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시편 23편
살다보면 때로는 너무 힘들 때가 있습니다. 가슴이 답답할 때, 하소연할 데도 풀 데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참 대단했던 엘리아였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수백 명을 상대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던 엘리야였습니다. 3년 이상이나 비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이 엘리야가 기도하자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대단했던 엘리야가 자기를 죽이고야 말겠다던 왕의 아내 한 마디 말에 극도로 위축되어 나라 끝까지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왕상19:4) 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자기를 죽여 달라는 기도할 정도가 되었으니 이 믿음 좋은 사람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이렇게 기도했겠습니까?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해서 힘들 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공급받았던 다윗이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곰과 사자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같이 붙어서 싸웠습니다. 그 일을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삼상17:34-35)
블레셋의 대단했던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독할 때 이스라엘 장병들 모두 다 꽁무니를 감추고 있었을 때 다윗은 나서서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17:36) 라고 큰소리쳤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짐승의 밥이 되게 하겠다고 큰 소리쳤는데 다윗은 큰소리만 치고 만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골리앗을 단 번에 처치했습니다. 그렇게 대단했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이 어느 순간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약하고 초라한 사람이 됩니다. 심지어는 자기 한 목숨 살려고 지금까지 원수처럼 싸웠던 블레셋에 망명을 갔습니다. 망명을 갈 수는 있지만 어떻게 지금까지 그렇게 원수처럼 싸웠던 블레셋에 갈 수가 있습니까? 나라 비밀이 다 알려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망명을 가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자 아주 희한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모습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다윗이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미친 시늉을 하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서는 발작을 일으키고 성문짝에 글자를 되는 대로 써갈기기도 하며 수염에 침을 흘리기도 하였다.’
다윗이 이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대단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입니다. 옛날에 대단했다, 크다, 위대하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순간 아차하면 무너지고 형편없는 사람이 됩니다. 걸려서 넘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못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엘리야에게 이런 일이 있었고 그렇게 대단했던 다윗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면 누가 그런 일에서 예외가 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일이 있다면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아직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나에게도 언제든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합니다. 알지 못하고 당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고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외가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라는 것입니다. 넘어졌다고, 무너졌다고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서 더 멋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잘못할 수 있습니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넘어졌다하더라도 다시 일어서야합니다. 실패했더라도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이미 초라하게 되었지만 초라하게 인생을 끝낼 수 있습니까? 이전보다 훨씬 멋진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최고의 모델은 다윗입니다. 설문을 통해서 성경 안팎으로 가장 위대한 인물 1번으로 꼽힌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다윗이지만 그러나 그 다윗의 일생은 파란만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나라가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은 때에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 누구도 감히 상대하려고 나서지 않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에게 생명을 건 대결을 걸었습니다. 수도 없이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는데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당하고 또 당했습니다. 다윗이 나섰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쳐들어올 때마다 나서서 블레셋을 괴멸시켰습니다. 다윗이 있는 한 다시는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미움밖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인생 살면서 이런 경험하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수고하고 생명을 바치도록 일했는데 오해받고 내쫓김 받고 버림받는 일들도 있고, 사람에게도 그런 일을 당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다윗은 보통 사람보다 더 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결혼하려고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이제 결혼식만 올리면 되는 그런 그때에 장인이 딸을 빼앗아 다른 남자에게 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을 당했던 남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충성을 다 바쳐 심복했던 왕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그 모든 일들이 끝이 났습니다.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적이 바깥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었습니다. 부하의 아내와 악한 죄를 짓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죄를 숨기기 위해서 죽도록 충성을 바친 부하를 비참하게 죽게 만들고 맙니다. 이보다 더 악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이 이 정도까지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하나님께서 ‘이제는 내가 너를 버렸다, 너는 끝이다.’ 라고 선언하시고 무서운 징계를 하였습니다. 결국 다윗은 큰 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했던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까요? 이것은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죽도록 쳐다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을 쳐다보았더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러신 분입니다. 다시는 안 보시겠다고 하셔도 또 찾아가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또 하나님께 엎드리고 무릎 꿇으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것을 고백한 말이 본문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고백은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나는 끝난 사람이다, 더 이상 희망도 소망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고백입니다.
