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신자의 달려갈 길(사도행전 28:16~23)

분당소망교회 2017. 6. 16. 15:16

  

 

신자의 달려갈 길

 

 

 

사도행전 28:16~23   

 

얼마 전에 아주 흥미로운 책 한 권이 발간되었습니다. ‘암은 병이 아니다.’ 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독일 출신의 의학자인 저자는 암은 질병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몸이 하는 일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사람이 자기 몸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가지지 않고 방치하고 자학하면 몸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어있다.’ 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도 합니다. ‘암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살던 건강하지 못한 삶을 버리고 이제부터는 건강한 삶, 건강한 생활과 건강한 생각으로 전환하라는 중요한 사인이다. 계속 지금까지 살던 것처럼 살면 안 되고, 앞으로는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살아야한다는 호소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어느 지방 도시에 있는 공장에 근무하던 젊은 여성이 중한 병에 걸렸습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없었습니다. 점점 더 병이 악화되었습니다. 그 치료를 맡고 있던 의사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치료할 것이 없으니 주변을 정리하십시오.” 이 여성은 의사 말대로 주변 정리를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싫은 세상 떠나겠다고 편하게 주변정리를 했는데 남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 자기 모든 것을 앗아가고 끝내 자기를 버린 남성, 그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마지막으로 그 남자까지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만났습니다. 용서했습니다. 다 잊어버리겠다, 다 용서하겠으니 편하게 잘 살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돌아가서 죽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죽지 않았습니다. 몸이 오히려 점점 더 회복되었습니다. 검사를 해봤습니다. 결과는 몸이 거의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병들게 한 것은 그 여성 속에 있는 미움, 분노, 원망이었습니다. 그 여성이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을 낫게 한 것은 미움을 버리고 분노를 버리고 원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책의 저자는 암도 질병이기는 하다. 그러나 암이라는 질병은 자신의 몸을 정화하고 치유하려는 몸 스스로의 노력이다.’ 라고까지 말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몸 스스로의 시도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암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암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혹 주셨든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허락하셨든지 간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중요한 뜻이 있다,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의미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다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리고 로마군에 이첩됩니다. 이첩된 바울은 가이샤라로 압송됩니다. 거기서부터 감옥살이가 계속되었습니다. 맨 처음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들렸을 때 예루살렘에는 대단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딱히 재미나는 일이 없는 그런 세상에 소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학식을 가진 바울이 유대교를 비난하다가 붙들렸다는 소식이 온 도시에 퍼져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온 예루살렘 성내가 뒤집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송 과정도 대단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군 본부가 있는 가이사랴까지 호송하는데 바울 한 사람 호송하기 위해서 보병이 200, 기마병 70, 창병이 200명 총 470명의 군사가 동원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로마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 전체 병력의 반 정도가 됩니다. 죄인 한 사람 호송하는데 이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있다가 다시 로마로 이송되는데 그 이송과정에서는 더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태풍을 맞아 보름동안 죽을 고생을 다합니다. 그 배의 승객 그리고 선원들은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배가 파선하였습니다. 276명의 승객이 겨우 목숨만 건졌습니다. 이 모든 일을 다 겪고 겨우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부터 바울의 감옥살이가 시작됩니다.

 

이 모든 과정, 모든 일들에 4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바울이 붙들리고 투옥되고 여기저기 끌려 다니고 죽을 뻔한 모든 일들은 단 하나, 바울을 처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을 재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판 결과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뉴스에서 사기행각한 사람들 또 정치적으로 잘못한 사람들이 붙들렸다면 그 사람의 재판결과가 궁금합니다. 이렇게 미결수로 4년 있었으니 재판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참으로 모든 이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바울의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이 보도되고 있는 사도행전은 물론이고 다른 성경에도 일체 보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하나님은 당신께서 그렇게 귀히 쓰신 당신의 사람, 하나님께 그토록 충성스러웠던 하나님의 사람을 그렇게 큰 어려움과 아픔을 겪게 했는데 아무런 의미 없이 그런 일을 하셨을까?’ 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인생 살다 생긴 이런 저런 일이 대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나에게 의미가 무엇인가? 왜 나에게 이런 아픔이 있는가? 경제적으로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는가? 내 자식에게 왜 이런 저런 문제가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나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의미 없이 절대로 어려움을 당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의미 없이 어떤 고난, 어떤 어려움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살펴보면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한 번 살펴보십시오.

