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하나님을 알자 (민수기 3:5~13 )

분당소망교회 2016. 2. 16. 10:12

  

 

 

하나님을 알자

 

 

 

민수기 3:5~13 

 

다른 사람과 달리 누구를 특별히 사랑한다는 편애는 참 좋지 않습니다. 누구를 편애하게 되면 편애하는 사람, 편애를 받는 사람, 편애를 받지 못하는 사람 등 관계되는 모두에게 아픔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나 편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편애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편애는 못난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만 갖고 있는 본성이 아닙니다. 위대한 사람들, 위대한 사상가들도 사실은 편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도 어떤 사람을 편애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다윗입니다. 다윗은 잘 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남의 아내를 불법으로 취한 것도 큰 잘못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잘못, 더 악한 죄는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악랄한 방법으로 그 남편을 죽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좋게 말해서 죽게 만들어버린 것이지 사실은 죽였습니다. 그 정도로 다윗이 악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가차 없이 버리실 것 같습니다. 벌 중에서도 아주 무서운 벌을 내리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벌을 내리긴 내렸지만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신 벌은 약한 벌인 것 같습니다. 마치 벌을 안 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벌주는 흉내만 내는 것 같은 벌을 주신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서 늘 다윗과 대비되는 사울을 보면 많이 다릅니다. 물론 사울이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 비하면 사울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윗에 비해서 사울에게는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편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편애가 유명한 것은 야곱에 대해서입니다. 로마서 9장은 리브가가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9:10-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였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9:12) 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9:13) 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방금 잉태되어 배속에 있는 두 아이를 두고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누가 잘못하고 더 잘 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1장에서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1:4)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집안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아무 까닭 없이 왜 이렇게까지 에서를 미워하시는 것일까요?

야곱에 대해서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까? 잘못한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많은 편애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이사야 43장이 가장 크게 편애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야곱 즉 이스라엘은 상당한 악과 죄를 저질렀고 하나님 앞에 못할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큰 어려움에 있었는데 이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사야 43장입니다.

먼저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1:1-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는데 3절 마지막에는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라는 대단한 말씀을 하십니다. 만약 네가 정말 잘못 해서 벌을 내릴 일이 있으면, 내가 누구에게 너를 내어줄 것이 있으면 나는 너를 내어주지 아니하고 너를 지키고 챙기고 보호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꼭 내어줄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 즉 이집트와 구스를 내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를 대하시는 모습을 보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위자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가 있습니다. 그 열두 지파 중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를 특별히 아끼셨습니다. 전쟁할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한 사람의 군인이 아쉬운 판에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군대에서 면제시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단한 일을 시키시려고 면제시키시는 것도 아닙니다. 회막을 설치하고 다시 뜯어내고 이동하고 관리하는 별것 아닌 일을 위해서 전체 이스라엘 인구 중 1/12인 레위지파를 군인에서 면제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특별대우를 하셨습니다.

인구조사 때에도 다른 지파는 대충 대충 인구조사를 하는 것 같지만 레위지파에 대해서는 아주 세밀하게 인구조사를 하셨습니다. 유다지파와 다른 지파에 대해서는 총 얼마이고 그 지휘관은 누구라고 정하신 것으로 끝이지만 레위지파에 대해서는 레위지파의 세 아들 각각 집안의 숫자는 얼마이며 지휘관은 누구 누구 누구 라고 일일이 지정해주셨습니다. 하는 일에 대해서도 다른 지파는 전체적으로 뭉뚱그려 동서남북 각각에 서서 전생을 한다는 정도만 말씀하셨지만 레위지파에 대해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세 아들 중 한 아들은 이런 일을 하고 또 한 아들은 이런 일을 하고 나머지 한 아들은 이런 일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에도 이런 제사는 예물은 이렇게 바치고 이렇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 저런 제사는 저렇게 제사를 지내고 저런 예물을 바쳐야한다고 얼마나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또 레위지파 중 제사장으로 임명된 사람의 옷을 어떻게 만들어야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셨고 모자까지 어떤 모자를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이 귀하긴 하지만 그냥 임명하면 되는데 제사장을 위임할 때에도 절차가 참 많았고 위임식 기간도 며칠간 위임식을 하게 하셨습니다. 아예 책 한권 전체를 레위인을 위해서 할애하셨습니다. 그것이 레위기입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을 대단히 중하게 여기시고 거기에 비해서 다른 지파는 별것 아닌 것처럼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은 내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레위인들이야 이런 소리를 들으면 좋겠지만 나머지 열두 지파는 어떻겠습니까? 여러 지파가 있는데 레위인은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다른 지파는 아니라는 것입니까? 여기서 생각할 것은 우리 하나님은 절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절대 그러실 리가 없는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특별한 일이 있다는 이것부터 생각하셔야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내가 보기에 그런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저렇게 귀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됨에도 그 사람이 귀하게 되고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된 것은 무언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얼른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왜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고 성경 전체에서 다윗을 왜 그렇게 노래 부르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보기에는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에게 예쁜 구석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에서가 더 예쁘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그렇게 편애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대하시는 그런 사람, 그런 일에 대해서 시선을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볼 줄 알아야합니다.

