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내게도 그리하소서 (창세기 27:24~38 )

분당소망교회 2017. 2. 18. 16:16

내게도 그리하소서

 

 

     창세기 27:24~38

   

 

K씨는 20대에 큰 자본도 없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몇 개의 사업체를 거느릴 정도로 성공한 40대의 젊은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심한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죽을 것 같은 공포심을 느껴서 급히 병원을 찾았습니다. 공황장애라고 합니다. 최근에 사업을 확장하면서 자금압박을 받고는 있지만 회사가 기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확장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도 걱정되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인관계도 지금까지 어려움 없이 성공적으로 잘 이끌어왔습니다. 이런 그에게 공황장애가 찾아온 것은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이 K씨의 공황장애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K씨는 3형제 중 둘째였습니다. 2대독자였던 아버지는 장남에 대해서 편애가 심했습니다. 막내는 막내라고 귀여움을 받았지만 K씨만은 아버지를 대하기 무척 어려웠습니다. 형은 조금만 잘해도 칭찬을 해주었지만 자기는 형보다 공부를 잘해도 인정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K씨는 늘 형보다 뭐든지 잘하려고 열심히 했습니다. 공부도 운동도 열심히 했고 아버지가 잘 두는 바둑을 잘 두면 혹시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을까 싶어 바둑도 열심히 배웠습니다. 뭐든 형보다 잘했고 남에게 지기 싫어해서 뭐든지 하면 악착같이 이겼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완벽하게 끝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러던 그가 한 번은 형과 싸웠는데 형에게 대든다고 아버지로부터 아주 크게 야단맞았습니다. 그 후로부터 아버지를 대하기가 더욱 어려워졌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아예 피해 다녔습니다.

 

현재 K씨는 실업가로 성공했습니다. 형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K씨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열등감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자존심이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고 자신은 결코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열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모든 애를 썼습니다.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그는 항상 완벽하려고 노력했고 조금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늘 경쟁적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완벽하게 잘 해내면서도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항상 따랐습니다. 실패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아무리 잘해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은 적이 없고 때로는 오히려 야단을 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해도 또 아버지에게처럼 배척을 당하지 않을까? 혹시라도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늘 이 사람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사에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습성을 갖게 됩니다. 때로는 이 두려움을 감추려고 지나치게 일을 추진할 때도 있었습니다. 일을 확장하고 겁 없이 추진해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열등감과 두려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더 일을 확장하고 추진해나갔습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불안은 더 커졌습니다. 악순환입니다. 사업을 확장해나가고 또 확장해나가면서 불안과 두려움은 더욱 더 가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추고 위장하는 것은 언젠가는 한계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이란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기어코 터졌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더 이상 감출 수도 없고 위장할 수도 없어서 그것이 공황장애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죽기 전에 맏아들을 축복하겠다고 생각하고 맏아들을 불러 축복받을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모든 맏아들이 받는 맏아들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려고 사냥하러 나갔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그 말을 하는 것을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들었습니다. 리브가는 큰 아들 에서보다 작은 아들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리브가는 이 축복을 작은 아들에게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은 아들 야곱을 에서로 변장시켜 아버지에게 들여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아들 야곱을 에서로 착각하고 에서에게 줄 마지막 축복을 모두 다 작은 아들 야곱에게 주고 맙니다.

 

그 뒤에 큰 아들이 들어왔습니다. 사냥해서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축복해달라고 하자 이삭이 깜짝 놀랍니다. 야곱에게 속은 줄 안 것입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삭이 생각할 때 이미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자기가 줄 수 있는 모든 축복을 작은 아들 야곱에게 다 주어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을 들은 에서가 자기에게도 축복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야곱에게 축복을 다 해주었더라도 뭐든 남은 것 조금이라도 축복해달라고 매달리는데 애처로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이삭은 에서에게 얘야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한 모든 축복을 야곱이 그대로 다 받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들은 에서는 소리 높여 통곡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원한이 쌓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돌아가시면 야곱을 죽여 버리겠다고 작정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보면서 에서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축복을 다 도둑질 당했습니다. 거기다 자기가 받을 복을 빼앗긴 것에 끝나지 않고 동생의 종이 될 것이라는 예언까지 듣게 됩니다. 37절은 그것을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을 빼앗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기가 야곱의 종이 된다고 하니 이것은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통곡할 만합니다. 거기다 더욱 에서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입니다. 자기가 받을 복을 도둑질 당한 모든 일이 자기 어머니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그 모든 일의 주도를 자기 어머니가 했다는 사실 이것은 에서로서는 참 힘든 일이었습니다.

