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으면(1)
고린도전서 13:4
작자미상의 시가 있습니다. ‘당신은 왜 오늘을 살고 있으며 내일도 살기 원하는가? 당신이 사랑하고 또 당신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어서 내일도 그를 보고 싶고 그와 함께 있고 싶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 외에 우리가 살아야할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 잘 썼습니다. 작자미상이지만 작자가 누군지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정도로 잘 쓴 것 같습니다.
인간은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내가 사랑할 때 그리고 사랑받을 때 행복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행복을 주는 사랑, 그런 사랑은 아무렇게나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렇게 하는 사랑으로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참된 사랑이라야 가능합니다. 나를 포기하고 나를 희생하고 끝까지 함께 하고 모든 것을 책임지는 아가페의 사랑이어야 가능합니다.아가페의 사랑을 할 때 사람은 가장 아름다워집니다. 실제 그 사람의 모습, 형편,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아가페의 사랑을 할 때 사람은 정말로 아름다워집니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이런 행복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이런 사랑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세상에 실망하고 사랑에 실망하고 환경에 실망하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그러나 이런 사랑을 하면 이미 입은 상처가 치유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아가페 사랑을 하십시오. 그러면 정말로 행복할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설명하십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참된 사랑, 아가페의 사랑이 있으면 여러분의 모든 것,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참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있고 저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의미 없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죽으라고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의미 없이 허망하게 끝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참된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참된 의미와 함께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진정한 사랑을 하고 진정한 사랑을 가지게 되면 여러분의 모든 것이 참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영적 은사를 먼저 생각해봅니다.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 가운데 그 받은 영적 은사, 그렇게 아름답고 귀하고 다른 사람들이 사모하고 부러워하는 영적 은사가 아름다운 은사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품격이 없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치한 영적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방언 은사를 받은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 방언 은사 받은 교인들이 예배당에서 크게 소리 내어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이만저만 소란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인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일종의 열등감, 자격지심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방언 은사 받은 사람들은 좋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 것입니다. 결국 상처를 주는 은사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교회 여기저기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떠들어대니 방언을 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나는 방언 은사 하나 받지 못한 못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방언 은사를 주시지 않으셨으니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왜 주시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또 방언 은사를 받아 소리 내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방언으로 하려면 집에서 혼자 조용하게 할 것이지, 어른들도 그렇게 가르쳤고 성경에서 그런 말씀을 여러 곳에서 비슷하게 말씀하셨는데 왜 공적인 예배 자리에서 크게 방언기도해서 예배분위기를 망치는가?’ 라고 말하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방언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방언을 하면 사실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언으로 서로 먼저 말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음식점에 같이 가면 서로 말하려다 보니 이중삼중으로 말하게 되어 한쪽에서는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저쪽에서는 세 사람이 이야기하고 가운데는 또 따로 이야기하는 문제까지 생기고 맙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하는 사람들이 꼭 그러했습니다. 또 누가 방언하는 것을 듣고 저것은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지적을 받은 사람은 기분이 나빠 서로 다투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믿어보겠다고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 중 교인들이 모여 알지도 못하는 소리로 떠들어대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어 미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일어서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방언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기가 받은 은사가 더 나은 은사라고 자랑하고 또 시기하고 경쟁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1:27-29)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손으로 은사를 주신 사람이 있고, 팔로 주신 사람이 있고, 눈으로 은사를 주신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각각의 은사를 주셨는데 서로 손이 낫다, 팔이 낫다고 싸우니 어떻게 온전한 몸이 되겠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교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난 후 멀리서 선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듣게 됩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도바울은 속상하고 가슴 아프고 안타까워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14:23)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약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14:27-28) 라는 편지를 했습니다. 방언으로 꼭 말하고 싶으면 두 사람 이하, 많으면 세 사람 정도만 방언으로 말하든지 기도하든지 하라는 것과, 그렇게 방언으로 말하든지 기도할 때에도 반드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혼자서 하라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방언뿐만 아니라 영적은사도 그렇고 실제로 세상적인 은사도 많이 받았습니다. 재산도 많이 받았습니다. 세속적인 은사, 영적인 은사를 많이 받았지만 고린도교회는 수많은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그 까닭을,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많은 복을 받고도 복을 복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기왕 영적은사를 사모하고 영적은사를 받고 싶으면 최고 중의 최고 은사를 사모하고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은사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고 사랑의 은사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사모하려면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고,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받으라고 권하십니다.