 

대표적으로 여호사밧의 일을 보겠습니다. 유대왕 여호사밧 시대에 모압을 비롯한 세 나라 연합군이 유대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유대로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유대왕 여호사밧도 두려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렇지만 적이 쳐들어오니 전쟁은 해야 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유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적들이 서로 싸워서 서로 죽여 연합군이 다 전멸하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를 성경은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탈취할새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으므로 각기 탈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거두어들이고’(대하20:24)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질 수밖에 없었던 전쟁, 지고 나면 아녀자들은 농락당하고 있는 재산을 다 빼앗길 수밖에 없는 그런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통쾌하게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많은 전리품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암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대하20:21-23)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실 것은 유대가 어떻게 승리했으며 무엇으로 승리했는가?’ 입니다. 얼핏 보면 유대에 일어난 그 놀라운 기적은 유대가 전쟁에 임할 때 찬양대를 만들어서 찬양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잘 아십시오.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는 그런 위기 가운데서 찬양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승리했으니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찬양대를 앞세워 나가라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전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믿음으로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찬양을 한다고 찬양한 그 믿음이 이 기적을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시선을 잘 두어야합니다. 겉만 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역대하 20장에서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20:15)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숫자는 적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대하20:17)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참 힘듭니다. 우리 자식 때에는 더 힘들 것입니다. 훨씬 어렵고 복잡한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옛날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잘 시켰다고, 좋은 대학 갔다고 스펙을 많이 가졌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물론 할 일은 다해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쥐고 계시고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엘리사 시대였습니다. 당시 중동의 패권을 가지고 있던 시리아 장군 중에 나아만이라는 장군이 나병에 걸렸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에 유명한 선지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선물을 싣고 엘리사를 찾아가서 부탁했습니다. 이때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한 마디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나아만 장군은 우리나라에는 요단강 같은 강이 없는 줄 아는가? 우리나라 물은 요단강 물보다 못한 줄 아는가?’ 라고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너무나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했다가 곡절 끝에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요단강에 가서 씻자하여 씻었더니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어린아이 살같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요단강 물이 그렇게 능력이 있다는 것일까요? 엘리사가 대단한 사람이라 엘리사가 말하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진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유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세상의 주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는, 기독교의 하나님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참 대단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위대한 일들도 많이 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에게 아이를 낳도록 해주었고 사람이 죽었을 때 살리기까지 했습니다. 그중에서 아주 놀랄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엘리사가 나이가 많아 죽어 장사를 지내고 세월이 한참 지나 엘리사 시신의 살이 다 없어지고 뼈만 남아있을 무렵이었습니다. 그런 무렵에 이스라엘은 나라가 약해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외국 도적떼들이 들어와서 약탈해도 정부는 이것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엘리사의 무덤이 있는 마을에 장례가 일어났습니다. 발인 하는 날 시신을 운구하는데 또 외국에서 쳐들어온 도적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신을 운구하던 사람들이 겁이 나서 운구하던 시신을 엘리사의 무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살아난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으로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엘리사는 그렇게도 위대한 능력의 사람이었다, 그런 위대한 사람은 죽어서도 그런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일까요? 그렇게 위대한 사람은 시신뿐만 아니라 뼈도 그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이런 잘못된 믿음이 기독교를 얼마나 훼손시키는지 아십니까? 지금도 많은 잘못된 믿음들이 기독교를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중세에는 성인 한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모였습니다. 그 모인 사람들 중에 시신을 훔쳐가려고 하는 도둑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시신을 한꺼번에 다 훔쳐가지 못하므로 시신 곁에 다가와서 머리카락 하나라도 가져가려고 했고 시신의 수의 한 조각이라고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시신을 모신 관을 부셔서 관 한 조각이라도 가지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낫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성인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를 얼마나 훼손시키는지 아십니까?