 

바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찾아봅니다.

맨 처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을 때 기회를 얻게 됩니다. 수많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 사람들에게 해명할 수 있는 기회,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바울은 그 천금 같은 해명의 기회, 변론의 기회를 없었음에도 한 마디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해명, 변론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단 하나,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났다는 그 말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돈을 준다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 같습니까?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그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수많은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로 하여금 그런 고통, 그런 일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맞아죽을 뻔했습니다. 정말 몸이 찢길 뻔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산헤드린 재판관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 그리고 나라의 지도자들, 장로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 모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앉아서 복음 전하는 바울의 말을 듣고 앉아있겠습니까? 어림없습니다. 지금 바울은 잡혀 와서 피고가 되어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재판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피고의 변론을 잘 새겨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앉아있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바울이 자신만만하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라고 그 어려움을 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로마총독이 심문합니다. 그때 소위 원고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이 모이게 됩니다. 장로들과 총독 그리고 대제사장들이 다 모였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총독이 부인이 함께 왔습니다. 총독과 총독 부인이 복음을 전하면 올 것 같습니까? 그러나 이때는 앉아서 다 듣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왕이 찾아왔습니다. 왕은 바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왕이 바울에게 왜 그렇게 하는지 물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하는 말은 왕도 듣고 알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다 말했습니다. 이런 기회 아니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런 일을 만드셨습니다.

 

바울이 이스라엘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 태풍을 만나게 됩니다. 선원들은 물론이고 승객들은 다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가운데 서서 큰소리쳤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2720절에서 22절까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으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아무도 생명 잃어버리는 사람은 없고 배만 잃어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샤 앞에 서야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7:23-25)..

여기서는 바울이 살기 때문에 따라서 승객들 선원들도 다 산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27:25-26) 라고 큰소리쳤습니다.

이제 그 상황 속에 한 번 들어가 보십시오. 지금 선원들과 승객들이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바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 그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 라는 생각을 했을지라도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 섬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 마음속에 무엇이 생기겠습니까? 저렇게 큰소리치는 근거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그 하나님이 저들 속에 어떻게 각인되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바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어려움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파선 후 죽음을 모면하고 섬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일어난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주민의 추장 아버지가 열병과 질병으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죽는다고 생각한 그 원주민 추장 아버지를 바울이 낫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누가라는 의사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환자를 의사인 누가가 고친 것이 아니라 목회자인 바울이 고쳤습니다. 이것을 본 멜리데섬 사람들은 의사보다 더 뛰어난 의사 바울 속에 있는 또 다른 의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마에 도착하고 난 후 바울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일종의 연금입니다.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지만 쇠사슬에 메여서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연금시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을 누가는 맨 처음에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16)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여덟 시간 근무입니다. 하루에 세 사람씩 돌아가면서 바울과 함께 쇠사슬에 묶여 있었는데 자기 팔에 같이 묶여있는 로마 군인에게 바울이 무엇을 이야기했겠습니까? 옛날 이야기했을 것 같습니까? 바울은 입만 열면 예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세계의 모든 곳으로 전근도 가기 때문에 로마 전 제국에 퍼져나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선교사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바울을 쇠사슬에 묶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17) 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만나겠습니까? 바울이 어떻게 높은 사람들을 쉽게 만나겠습니까? 바울이라는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번 들어보자고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23)..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찾아가도 잘 들어주지 않을 사람들이 바울이 가만히 앉아있는데 잡혀 있는 그 집에 와서 복음을 받게 됩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0-31)