여러분,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인생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인생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달라집니다. 먼저는 사랑의 은사를 받아서 사랑이 여러분에게 있으면 그 여러분에게 있는 사랑의 은사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먼저 세상적인 복을 생각합니다. 재산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재산 중에 복 받지 못한 재산, 축복이 아닌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렇게 좋은 재산을 받고서도 진정한 복으로 만들지 못한, 축복이 되지 못한 재산이 많습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병들었다가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두고 바깥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못해도 속으로 저 사람은 계속해서 병저 누워있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고 말씀하신 사람이 있었는데 비슷한 말입니다. 복 받지 못한, 축복이 되지 못한 건강이 많습니다. 자녀 또한 귀하고 복주지 않는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귀한 자녀를 복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일들이 많습니다. 참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참된 사랑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저 말로만 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모양으로만 하는 사랑 때문에 부모도 행복하지 못하고 자녀도 행복하지 못한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을 여러분들도 이미 언론을 통해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대는 참 수고가 많습니다. 잠시 찬양을 하기 위해서 최소 1시간 전에 와서 연습을 해야 하고, 끝나고 나서도 1시간 이상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다보면 때로는 지휘자가 야단칠 때도 있고 대장이 이런 저런 소리할 때도 있습니다. 가끔 괜히 찬양대를 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은사를 받게 되면 찬양하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준비하는 것이 좋고 찬양하는 것이 좋고 연습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찬양대를 했더니 봉사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복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이렇게 됩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가 참 쉽지 않습니다. 선생이라고 알아봐주는 사람도 없고 힘들기도 합니다. 자기 돈도 들어가고 아이들을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늘 기도해야하고 열심히 준비해도 아이들이 잘 따라주지 않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 한 것을 후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달라집니다. 아이들이 너무 예쁘고 교사라는 자체가 너무 좋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가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얼마나 의미 있고 보람이 있는지 모릅니다. 주일이 기다려집니다. 사랑이 없으면 주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두렵습니다. 차량안내하시는 분들도 참 쉽지 않습니다. 여름이 되면 점점 더 힘들어지고 겨울이 되면 또 얼마나 춥습니까? 안내 하는 것, 청소하는 것 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있으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어떤 사역을 하든지 간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행복하게 됩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사람의 인격이 달라진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인격이 달라진다는 말 얼마나 탐나는 말입니까? 정직하게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 가운데 고매한 인격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고민을 하지 않으신 분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다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참 아름다운 인격의 사람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살다보면 잘 되지 않습니다. 속에 인격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인격이란 너무나 탐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너무 약한 존재입니다. 상황과 여건이 좋아지면 큰소리치고 교만하다는 말을 정도가 되는 일들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습니다. 그러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상황이 안 좋아지면 기가 죽어 소금을 절인 배추처럼 초라해지고 비굴해집니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변하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고 가슴 아픈 일이 있어도 여전히 품의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더 품위가 좋아지고 멋짐이 나아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격에서 나옵니다. 속에서 나오게 됩니다. 