 

지금도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종은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 가면 다 해결할 길이 있다고 말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에게만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나에게는 하나님이 있다, 나에게는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있다.’ 라고 큰 소리 치십시오. 그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분이시다,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고 심지어 죽은 사람의 시체, 뼈만 가지고도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그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고 가는 사람이고 그 하나님께서 내 속에서 성령으로 계신다고 큰소리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그 믿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병이 많았습니다. 자기에게 온갖 병이 다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다른 사람의 병은 참 잘 치료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의 몸에 닿기만 해도 그 사람이 나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것, 재산, 명예, 학력도 포기하고 행복한 인생도 포기하고 하나님께 헌신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이런 능력을 주셨다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지금 전하는 그 예수, 여러분은 시시하게 보는 그 예수, 아무 힘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 그 예수가 바울에게 위대한 능력을 주었고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에까지도 그런 능력과 권세를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그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시고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속히 하나님께 달려와서 그 하나님을 여러분의 아버지로 그 예수를 여러분의 주인으로 모시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바로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를 특별 대우하시는 것 같습니다. 레위 사람을 아주 중요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 같은데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이 얼마나 귀한 사람이며 레위인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얼마나 귀한 하나님이신가? 한 사람이 급한 전쟁터에서 1/12나 되는 사람들을 빼내어 섬기게 할 만큼 그렇게 귀하고 중요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세상의 주인이시고 전쟁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닥쳐올 전쟁에 있어서 승리는 군사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군인의 숫자나 전술 혹은 다른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께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기독교인들이 이 힘든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세상의 주인으로 아는가? 아니면 대강 하나님을 믿는가?’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하나님을 세상의 주인으로, 인생의 주인으로, 내 가정의 주인으로, 내 아들딸의 주인으로 확실하게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능력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으로 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렇게 고백하는 삶을 사는가, 아닌가에 따라 승리 또는 패배의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이 편애적인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합니다. 논리나 근거는 아주 단순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이집트 아들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다 살려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죽을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살려주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첫아들들은 다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첫아들의 숫자만큼 레위인으로 가지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3) 라고 말씀하셨고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40-4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조금 심하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죽을 것을 안 죽이고 살려주었으니 다 나에게 내놓으라는 말씀입니다. 돈을 잃어버렸는데 그 돈을 찾아주면서 당신이 잃어버린 돈을 내가 찾아주었으니 그 돈을 내가 가지겠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런 잘못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 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태어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삼 명이 더 많은즉 속전으로 한 사람에 다섯 세겔씩 받되 성소의 세겔로 받으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그 더한 자의 속전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줄 것이니라’(46-48) 라고 하시는 말씀을 보면 끝전까지 다 계산해서 하나도 안 빠뜨리고 다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 첫아들들이 레위 사람보다 더 많으니까 그 사람들은 돈으로 계산해서 내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에는 틀림없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을 민수기 3장뿐만 아니라 성경 여러 군대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라,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었던 노예 신세인 여러분을 구원한 구원자가 나 여호와라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계산 때문이 아닙니다. 챙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색내시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있을 어려운 전쟁, 세상 전쟁, 인생전쟁에서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는가? 구원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것만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그 하나님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것이 힘든 세상에서, 어려운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알아야합니다. 그때에 재앙을 주어서 구원하였는데 한 가지 재앙으로 안 되니 두 번째 재앙을 주었고 그것으로도 안 되어 계속해서 열 번째 재앙까지 주니 이집트가 못살겠다고 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홍해가 가로 막혀있을 때 내가 열어주지 않았는가? 누가 했는가? 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잘 기억하라,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분들에게 홍해같이 여러분의 앞길을 막는 장애가 있으면 하나님 당신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게 되면 옛날에 이스라엘이 구원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처럼 여러분들에게도 승리를 주고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이 참 어렵습니다. 이미 상당히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이 어려운 세상에서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 자식들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웃는 얼굴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기에 실패했기 때문에 수많은 세월 동안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계속적으로 외적의 침입을 당했고 수탈을 당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3천년 가까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수백만 명이 아주 참혹하게 학살당했습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말한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6:3)’ 라고 안타깝게 안타깝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더 가까이 하나님께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낫게 하실 것입니다. 일어서게 하실 것입니다.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십시오. 더 깊게 아십시오. 더 많이 아십시오. 그리하면 세상길이 아무리 깜깜해도 하나님께서 새벽빛으로 비춰주실 것이고, 세상이 아무리 삭막해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딸을 촉촉한 은혜의 비로 적셔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