바울은 체포되고 매 맞고 감옥생활을 한 4년간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바울의 이 모든 일들은 바울을 처벌하고 바울을 재판하기 위한 유대교 지도자들이나 로마당국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18절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바울을 질질 끌어다 성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때 기적적으로 살아난 바울이 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진정한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특히 진정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신앙생활 할 때 나에게는 그런 믿음의 선배들이 받았던 고난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오게 되면 더 힘듭니다. 차라리 아직 고난이 안 왔다면 이제쯤 고난이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기다리다 그런 어려움이 오면 별로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고난이 오면 드디어 믿음의 선배들이 받는 고난을 나도 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감사할 때에 여러분들의 신앙의 완성이 시작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산헤드린에 붙들려가서 채찍질을 맞으면서 다시는 예수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일을 사도행전 5장은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41)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들이 날마다 성전 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4:42)라고 말씀합니다. 석방시켜주는데 단 하나 조건, 절대로 예수를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들은 오히려 예수님만 말했습니다. 자기네들은 당연하게 고난당하는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진정한 기독교 신자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고난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는 나는 내가 맡긴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들을 확실하게 지키고 보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성경 곳곳에서 보여주십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몰매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몸이 찢어질 뻔했습니다. 같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들고 때리고 찢으려고 하는 그때 바울을 보호해준 사람은 이방인 로마 병정들입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일하십니다.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로마군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이려고 하고 로마병정들은 바울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을 놓친 유대인들 40여명이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내일은 틀림없이 이 길로 나올 것이므로 숨어서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틀림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모를 희한하게도 바울의 생질이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이 로마군 최고지휘관 천부장에게 전해졌고, 그 말을 들은 천부장이 모든 병력들을 동원해서 가이사랴로 보낸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보호해주셨습니다.

바울이 이스라엘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도 그러했습니다. 태풍으로 그가 탄 배의 승객들, 선원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살려주겠다, 그리고 너 때문에 나머지 승객들도 다 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한 신자들이고 충성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가족도 챙겨주시고 여러분과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도 챙겨주십니다. 이런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그런 사람인 것을 알고 당당하게 사십시오.

파선 후에 표류하다가 한 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맹독 가진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그 뱀의 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원주민들은 잘 알았습니다. 바울이 곧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28:3-6)

바울이 죽지 않자 원주민들은 이 사람 속에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켜주십니다. 틀림없이 내가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세 번째, 나는 나의 사람들 특히 내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내 종들에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권세와 능력을 준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맡기실 때 그냥 맡기시지 않습니다. 능력과 권세와 여건을 함께 주십니다. 이전에 없던 권세도 주십니다. 그 일을 감당하도록 능력도 주십니다. 건강도 주시고 필요하면 물질도 주십니다. 넉넉하게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일하기 전에 능력을 받으려고 하고 여건을 받으려고 하고 물질을 받으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나서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일을 부탁받게 되면 이 말 저 말 하지 마십시오. 이것저것 걱정하지 말고 이것 준비하고 저것 준비하면서 내가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순종하고 그냥 나서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 챙겨주십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고 나서지도 못하고 거기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세와 능력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세상적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는 다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네 번째, 하나님께서는 나는 충성스러운 나의 종들, 내 사람들과 함께 나의 영광을 공유하겠다, 나누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한 주인이 있는데 충성스럽게 주인이 맡겨준 일을 감당한 종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5:21) 라고 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즐거움, 영광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9장에서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19:17) 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권세를 주십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이 고생고생 하다가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 나의 떠날 시간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딤후4:6-8) 라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틀림없이 의의 면류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의 면류관을 준다, 즉 영광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여러분 때문에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당신이 받으신 영광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은 그 일로 말미암아 자기가 영광을 받습니다.