에서는 자기 어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만큼은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되었든 결과는 아버지마저도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37) 라고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에서의 생각에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말만 한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자기한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버림받은 마음보다 더 큰 아픔은 없습니다. 버림받은 마음의 아픔은 상처받을 때 한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가슴 속에 박힙니다. 인격 속에 박힙니다. 두고두고 인생에 어두운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여러 가지 병이 생기게 됩니다. 버림받은 마음으로 생기는 병은 마음의 상처에서 오는 모든 병을 다 망라합니다. 예를 들면 아픔이 있습니다. 버림받은 마음 그 상처로 인해서 아픈데 왜 아픈지 모릅니다. 그리고 외롭습니다. 까닭을 모릅니다. 이것을 보아도 저것을 보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남편을 보아도 자식을 보아도 경제상황을 보아도 그렇게 외로울 것이 없고 아플 것이 없는데 아프고 외롭습니다. 그리고 열등감과 무가치함을 느끼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보아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자꾸 두려워하고 사람이 위축됩니다. 그래서 도피하고 숨습니다. 스스로 나는 별 볼일 없는 존재,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하려고 해도 자꾸 도망갑니다. 보호해주려고 해도 도망갑니다. 슬그머니 사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그렇고 친구들 간의 모임에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에 나와 처음에는 조금 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뒤로 슬금슬금 도망갑니다. 예배 때 꼭 뒤에 앉는 것도 일종의 그런 현상입니다. 버림받은 마음이 있으면 이처럼 자꾸 조금씩 도망가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리고 버림받은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움이 있습니다. 원망이 있고 분노가 있습니다. 모든 상처가 다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아픈 질환들이 다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또 불안함을 가집니다. 인생이 불안정하게 느껴지고 자기 마음도 불안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믿지 않습니다.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미움과 원망 때문에 아무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 당사자만 안 믿겨지지만 차츰 모든 사람이 다 안 믿겨집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나중에는 하나님까지 안 믿게 됩니다.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 하면서도 처음에는 잘 사귀다가 이 사람도 안 믿어지고 저 사람도 안 믿어집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반드시 나가는 과정이 있는데 목사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고 이러다간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겠다 싶어 차라리 다른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 또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떠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일들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버림받은 마음은 대체로 상황 혹은 상대방과 관계없이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어갑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럴 것도 아닌데 자기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면 내가 왜 그랬던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 상황이라면 버림받은 마음을 가질 까닭이 없는데도 자기가 만들어나갑니다. 사실이 아님에도 스스로 자신을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꾸 뒤로 물러갑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이 나를 밀어냈다,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그렇지 않음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더 밉고 더 원망하고 더 분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삭의 맏아들 에서가 이런 버림받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마음속에 원한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을 때 누구를 원망하고 내 마음 속에 원한을 쌓는 것은 또 다시 그런 아픔을 불러오게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실패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실패하는 사람은 자꾸 실패합니다. 그러면서 늘 다른 사람을 원망합니다. 상황을 원망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또 다른 실패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에 대해서 늘 불안해 합니다. 나를 사랑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포기하는 경향이 많아지게 됩니다. 조금만 힘든 일이 있으면 포기합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포기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에게 탓을 돌립니다. 그런데 가만히 뒤져보면 어머니 탓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아이 탓, 남편 탓, 선생님 탓 등 다른 상황 탓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포기할 때는 주로 그 원인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마음이 아이 속에 있을 때 이런 현상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 중 조금만 안 되면, 조금만 장애가 생기면 사업 아이템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아시겠지만 그때마다 손해가 얼마나 많이 생겨납니까? 그럼에도 자꾸 바꿉니다.

 

그 다음에는 사랑을 포기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사랑받는 것도 포기합니다.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포기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도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요구가 많습니다. 그리고 요구가 강합니다. 지속적으로 내 요구를 상대방에게 주장하여 상대방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도망가 버립니다. 내가 그 사람을 도망가게 만들어놓고 그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또 버림받는 아픔이 생길까 거리감을 둡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극한 몰두입니다. 잠시 동안은 공부도 잘하고 일도 잘하고 사업도 잘 합니다. 반드시 무언가를 얻어야겠다는 생각에 깊이 몰두합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도 포기하고 뒤로 물러가는 현상이 생겨납니다. 이런 사람이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자기가 떠났음에도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인정받으려고 이것저것을 제공하고 죄를 짓는 데까지 가기도 합니다. 공금횡령한 사람들이 이런 데서 많이 생겨납니다.

 

에서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아버지가 에서에게 그 말을 했을 때 에서에게 꼭 있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그 말을 듣고 난 뒤에 동생에게 원한을 품을 것이 아니라 빨리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방법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이 방법 저 방법을 쓰지만 방법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방법 그리고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께 찾아가서 하나님, 아버지가 나에게 줄 복이 없다고 합니다. 동생에게 다 빼앗겼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왔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줄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얼마든지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가 줄 복보다 훨씬 더 큰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접 복을 주십시오.’ 라고 하면 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에서가 이렇게 했다면 큰 전화위복이 되었을 것입니다 .

