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사무엘의 집안 (삼상 1:1-8)

분당소망교회 2017. 3. 29. 14:06

사무엘의 집안

 

 

 

삼상 1:1-8   

 

미국 출판업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Old farmer’s almanac‘ <엣 농부의 연감>이라는 책으로 거의 100년간 계속해서 뛰어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내력이 있습니다.

18837, 작가는 그 다음 해의 연감에 대해서 원고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다음해 1월부터 712일까지 연감을 다 쓰고 나니 너무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1884713일의 날씨는 나중에 쓰기로 했습니다. 작업 중인 원고를 덮고 막 방을 나가려고 하는데 아이 하나가 뛰어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선생님 지금 가시면 안 됩니다. 인쇄소에서 지금 빨리 원고를 달라고 하는데 1884713일까지 원고를 써주시고 가셔야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작가는 별 생각 없이 아이에게 그렇다면 713일 것은 네가 써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작가의 그 말을 들은 소년은 또 아무 생각 없이 작가가 말했던 대로 713일의 일기를 자기가 씁니다, ‘1884713, 바람 불고 우박 쏟아지고 눈이 올 것이다.’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판매되기 시작했을 때 작가가 책을 훑어보다가 깜짝 놀랍니다. 당장 그 소년을 불렀습니다. ‘얘야, 어떻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소리를 쓸 수 있느냐? 어쩌자고 이렇게 썼느냐? 713일이라면 한여름인데 그 한여름에 바람 불고 우박 쏟아지고 눈이 온다니 말이 될 법하냐?’ 야단쳤지만 시간은 이미 늦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다음해 1884713일이었습니다. 그 소년이 연감에 쓴 것처럼 정말로 바람 불고 우박 쏟아지고 눈이 내렸습니다. 그 여름에 우박 쏟아지고 눈이 내린 것입니다. 그런 이상 기후는 미국 역사상 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 기상 이변은 <옛 농부의 연감>에서 열 달 전에 이미 예언되었다는 것을 알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이 책의 평판이 치솟았고 작가 그리고 출판사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잘못된 일, 나쁜 일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생각하면 나에게 일어난 일이 오래 오래 나쁠 것 같습니다. 끝까지 나쁠 것 같습니다. 또 때로 좋은 일이 생기면 끝까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을 보아도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나쁘게 시작했다가 좋게 바뀌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좋게 시작했다가 나쁘게 끝나는 일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며칠 전 여러 신문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20115월 한모 부인은 로또 복권 넉 장을 샀습니다. 그 중 한 장을 남편에게 주었고 또 한 장은 아들에게 주었는데 남편이 1등에 당첨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환희에 쌓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복권이 당첨된 후에 남편은 낭비를 일삼았습니다. 이 자동차 저 자동차를 샀고 보트까지 샀습니다. 견디다 못한 아내가 법원에 이혼소송을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도 맞고소했습니다. 결국 인천지방법원은 이혼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가정이 복권당첨 때문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나쁘고 끝까지 좋은 일이 별로 없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새옹지마(塞翁之馬)입니다. 기독교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그렇게 좋아할 것이 아니고 나쁜 일이 생겼다고 그렇게 힘들어할 것이 아닙니다. 새옹지마에 나오는 노인처럼 그러려니 하고 볼 줄 아는 마음, 이것이 기독교의 마음입니다. 이런 일이 생겨도 저런 일이 생겨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 사람의 마음도 일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 나에게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넉넉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합니다. 감사한 일이 있으면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함이 있어야하고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그때도 당당하게 살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라는 고백도 할 줄 알아야합니다. 안 좋은 일들, 안 좋은 사람들 그 모두를 합해서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믿는 당당함, 배짱이 있어야합니다. 이런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전전긍긍하고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야곱의 열 둘 아들 중에서 열한 번째가 요셉인데 그 요셉을 형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당시 요셉에게는 그것이 정말로 원통하고 분통하고 죽을 일 같은 것이었고 너무 섭섭했을 것입니다. 형들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까? 팔려갈 때 형들을 보면서 얼마나 애절했겠습니까? <미아리 고개>라는 옛날 노래 가사처럼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요셉은 설마 형들이 끝까지 팔아먹을 줄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원한이 맺혔겠습니까? 요셉에게 틀림없이 그 원한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믿음을 요셉은 창세기 45장에서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시마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7-8)

요셉의 이 믿음이 한꺼번에 생긴 것 같습니까? 잘 아십시오. 믿음이 그렇게 한꺼번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시지만 하나님께서 그야말로 마술같이 그런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에 구멍을 뚫고 거기다 믿음을 쏙 넣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그런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도 많이 원통했고 미웠을 것입니다. 고민 고민 하다 설마 형들이 그랬을 리 없다고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조금씩 기울어 형들이 그랬을 리 없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이런 것입니다. 믿음이 쉽게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있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다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의를 거쳐서 회의를 넘어 그 다음에 믿음으로 가고 확신으로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요셉은 세계 최강국 이집트의 2인자가 됩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심한 기근이 생겼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요셉이 총리로 있는 이집트로 이민을 갑니다. 이집트로 이민 간 야곱의 후손들은 처음에는 환대 속에 살았습니다. 우리의 영웅, 우리의 은인, 요셉의 가족들이라고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세월이 지나면서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세월이 지나갈수록 노예살이가 점점 더 혹독해집니다. 그 세월이 400년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음소리가 커집니다. 그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모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십니다.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입니다.