 

저는 이 5월동안 가슴 아픈 일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어린이날이 있고 가정의 달이라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참 가슴 아프고 너무도 슬픈 일이 저를 자주 괴롭힙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원영이 사건입니다. 아이가 일곱 살 때 새엄마가 집에 들어왔습니다. 아이는 그때부터 밥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새엄마가 밥을 제대로 차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엄마는 아이가 오줌을 잘 못 가린다는 이유로 자주 때렸습니다. 2년 후부터 계모의 학대는 아주 심해졌습니다. 하루 한 끼만 밥을 주었고 수시로 때렸습니다. 그 계모가 때리는 매질을 피하려다 아이가 넘어지면서 변기에 부딪쳐 이마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친 아버지는 이 사실을 다 알면서도 모른 척 했습니다.

그러던 올해 1월이었습니다. 변기 옆에 소변을 흘렸다는 이유로 계모가 아이 온 몸에 락스를 부었습니다. 그 추운 겨울에 아이는 욕실에 갇혔습니다. 이때부터 아이는 한 끼밖에 안 주는 밥, 그렇게 맛있게 먹던 밥, 주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됩니다. 5일간 굶다시피 했던 이 아이가 21, 갇혀있던 욕실에서 바지에 변을 쌌습니다. 계모는 아이 옷을 모두 벗기고 찬물을 계속해서 퍼부었습니다. 그날 최저 기온이 영하 125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아이는 숨이 멎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부검 결과 아이의 죽은 원인은 먹지 목한 굶주림, 매에 맞아서 생긴 피하출혈, 추운데 내버려두어서 생긴 저체온이었습니다.

제가 괴로운 것은 귀신과는 다른 것으로 애원하는 아이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입니다. 아마 5월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 호소하는 아이 소리가 때때로 들립니다. 때리지 말아달라고, 락스 붓지 말고 물을 그만 부으라고 아이가 안타깝게 호소하는 소리입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호소는 애처롭게 신음하는 소리로 들립니다. 제발 먹을 것 좀 달라고, 너무 추우니 옷 좀 달라고 사정하는 소리로 들립니다. 마지막으로는 죽어가면서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신음하는 아이 소리가 자꾸 들립니다. 아마 그 아이와 같은 일이 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아이와 같은 아이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도 고민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방법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에게 그런 일이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 정도면 이미 다 끝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나은 최고의 길이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너무 상투적인 말 같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답입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본받아서 만든 인간이 이렇게 하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하는 것,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은 어둠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귀신, 사탄 생각할 것 없습니다. 무언지 몰라도 인간 속에 들어가서 그렇게 못된 일을 하고 그렇게 악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지금 중동에서 하는 못된 사람들이 한느 것 모두가 다 어둠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어둠이 하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말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합니다. 그것은 돈으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도와 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데 돈을 퍼부으면 복지산업만 잘 될 뿐 그런 사람은 더 늘어납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수천 년 동안 검증된 일입니다. 길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빛이신 예수님을 비출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습니다. 빛을 비추어야합니다. 예수를 비추어야합니다. 사람 속에 있는 어둠 속에 여러분이 빛을 비추어야하고, 사회와 나라 이 세상 속에 있는 어둠, 이 어둠에게 복음을 전해서 빛을 비추어야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왜 복을 주셨는지 생각하십시오. 많든지 적든지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왜 재물을 허락하셨는지, 왜 건강을 허락하셨는지, 왜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셔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잘 챙겨주시는지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진정한 기독교신자들이고 그리고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영원한 복락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셨기 때문에 이 땅에서 기어이 그렇게 다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복락도 주시고 이 땅에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복, 저런 복을 주신 까닭은 그것으로 선한 일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5:14-15)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5:15)..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빛 되게 하시고 빛으로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챙겨주십니다.

이사야 60장에서 하나님께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60: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에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과 함께 그런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28: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