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즐거워하라..
신 24:19-22
저는 가끔 뒷산에 올라갑니다. 아주 낮은 산인데 어느 날 이 산에 올라가서 혼자 뮤지컬을 한 적이 있습니다. ‘토끼야 토끼야’ 라는 동요입니다. 제가 가사를 살짝 바꿨습니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산 속의 다람쥐야.
겨울이 오면 무얼 먹고 사느냐.
흰 눈이 내리면 무얼 먹고 사느냐‘
다람쥐가 대답을 합니다.
‘겨울이 되어도 걱정이 없단다.
엄마랑 아빠가 겨울동안 모아둔
맛있는 먹이가 얼마든지 있단다.’
여기까지는 가사만 살짝 바꿨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본래 없던 이야기입니다.
엄마 다람쥐가 아기 다람쥐에게 슬픈 얼굴로 말합니다.
‘아가야 이 겨울을 날 먹이가 없단다. 어떡하지?’
아기 다람쥐가 엄마 다람쥐에게 말합니다.
‘지난 여름 엄마랑 아빠가 모아두지 않았어요?’
엄마 다람쥐가 아기 다람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하다 아가야.
사람들이 숲속을 뒤지고 다니면서
밤과 도토리를 다 주워가서
겨울에 먹을 양식을 하나도 모아두지 못했단다.‘
얼마 전 뒷동산에 올라갔을 때 한 할머니가 숲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렇게 다 갖고 가면 짐승들이 뭘 먹고 사나?’ 숲 속을 다니면서 도토리를 줍고 있던 사람을 향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할머니의 그 말을 들을 때 북한에 자주 다니는 사람이 한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북한의 산과 들에는 동물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루도 없고 산돼지는 물론이고 산토끼와 다람쥐도 전혀 없답니다. 심지어는 새들도 없다고 합니다. 그 일을 두고 여러 사람과 함께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한 말들은, 북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다 잡아 먹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다보니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산이나 들의 동물들은 잡아먹을 수 있어도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까지도 그렇게 다 잡아먹어 한 마리도 없을 수가 있는가? 또 북한 사람들 새 잡는 실력이 그렇게 대단한가?’ 그러다 마지막 내린 결론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북한에 들짐승이나 새가 없는 까닭은 북한의 야생 동물 먹이 사슬이 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산과 들의 먹을 만한 것이라면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어떤 것이든지 다 쓸어간 결과 먹이 사슬이 붕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생동물이 살 수 없는 산과 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야 그렇게까지 되진 않겠지만 뒷동산에서 소리치던 할머니의 걱정을 꼭 지나치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들은 추수할 때에 추수하다가 덜 거둬드린 것이 있으면 그것이 곡식이든지 감람나무의 열매든지 포도든지 간에 그대로 내버려둬라, 갖고 오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남겨둔 그것을 나그네나 고아나 과부 등 없는 사람들, 의지할 데 없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기독교의 신자들은 가난한 사람, 없는 사람,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밖에서 곡식을 밸 때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라. 나그네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신24:19),
또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남은 것을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신24:20),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두라‘(신24:21)
똑같은 말씀을 세 번이나 의도적으로 힘주어서 강조하셨습니다. 잘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그렇게 하면 좋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두라, 남겨두라, 가져오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그 명령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이집트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농사짓게 하시고 돈 벌고 집 짓고 잘살게 해주셨습니다. 본래는 아무것도 없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자격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아무것도 없는 종이었던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돈을 벌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명령을 할 자격이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말씀에 순종할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신명기 24장 22절에서 ‘너는 애굽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의무를 가졌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본래는 악의 종이고 어둠의 종이고 멸망의 땅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던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거기에다 풍요를 주셨습니다.