사람이 넘어지는 것처럼 양들도 종종 넘어집니다. 양들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 참 가련합니다. 풍뎅이나 바퀴벌레가 뒤집어지면 발버둥 치면서 일어서려고 하지만 뱅뱅 돌기만 할 뿐 일어나지 못합니다. 바퀴벌레는 그렇게 예쁜 곤충은 아니지만 그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이때만큼은 살라고 가끔 뒤집어줍니다. 양들이 그렇습니다. 뒤집어지면 일어나려고 애를 쓰고 힘을 쓰고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양들이 그렇게 잘 넘어지는 것은 아닌데 유독 잘 넘어지는 양들이 있습니다. 양들이 그렇게 넘어지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목자가 길을 인도할 때 잘 따라가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다른 길로 가는 양들이 있습니다. 특히 양들 중에 털이 유독 많은 양들이 있습니다. 사진 등에서 털이 많은 양들을 보면 참 하얗고 예쁘지만 사실 양은 더럽기 짝이 없습니다. 온갖 오물이 다 묻어있고 아프리카나 어디를 가도 흰 양은 보기 힘듭니다. 털이 많고 오물이 많이 묻어있고 더러운 양들이 걸려서 뒤로 잘 넘어집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목자들이 틈틈이 양의 털을 손질해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양들 중에서 목자가 자기 털을 손질해주는 것을 싫어해서 도망가는 양들입니다. 그러다가 걸려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또 양들은 대개 순진한데 가끔씩 욕심 있는 양들이 있습니다. 이 양들은 목자가 인도하는 풀밭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어디 더 좋은 풀이 있는지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양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목자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편한 곳에 가려고 하고 더 좋은 장소를 찾으려고 하고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는 욕심 있는 양들이 있습니다.
이런 양들은 대체로 몸이 비대합니다. 이 비대한 양들에게는 문제가 참 많습니다. 먼저 비대하면 사람이나 양이나 건강하지 못합니다. 욕심만 부리면서 목자를 따라가지 않고 자꾸 게으름 부리고 더 편하게 살다보니 양들이 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산성도 약합니다. 좋은 양을 생산하지 못하고 거기다 비대한 양들은 필요 이상의 많은 목초를 소비합니다. 다른 양들을 밀어내고 욕심을 부리면서 혼자서 목초를 많이 먹습니다. 이런 비대한 양들은 몸이 무거워 몸의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넘어집니다.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자주 실족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실패할 수도 있지만 자주 실패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직장에 가도 저 직장에 가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배우자와도 자식과도 좋은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문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주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방황하면서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지만 갈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넘어지는 이유도 양들이 넘어지는 이유와 거의 비슷합니다.
먼저는 교만입니다. 자기가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보다 더 많이 안다, 더 많이 생각한다, 더 많이 경험했다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방식이 더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잘 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 결과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내의 말도 듣지 않고 이웃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당연하게 절대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절대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교회 안의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다니긴 해도 하나님을 절대자로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절대 주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당연하게 하나님께 지도를 구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저 심리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맙니다. 하나님께 매이기를 싫어합니다.
주일 성수를 그냥 말로만 듣고 맙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제대로 믿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적어도 주일은 성수해야한다는 것은 기독교적으로 다 정해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교회에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결정할 일이 있으면 한 사람이 그냥 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회의하고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결정하는데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그냥 갑니다. 잘난 것 같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기 때문에 우선은 편합니다. 그러다가 한 번 걸려 넘어지면 크게 걸려 넘어집니다. 그때서야 후회하는데 돌이키려면 많이 힘듭니다.
겸손해야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알아야합니다. 교회가 크게 잘못 되지만 않았으면 교회에 순종할 줄 알아야합니다. 물론 간혹 교회라는 이름을 빌어서 전횡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경우만 아니라면 순종할 줄 알아야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합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이고 얼마나 존귀한 하나님인줄 잘 알아야합니다.
여러분이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그냥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 위대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었는가?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불러주셨는가?’ 라고 생각하고 고마운 줄 알아야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좀 모자라는 사람 같고 바보 같이 보여도 이런 사람들이 희한하게 잘 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우선은 잘난 척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지도하는 그 길이 좋은 길임을 알고 따라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합니다. 거기에 지혜가 있고 거기에 평안이 있고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사람들이 넘어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양들과 같이 욕심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욕심이 있지만 지나친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먼저는 물질에 대한 욕심입니다. 이것은 참 문제입니다. 물질 자체는 귀한 것이고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물질에 대한 ‘욕심’입니다. 물질을 자꾸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더 챙기고 더 귀하게 여기고 그것만 붙들고 있다 보니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머릿속에는 물질 여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에 너무 관심 가질 것 아닙니다. 재물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절박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재물은 참 귀하지만 절박함만 넘어서게 되면 재물은 많은 경우에 고통만 줄 뿐입니다. 이것을 잘 아십시오.
물질에 대한 욕심..이겨내야 합니다. 그저 최소한의 것만 있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욕심 부린다고 채워지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욕심은 안일의 욕심입니다. 참 무서운 욕심입니다. 어떻게 하든 조금 더 쉽게 살려고 하고 더 편하게 신앙하려고 하는 안일의 욕심이 있습니다.
‘탐욕의 경제원칙’이 있습니다. 수고는 제일 적게 하고, 신앙생활은 제일 적게 하고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좋을 것 같지만 절대로 좋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산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횡재가 세상에서는 어쩌다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엄격하시고 얼마나 정학하게 보시는지 모릅니다. 최소의 수고로 최대의 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수고도 하지 않으면서 복을 받고 잘되려고 하는 일,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욕심을 부리다 보니 넘어지고 자빠지고 시험 걸리고 그러면서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늘 방황하게 될 뿐입니다.