마치 발동기처럼 돌려서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그런 인격을 소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성경은 사랑의 은사가 있으면 그런 인격을 소유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어떤 인격이 따르는가에 대해서 고린도 전서 13장 4절은 다섯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사랑이 있으면 오래 참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래 참는다는 말의 원어인 헬라어는 ‘마크로뒤메오’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참는다는 뜻과 함께 인내한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이 아니라 잘 참는다, 잘 인내한다, 잘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참 큰 복이고 대단한 인격입니다. 오래 인내하고 잘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루이스 스미스는 오래 참음이란, 창조적인 삶의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말인데도 표현을 참 잘했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창조적인 삶의 예술이라고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오래 참음이 고통의 원인인 죄나 악과 대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참 멋집니다. 그는 악과 죄와 대결하는 예술이라고 말했습니다. 싸움을 하면 얼마나 힘듭니까?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래서 오래 참음이란 삶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로, 오래 참음이란 고통의 현장을 수용하여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경험해 보았겠지만 고통이 그렇게 쉽게 물러갑니까? 쉽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엄청나게 힘듭니다. 고통은 암과 같습니다. 암에 대해서 가장 좋은 치료 중 하나는 암과 싸우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어떻게 하든 간에 암을 떨어뜨리려고 싸우다보면 암은 강아지와 같아서 재미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암을 쳐다보지도 않고 내버려두면 재미가 없어서 도망갑니다.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을 이겨내고 벗어나려고 하다보면 괴롭기만 하고 다른 사람까지 힘들게도 합니다.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것, 고통의 현장을 수용하는 삶의 예술이라고 하는 이 표현, 멋진 표현입니다. 사랑에는 이런 오래 참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침내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삶의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도 그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삶의 예술이라고 표현합니다. 참 좋습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없애는 것은 쉽지 않지만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게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기다리는 것, 참는 것, 인내하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저는 자주 솔베이지의 사랑이 그립습니다. 정말로 그립습니다.
노르웨이 산간마을에 아름다운 가난한 농부 페르귄트와 아름다운 소녀 솔베이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둘은 사랑했습니다.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페르귄트는 사랑하는 여인 솔베이지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갖은 고생 끝에 10년 만에 돈을 모아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오는데, 돌아오다 국경에서 산적을 만나 돈을 다 빼앗겼습니다. 간신히 목숨만 건졌습니다. 페르귄트는 차마 빈손으로 솔베이지를 만날 수 없어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이 하나도 되지 않아 평생 걸인으로 살다 늙고 병들고 지쳐 더 이상 사랑하는 여인 솔베이지를 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어머니가 사시던 오두막에 도착해서 문을 열자 그 방안에는 어머니 대신 사랑하는 여인 솔베이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백발이 된 솔베이지가 늙고 병들고 지친 페르귄트를 반갑게 맞이해줍니다. 병든 페르귄트는 그날 밤 솔베이지 무릎에 누워 눈을 감습니다. 그리던 사람 페르귄트를 안고 솔베이지가 노래합니다. 그것이 솔베이지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솔베이지도 페르귄트를 따라서 가고 말았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운 기다림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기 힘든 오래 참음이 사랑 속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성경은 두 번째로 온유해진다고 말씀합니다.
온유는 헬라어로 ‘크레스토스’이입니다. 온화하다, 친절하다, 한국적인 의미에서 있어서는 선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 것은 인간이란 존재는 온유하고 온화하고 친절하고 선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온유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친절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선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도리어 완악해지고 강퍅해지고 불친절해지기를 더 좋아하는 존재인 것 같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람이 온유하고 온화하고 친절하기 얼마나 어려운가 말하는 재미있는 한 예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프랑스 니스의 한 카페에 ‘커피!’ 7유로!, ‘커피 플리즈’ 4.25유로! ‘헬로 커피 플리즈!’ 1.4유로! 라는 가격표가 붙었다고 합니다. ‘커피, 라고 반말하는 손님은 만원 내십시오. 커피 주세요 라고 말하는 손님은 6천원 내십시오. 안녕하세요? 커피 한 잔 주시겠어요? 라고 말하는 손님은 천원만 내시면 됩니다..’ 종업원들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힘들고 속상한 일들이 많았으면 이렇게 했겠습니까? 성경은 사랑은 온유하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온유해지고 친절해지고 선해집니다.