특별히 한국에는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큰 풍요와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풍요를 마음껏 누리면서 그중 일부를 떼어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그 사람들이 먹고 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상당한 경고가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지금 나의 소유라고, 내가 받은 것이라고,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계속해서 내 소유가 될 것이다, 내가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이후에 다시 누릴 수 없고, 잃어버릴 수도 있고, 예전의 종 되었던 어둠 속, 이집트의 노예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한 말씀입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마음속으로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자기 곳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두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부자는 이제 여러 해에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마시고 먹고 즐거워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이 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12:20)
그리고 이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을 것이리니’(눅12:2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편안하고 넉넉하고 재미나게 살다가 지옥불에 떨어진 순악질 여사가 있었습니다.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저 위에서 아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이 순악질 여사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도 일평생 살면서 남 도와준 적이 한 번은 있었습니다. 밭에서 파를 뽑는데 거지가 와서 구걸하기에 파뿌리 하나 그것도 썩은 파 하나를 준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순악질 여사가 하나님께 ‘하나님, 저도 생전에 착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제가 거지에게 파뿌리 준 것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라고 항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항의를 들으시니 그 말이 맞았습니다. 천사를 시켜서 파뿌리를 가지고 가서 그 여자를 뜨거운 지옥 불에서 건져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가 갔습니다. 뜨거운 불속에 있는 순악질 여사에게 파뿌리를 내밀었습니다. 순악질 여사는 파뿌리 한 쪽 끝을 잡고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지옥에서 뜨겁게 고생하던 사람들이 순악질 여사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순악질 여사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파뿌리가 시원찮아서 썩어서 곧 끊어질 것 같았습니다. 다리를 흔들어댔습니다. 그러자 주렁주렁 달고 오는 사람들 중 맨 밑의 사람부터 하나씩 뚝뚝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마지막까지 다리를 붙들고 안 떨어집니다. 그 사람마저 떨어뜨리려 그 사람의 얼굴을 걷어 차버립니다. 기어이 마지막에 다리를 붙들고 올라오던 사람마저 떨어지고 맙니다. 이것을 본 천사가 손에 힘이 빠져 파뿌리를 놓쳐버립니다. 여자는 결국 뜨거운 지옥불에 다시 떨어졌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베풀어야 합니다. 신자들 중에서 넉넉한 사람들은 더욱 그런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 까닭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주신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 하나님으로부터 넉넉하게 받은 것이 다 자기 것이 아니라 본래가 다 하나님 것인데 선한 일하고 좋은 일 하라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들은 더욱더 이런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부로는 돈을 벌었지만 악한 일로 번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음부에 떨어져서 죽을 고생을 하는 까닭은 자기의 재산이 하나님의 것인지 모르고 그 재산을 가지고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입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25:42-43) 라고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뒤에 왼편으로 간 사람들이 영원한 불에 들어 간 까닭은 그 사람들이 다른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에게 물 한 모금 제대로 주지 않았고, 도와주지 않았고, 위로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평소에도 항상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돌보고 도와주고 그들에게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농부들에게는 매년 추수가 있습니다. 그때가 농부들에게는 가장 즐겁고 행복할 때입니다. 이런 농부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추수를 할 때 여러분들만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불쌍하고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도 함께 기뻐할 수 있게 하라, 함께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라, 여러분들이 즐겁고 배부르면 그 사람들도 함께 배부르고 즐겁도록 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신16:10~11)
칠칠절은 우리나라에서는 맥추절이라고 합니다. 추수감사절이 이전에 맨 처음 열매 거둘 때입니다. 맨 처음에 추수를 해서 열매를 얻으면 참 좋지 않습니까? 회사 취직한 후 첫 월급을 받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럴 때 혼자서만 쓰지 말고 나눠 쓰라는 말씀입니다.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라’(신16:13~14)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신명기 14장에서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8-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년 십일조를 드리는데 평소의 십일조에 더해 3년마다 십일조를 한 번 더 드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매 삼년마다 십일조를 한 번 더 내어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 같은 사람들이 넉넉하고 배부르게 그 사람만을 위해서 준비해서 베풀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또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더욱 힘을 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양털을 깎는 날이 잔치였습니다. 그때는 돈이 들어오는 날입니다. 그럴 때는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잔치를 하게 되면 항상 뒤쪽의 한 쪽 자리를 비워놓았습니다. 이 자리는 거지들 자리입니다. 거지가 오면 편히 먹을 수 있도록 자리를 안내해주곤 했습니다.
얼마 전에 충청남도 보령의 한 커플이 결혼식을 올리면서 당초에는 괌이나 발리를 가기로 했었는데 신혼 여행지를 제주도로 바꾸고 절약한 돈으로 동네 주민 센터를 찾아가 불우이웃돕기에 써 달라 부탁했다고 합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좋은 곳으로 가면 한 일주일 정도 기분 좋겠습니다만 그 돈으로 가난하고 어렵고 불쌍한 사람 도와주면 한 평생이 즐겁습니다. 한평생 기쁘고 행복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신자들에게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으로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명령을 복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신명기 26장에서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 26:12) 라고 말씀하신 후에 이어서
‘그리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신 26:13)라고 말씀하시고
또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보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신 26:14~1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선한 일을 하고난 후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명령뿐만 아니라 약속이 있습니다. 복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구약성경의 보아스는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아스가 그렇게 큰 복을 받은 이유에 대해 성경은 ‘보아스는 가난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젊은 과부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울 때에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마실 물을 구하기 어려운 들판에서 목말라 할 때는 자기가 마실 물을 불쌍한 과부에게 주었고, 자기 밭에서 눈치를 보지 않고 이삭을 넉넉하게 주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심지어는 추수꾼들에게 명령해서 곡식단에서 슬쩍슬쩍 곡식을 빼서 일부러 땅바닥에 떨어뜨려서 이삭 줍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워가도록 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보아스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을 뛰어넘어서 불쌍하고 가난하고 없는 사람,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장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겠다’(눅 6:38),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 병든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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