또 영적인 탐욕이 있습니다. 제일 큰 문제입니다. 신앙하는 사람들 중에 더 좋은 말씀이 어디 있는가? 양들처럼 더 좋은 풀이 어디 있는가? 어떻게 하면 더 큰 은혜를 받을까? 여기저기 찾아다니면 우선 은혜를 받는 것 같지만 그런 사람들은 영적인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영적 방황은 끝나지 않습니다. 평생 지속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는 깊은 공허함이 있습니다. 언제나 채워지지 않고 목마른 공허감이 있습니다. 영적인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습니다. 욕심을 이겨야합니다.
너무 편한 길을 찾을 것도 아닙니다. 만족할 줄 알아야합니다. 때로는 일부러 힘을 써서 편한 길을 거부할 줄도 알아야합니다. 쉬운 길, 넓은 길을 포기할 줄 알아야합니다. 멋진 사람들이 이런데서 나옵니다. 오히려 내가 자원해서 힘든 길, 어려운 길, 다른 사람들이 하려고 하지 않을 일들을 맡을 때 깊은 만족이 있습니다. 작은 손해는 좀 보아야합니다. 손해를 너무 안 보려고 하다보면 큰 것 손해보고 큰 것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것 좀 줄일 줄도 알아야합니다. 한평생 재산이 자꾸 늘어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썩고야맙니다. 썩은 냄새가 나고 결국 나도 내 자식들도 망치고 맙니다. 만족할 줄 알고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재산을 줄일 줄도 알아야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건강을 잃어버릴까? 이렇게 하다 내 건강 해치면 어떻게 할까? 연연하는데 누가 건강을 지켜줍니까? 지금까지 누가 건강을 주셨습니까? 건강에 너무 연연할 것 아닙니다. 너무 연연하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양들이 넘어지는 과정을 말씀드리면 참 재미있습니다. 양들이 잘 가는 풀밭에는 움푹하게 패어지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 곳을 보면 평평하면서 한쪽은 패어져 각이 조금 있습니다. 거기에 누워 몸을 비비려고 합니다.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누워있으면서 자칫 균형을 잃으면 뒤로 넘어지고 맙니다. 다리가 짧아서 짚을 수가 없어서 일어서지 못합니다. 움푹하게 파인 곳에는 그렇습니다. 이럴 때는 아주 위험하게 됩니다. 양들이 자빠져서 버둥거리는 동안에는 위속에 가스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가스가 점점 더 많아져 가득 차게 되면 피가 돌지 않아 사지가 마비됩니다. 심지어 더울 때는 서너 시간 정도만 누워있으면 죽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맹수입니다. 넘어지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소리를 목자가 아니라 맹수가 먼저 듣습니다. 먼저 달려오는 것이 목자가 아니라 맹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락없습니다. 이때 양이 살 수 있는 길은 목자밖에 없습니다. 목자가 와서 구해주어야 합니다. 전혀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양이 안 보이면 머릿속에 온갖 불안감이 스치게 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주님께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15:4)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을 가만히 보면 ‘그렇다고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가면 어떻게 하는가?’ 라는 생각이 당장 듭니다. 그런데 실제 한 번 잃어버리면 이 마음을 압니다. 다른 생각이 안 나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온통 그것만 있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혹시라도 구덩이에 빠졌을까? 짐승에게 물려갔을까? 낭떠러지에 떨어졌을까? 물에 빠졌을까? 온갖 불안한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 양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목자가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양들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 양을 기르는 목자에게는 치명적입니다. 목자로는 취직을 못하고 양을 팔아먹었다는 오명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을 말한 것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는 3절 말씀입니다. 때문에 목자는 양을 위해서는 생명을 바칠 정도로 헌신을 다합니다.
양을 오랫동안 길렀던 다윗은 그 목자의 심정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이 다윗이 인생 살아가는 동안 참 여러 가지 위기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이 있는데 오늘 본문 시편 23편 앞 22편입니다.
먼저 1절과 2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나 처절하고 절박합니까?
또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6-8절) 라고 사람들이 마구 놀려대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2절에서 18절에서는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라고 형편없이 되고 말았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주 죽을 맛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무엇을 했는가?’입니다.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시편 22편 10절과 11절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날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하나님밖에 나를 도울 자가 없다고 하나님께 엎어진 것입니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시22:19-21).. ‘하나님 제발 나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세상에서는 이것이 한탄밖에 되지 않고 하나의 덧없는 희망이 되고 소망밖에 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그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빛이 나와서 다윗을 가득 비추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받은 다윗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세상은 똑같고 환경은 똑같지만 마음속에 평화가 오고 확신이 서게 됩니다.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죽을 위기에 있는 나를 절대로 그냥 두시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회복이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일어서게 됩니다.
그것을 노래한 것이 오늘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
여러분, 살다보면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여러분들에게 닥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절대로 땅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하늘을 보십시오. 가만히 보면 거기에서 무언가 보입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하나님을 보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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