 

아담의 큰아들 가인이 이러했어야 했습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얼른 하나님께 찾아가서 하나님, 무언지 몰라도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잘하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물어서 다음에는 확실하게 제사를 잘 지내겠습니다.’ 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 한 번이야 실수할 수 있지 다음부터 잘하도록 해라.’ 라는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데 괜히 어렵게 생각하고 내가 어렵게 만들어나갑니다. 사울도 그랬어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너를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사울은 얼른 하나님 앞에 엎드렸어야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번에 큰 실수를 했습니다. 깜빡 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그때는 정말로 잘하겠습니다.’ 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사울을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인 것이 다윗의 일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습니까? 얼마나 악한 죄를 지었습니까? 다윗의 죄는 성경 전체에서 그 어떤 것과도 비견이 안 될 정도로 무서운 죄입니다. 왕이란 권력을 가지고 부하의 아내에게 못된 짓을 했습니다. 거기다 그 죄를 숨기기 위해서 그렇게 충직한 부하를 비참하게 죽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아주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다시는 안 보실 것 같았습니다. 그럴 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절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쉽게 하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꾸 나가야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제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엎드리자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래 알았다. 그렇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지은 죄에 대해서는 벌을 받아야한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죄는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를 하시고서도 벌을 주시는 것이 어떻게 보면 조금 아이러니한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면 주신 벌보다 주시는 복이 훨씬 큽니다. 용서하시면 그렇습니다. 죄짓고 벌 받지 않으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벌은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봐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벌을 조금 덜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입니다.

에서가 이런 하나님을 찾아가서 그 앞에 엎드렸다면 어련히 받아주시겠습니까? 물론 에서가 아버지의 축복까지 받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기왕 일이 그렇게 된 바에야 그때 에서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저 포도는 시다.’ 라는 것입니다

이솝 우화이야기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여우 한 마리가 숲속을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려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마침 포도밭이 있습니다.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려있었습니다. 웬 떡인가 싶었는데 포도송이들이 너무 높이 달려있었습니다. 자기 키로는 도저히 딸 수가 없었습니다. 발버둥 쳐보기도 하고 팔짝 뛰어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여우가 자기는 도저히 그 포도송이를 딸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포기하고 돌아서면서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저까짓 맛없는 포도송이 너무 시어서 내 입에는 맞지 않아

 

차라리 이것이 현명합니다. 아버지 축복을 받았으면 좋겠지만 기왕 받지 못했다면 아버지 축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축복뿐만 아니라 부모의 재산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면 그까짓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큰 바람 한 번 훅 불면 다 날아갑니다.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지만 혹 못 받았다면 그 사랑은 썩은 사랑이고 신 사랑이니 그걸 받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저 포도는 시다. 저 사랑은 시다. 저 재산은 시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에서가 하나님을 찾았다면 틀림없이 얘야, 마음이 많이 아프지? 많이 아파하지 마라. 너도 아버지 축복을 많이 받고 싶었겠지만 그것이 뭐 별 것이냐? 진짜 축복이 나에게 있지 않느냐?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복이 너의 아버지가 줄 수 있는 것보다 천배, 만 배 되지 않겠니?’ 라고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셨을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저 멀리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때 나이가 열일곱 살입니다. 군대도 가지 않을 나이니 얼마나 어린 아이입니까? 팔려갈 때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에게 얼마나 애처롭게 사정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이런 요셉을 모질게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요셉이 저 멀리 이집트로 질질 끌려서 팔려갔습니다. 요셉 가슴 속에, 그 인생 속에 얼마나 큰 원한이 사무쳤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원한, 원통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사무치는 원한에게 오래 끌려다니지 않았습니다. 가슴 속에 있던 원한을 다 빼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으로 채웠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힘을 써서 가슴 속에 하나님으로 채웠는지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건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데 요셉은 자기를 유혹한 보디발의 아내에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런 못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못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감옥 속에서 전직 장관들이 답답해 할 때 요셉이 한 말을 기억해보십시오. 당신들이 필요한 답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집트 사람이라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요셉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말만 하면 하나님이 튀어나왔습니다. 나중에 이집트 왕 바로에게 불려갑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네가 꿈 해몽을 잘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때에도 요셉은 우리 하나님께서 왕께 평안한 대답을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셉 가슴 속은 하나님으로 가득 찼습니다. 원한이 없습니다. 인간이라 다 떼 낼 수 없어서 저 밑에 조금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없어졌습니다.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대단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꿈 내용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해석하였으니 얼마나 놀라운 신통력입니까? 요셉의 지혜는 외국사람 그것도 외국인 노예를 총리로 세울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부귀영화도 요셉에게 돌아왔습니다. 자기 집안 구원도 하게 됩니다.

 

혹시 인생 살다가 버림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정말로 가슴 아픈 경험이 있습니까? 부모님으로부터 혹은 친구로부터 특히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은 참 힘듭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결과적으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분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한 번 우십시오. 화장실에 가서 울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드라마 보면서도 한 번 우십시오. 조금 미워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욕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잠시만 하고 마십시오. 얼른 돌아서야합니다. 오래 끌고 가면 안 됩니다. 얼른 돌아서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요셉처럼 미움, 욕하는 그 모든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십시오. 하나님에게 가면 치료가 있습니다. 회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화위복이 있습니다. 그 상처를 받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은 전화위복이 있습니다. 가슴 속을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게 되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것처럼 여러분이 상상도 하지 못할 선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8장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8:19)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8:22) 말씀하십니다. 그저 예배당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찾아오시면 그렇게 반가워하십니다. 역사를 바꿀 수 있고 인생도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은 여러분의 역사도 인생도 바꾸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