출애굽한 지 40년 만에 꿈에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하고 300년 동안 나라의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때 나라의 지도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보내주시어 그 사람을 통해서 해결해주셨고, 끝나고 난 뒤에 그 사람은 다시 자기 본업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300년 동안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사사시대의 마지막 무렵이 오늘 본문 사무엘상 1장입니다. 에브라임 지역에 엘가나라는 이름을 가진 레위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아내는 자식이 있었고 한 아내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있는 아내가 자식이 없는 아내를 괴롭혔습니다. 자식이 없던 아내가 바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입니다. 당시 사회는 한 남자가 두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은 큰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통상이고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본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 혹은 아이를 낳았어도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랬습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서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통상이라는 것, 일반적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합리화시켜주는가?’입니다. 통상이기만 하면, 합리적이기만 하면 우리가 다 용인해야할까요?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 기독교인들은 다르게 생각해야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세상의 모든 흐름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달리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맞는지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실지 항상 생각해야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결이라고 말합니다. 거룩이라고 말하고 구별됨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지켜야합니다.

그렇게 살면 좀 힘듭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의 능력과 권세는 이런데서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야 세상 사람들과 다른 권세, 능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 없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즐길 것 즐기고 그러면서 권세를 받고 능력을 받겠다는 것은 욕심 탐욕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놀고 즐기면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고 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성공을 할 수 있습니까? 하물며 영적인 권세, 능력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해서야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엘가나가 두 아내를 가진 것이 혹시 첫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해서 대를 이어가기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간절한 마음은 물론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도 기독교인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의 사람인 내가 다른 사람과 똑같이 아내 하나를 더 얻어야할까? 혹시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런 일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이 없을까 찾아보기도 하고 물어보기도 하여야합니다. 찾아볼 줄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물어볼 줄도 알아야합니다. 성경에는 이 일에 대해서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먼저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첫 아내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해서 자기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자식을 보라고 직접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좋아라하면서 자식을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성공입니까? 아닙니다. 실패입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 가정에 풍파가 일어납니다. 아내와 첩 사이에 다툼이 많았고 갈등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둘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아이까지 생겼으니 더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여종 하갈이 가출까지 하는 등 집안이 정말로 시끄러웠습니다.

그 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라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또 문제가 되었습니다. 첩이 낳은 자식이 본처가 낳은 아들을 무시하고 놀려대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또 집안이 시끄러웠습니다. 둘 사이에 끼인 아브라함 마음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물 한 동이만 주고 황량한 광야로 첩을 쫓아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도 한동안 함께 살았던 첩, 그리고 자기 핏줄 아들을 쫓아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립니까? 인생 살면서 내가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리는지 많이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야곱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어쩌다가 일주일 사이에 두 아내를 얻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던 아내 하나, 그렇게 소원하던 아내, 두 아내를 일주일 사이에 얻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기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첫째 아내가 자식을 잘 낳았습니다. 유별나게 자기가 사랑하던 둘째 아내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 라헬이 시기가 넘쳐서 자기 몸종을 남편에게 주면서 아들을 낳아달라고 합니다. 야곱이 동침하여 아이 둘을 낳았습니다. 일단은 좋았습니다. 라헬은 아이 둘을 무릎 위에 앉혀놓고 자기 아이라고 좋아했습니다. 성공입니까? 아닙니다. 실패입니다. 나중에 라헬이 자식을 낳게 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요셉입니다. 이 요셉이 열일곱 살 때 형들에게 노예로 팔려갔는데 요셉을 노예로 팔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요셉의 어머니 라헬이 자식 보겠다고 남편에게 첩으로 준 그 몸종의 아들입니다. 이렇습니다. 이것이 성공입니까? 거기다 라헬이 남편에게 준 야곱의 첩과 야곱의 첫 아들이 못된 짓을 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야곱이 알게 됩니다. 야곱의 그 심정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집안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습니다. 성공입니까?