세 번째는 사랑이 있으면 시기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시기라는 말의 헬라어는 영어와 비슷한 ‘젤로오’입니다. 여기에는 질투하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다툼이 없다, 시끄러움이 없다는 의미까지 같이 있습니다. 시기가 있으면 추해집니다. 시끄러워집니다. 소란스러워집니다. 사람이 살 곳이 되지 못합니다. 나도 추해지고 다른 사람도 추해지고 나도 시끄러워지고 다른 사람도 시끄럽게 만듭니다. 사회를, 가정을 시끄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정말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고 추해질 수밖에 없는 곳에, 싸움이 있고 다툼이 있을 그곳에 이상하게 다툼이 안 생깁니다. 싸움이 안 생깁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 요나단이 그러했습니다. 사울의 아들이므로 사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 요나단이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 다윗이 혜성같이 등장했습니다. 다윗은 나라의 위기에 혁혁한 공로를 세워 온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요나단의 왕위 계승에 가장 큰 장애가 말할 것 없이 다윗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손톱만큼도 다윗을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눈곱만큼도 적대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아끼기 한이 없었습니다. 위기 때마다 앞장서서 다윗을 보호해주었습니다. 요나단이 어떻게 그런 사랑과 아낌을 줄 수 있었을까요? 사무엘상 18장 3절은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라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것입니다. 아무 계산 없는 사랑, 나를 포기하는 사랑, 나를 희생하는 사랑,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랑, 모든 것을 책임지는 사랑, 요나단이 왕자로 있으면서 다윗에게 그런 사랑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단은 다윗을 그렇게 아낄 수 있었습니다. 시끄럽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요나단의 그 참된 사랑을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나중에 요나단이 전사하였을 때 다윗이 요나단을 그리워하면서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1:26) 라고 슬퍼했습니다. 시기와 질투, 다툼과 추한 것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아름다움으로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해서 그러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추해집니다. 시끄러워집니다. 사랑이 있으면 평화롭습니다. 행복해집니다.
네 번째, 성경은 사랑이 있으면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랑은 헬라어로는 ‘헤르페로스’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허풍떤다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아첨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양쪽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허풍떠는 사람이 있고 또 뭐 좀 되는 사람에게는 도에 넘게 아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허풍 떨고 아첨하는지 아십니까? 속이 비어있어서 그렇습니다. 내 속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자꾸 겉으로만 드러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가지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정신질환입니다. 자기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만 의식합니다. 참으로 딱한 사람입니다. 정말로 천한 인생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잘하는 사람 같지만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나’가 없습니다. 심지어 내 가정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만 있습니다.
그러나 구제불능일 것 같은 그런 사람이라도 진실한 사랑, 이 아가페의 사랑을 받게 되면 달라집니다. 허풍 떨 것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비굴하게 아첨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당당해집니다. 멋있어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비어있던 속에 대단한 것으로 채우기 때문입니다. 최고 중 최고인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겁나는 것 없습니다. 떠들 것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일 것 없습니다. 최고인 하나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사랑이 있으면 교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교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겸손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는 겸손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교만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최고의 교만은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제불능의 교만은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참으로 말을 잘했습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정확하게 해당되는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작가 마크 트웨인이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 확실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다.’ 라고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 자신, 내 가정, 이 사회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는 적어도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입니다. 참 무섭습니다. 이것이 나도 힘들게 하고 내 사랑하는 사람도 힘들게 합니다. ‘적어도 이것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이 교만, 이것이 이 사회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아십니까? 그러나 이 교만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교만이 사라집니다. 4절에서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마틴 루터 킹 2세가 ‘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랑할 줄 아는 가슴만 있으면 된다.’ 라고 말합니다. 그냥 사랑이 아닙니다. 나를 포기하고 내가 희생하고 끝까지 함께 하고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만 있으면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너희는 더욱 큰 은혜를 사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합니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사랑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위대한 사람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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