삼상26:9)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라는 다윗의 이 말은 얼른 생각하면 마치 꼭 죽이라고 기회를 주신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내가 만약 사울을 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덧붙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삼상26:10)
혹시 꼭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에 치실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직접 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있는 하나님의 신적권위를 인정했고 그 신적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심판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잘 아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권위, 신적 권위,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고 인정하시 않는가에 따라서 여러분들의 삶은 극에서 극으로 갈라집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사울은 하나님의 권위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외면했고 무시했고 거부했고 거역했습니다. 그러다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인생은 언젠가 한 번은 죽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냥 죽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고통당하다가 마지막에 자살했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시체가 갈기갈기 찢어져 전리품처럼 성벽에 걸렸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세 아들도 똑같이 그렇게 참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젊은 병사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짓으로 말하는 그것만 가지고도 포상은 커녕 그 자리에서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신적권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권위는 엄중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신적권위를 인정하려고 온갖 고생을 다했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겼습니다. 그것 아니었다면 다윗의 고생은 좀 적을 것입니다. 나중에 왕이 되었지만 훨씬 더 일찍 왕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신적 권위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다윗보다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윗은 모든 왕들, 모든 통치자들의 위대한 표상이 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예,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윗의 권세, 다윗의 나라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으므로 다윗의 나라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적 권위를 위임한 또 하나는 부모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부모에게는 단지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육신의 부모로서의 권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모라는 존재에게 맡기신 신적 권위가 함께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대표적으로 신명기 21장에서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십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거역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두 곳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곳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모릅니다. 이와 반대로 에베소서 6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신6:2) 라
복을 약속하셨는데 맨 먼저 약속한 것이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신6:3) 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단지 육신의 부모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대홍수에서 노아가 살아남았습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많이 마셔 술이 취해서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을 다 드러내서 보이면서 잠에 빠졌습니다. 이 모습을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이 보았습니다. 보고 난 후 바깥에서 떠들어댔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노아의 두 아들이 같이 아버지 방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모습, 잘못된 모습을 안 보려고 옷을 어깨에 걸치고 뒤로 걸어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아버지의 그 벗은 몸을 보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술에게 깨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함은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무서운 저주를 했습니다. 좀 심하지 않습니까? 설령 좀 잘못했다고 해도 아버지가 자식에게 어떻게 그렇게 무섭게 저주할 수가 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아버지 노아가 한 저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내가 저주했다는 말씀입니다. 함의 아버지 노아에게 준 나의 신적 권위를 함이 인정하지 아니하고 무시하고 거역했기 때문에 내가 저주했다, 반면에 다른 자식들, 셈과 야벳은 아버지에게 내린 나의 신적 권위를 귀하게 여겼고 그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복을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부모에게는 여러분을 낳으시고 길러주신 권위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하나님 신적 권위가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십시오. 부모님이 잘했든 못했든, 내가 공경할만한 분이 못되든, 나를 버린 부모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부모는 부모이고 그 부모에게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신적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는 부모를 공경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큰 복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육신의 부모도 공경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내려주십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부모 공경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예비하신 귀하고 좋은 것을 많이 누리시고 이것을 여러분의 가까운 곳,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여러분 자녀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복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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