멀리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합니다. 사람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과연 아브라함, 야곱이 그렇게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은 것 때문에 행복했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행복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눈을 가져야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 부자 사업가가 바닷가를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배 옆에 한 사람이 드러누워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어부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부자는 그가 왜 바다도 좋고 시간도 좋은데 고기잡이를 하지 않는지 어처구니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어부가 대답합니다. ‘오늘 제가 잡을 몫은 충분히 잡았습니다.’ 그러자 부자가 다시 그러면 더 잡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어부는 또 그래서 뭐하게요?’ 말합니다. 사업가는, ‘그러면 돈을 더 벌수가 있지 않아요? 그 돈으로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배보다 더 좋은 배를 살 수도 있고 그러면 고기가 많은 깊은 바다까지 나가서 그물질을 해서 돈을 더 많이 벌수가 있지 않아요?’ 어부가 또 대답합니다. ‘그 많은 돈으로 무엇을 하지요?’ 부자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 돈으로 더 좋은 그물을 사고 더 많은 배를 거느리게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당신도 나처럼 커다란 부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어부는 그리고 난 뒤에는 무엇을 하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부자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당신의 삶을 즐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합니다. 이 말에 어부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당신이 지금 말하듯이 이미 편안하고 행복하게 내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행복은 이것입니다. 돈 많다고 행복합니까? 내가 소원했던 것을 가졌다고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해서는 얻지 못합니다. 신자들은 아이를 낳고 못 낳고 아이를 일찍 낳고 늦게 낳고 똑똑한 자식 낳고 모자란 자식 낳는 이 모든 일들이 우연하게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고 내 가정의 주인이십니다. 자식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심지어는 자식이 있었다가 없어지는 것 이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야합니다. 아이를 잘못 챙겨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병원 의사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욥이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한꺼번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 욥이 고백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이런 사람에게 평안이 있습니다. 한 걸음 나가면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말하는 참된 복, 거기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복까지도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반드시 어둠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오면 필시 따르는 것이 고통입니다. 아픔이 따라옵니다.

 

엘가나가 브린나를 아내로 얻어서 자식을 잘 낳았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잠시뿐이었습니다. 엘가나에게도 똑같이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 법을 떠나게 되면, 하나님 길을 떠나게 되면 어떤 꾀를 내어도 그것은 고통이 될 뿐입니다. 꾀부리지 마시고 재주부리지 마십시오. 순진하게 사십시오. 깔끔하게 사십시오. 재주 부리면 부릴수록 고통이 올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신자가 하나님 곁을 떠나는 순간 자기가 만든 채찍으로 자신이 맞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맞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브닌나가 한나를 특별히 괴롭힐 때가 언제였습니까? 제사 드리러 갈 때입니다. 성경은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그같이 하매’(7) 라고 말씀합니다. 예배 때입니다. 어둠이 각별하게 싫어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어둠은 그렇게 예배를 싫어합니다.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서 온갖 일을 다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동원합니다. 먼저 엘가나의 아내 브닌나를 동원했습니다. 혹시 예배드리려고 할 때 방해되는 일이 생겼거나 방해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얼른 알아야할 것이 어둠입니다. 사람, 일을 생각할 것 아니라 어둠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고 결실할 때가 되었을 때 종들이 주인에게 달려와서 밭에 틀림없이 좋은 씨를 뿌렸는데도 가라지가 생겼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놀라 보고했다. 그 종들의 말을 들은 주인은 대뜸 원수가 그랬다고 말했다.’

이것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예배드릴 수가 없다고 하는데 여기에 속지 마십시오. 속으면 고통만 돌아갑니다. 속된 말로 기어서라도 예배는 나오는 것입니다.

 

브닌나의 행동은 겉으로 보면 브닌나의 못된 짓이었지만 실은 어둠, 악한 영, 사탄에게 휘둘린 것입니다. 도구가 된 것입니다. 본인도 자기가 사탄의 도구가 됐는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여러분도 모릅니다. 이것을 알 정도가 되면 대단합니다. 해야 할 것은 각별하게 조심하는 것입니다.

주된 것을 잡을 줄 알아야합니다. 예배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양보될 수 없고 훼손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큰 기둥만 제대로 잡으면 됩니다. 한나가 여기에 실패하고 맙니다. 브닌나가 괴롭히니 거기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7)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브닌나가 괴롭힐 때 어둠이라는 것을 알아야했습니다 브닌나만 볼 것이 아닙니다. 휘둘리지 말았어야했습니다. 사탄, 어둠의 종노릇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한나는 자기의 불임을 우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5) 한나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가나의 집은 이스라엘의 그 위대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셨던 사무엘의 집안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집에 그 위대한 하나님의 종 사무엘이 태어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런 집임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 복의 근원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입니다. 엘가나는 예배드리러 갈 때마다 브닌나가 흔들어대고 한나가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징징거려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어떤 일이 있어도 훼손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때는 큰 소리 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같이 휘둘려 돌아가는 것입니다. 엘가나는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8) 라고 한나를 달랬습니다. 그렇게 달래서 다 데리고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우스운 말로 하면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예배드리고 다녀와서 싸우자는 말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예배는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렇게 예배드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안 싸웁니다. 예배시간에 은혜가 있고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예배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예배를 안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어도 예배는 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예배가 그 무엇보다 최고라는 말씀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말씀 또한 제사만큼 귀한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엘가나가 그랬습니다. 이런 엘가나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선물을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