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오시는 하나님
창세기 28:10~22
아프리카 북쪽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이 원숭이 잡는 방법은 무척 간단합니다. 조롱박에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하나 뚫습니다. 그 속에 땅콩이나 열매를 집어넣은 후 그 조롱박을 나무에 단단히 매어놓습니다. 밤중이 되면 원숭이들이 냄새를 맡고 조롱박에 다가와서 손을 집어넣어 그 속에 있는 열매를 한 움큼 쥡니다. 손에 한 움큼 쥔 열매 때문에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원숭이는 손에 잡고 있는 열매를 놓기 싫습니다. 밤새 손을 밖으로 꺼내려고 씨름하다 결국 못 꺼내고 맙니다. 새벽에 나온 원주민에게 잡히고 맙니다. 사람이나 원숭이나 항상 욕심이 문제입니다.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난 야곱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욕심을 부렸습니다. 형이 되고 싶어서 먼저 나가려는 형의 발목을 붙들었습니다. 나중에 성장하고 난 뒤에는 형이 허기진 틈을 이용하여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맙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할 장자의 축복까지 빼앗고 말았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었던 야곱,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단란했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네 식구 모두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아픔을 당하고 슬픈 이별을 겪게 됩니다.
아버지는 더 할 수 없는 배신감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한평생 함께 살아온 아내, 100년 가까이 함께 살았던 아내만큼은 나와 함께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만 그 아내가 자기를 배신했고 애지중지 길렀던 사랑하는 아들이 자기를 속였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됩니다.
큰 아들은 버림받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본래부터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동생만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만큼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보니 아버지마저도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고통이 큰 아들에게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상실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더 사랑하고 싶고 더 가까이 하고 싶었던 둘째 아들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한 그 일 때문에 죽을 때까지 다시 보지 못하는 생이별을 당하게 됩니다.
욕심 많았던 야곱은 욕심을 이루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형을 피해서 머나먼 곳으로 도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저 멀리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외삼촌 집까지 거리가 800킬로가 됩니다. 2천리나 되는 길입니다.
길 떠난 지 며칠 되입니다. 들판에서 잠을 잤는데 아주 특별한 꿈을 꾸게 됩니다. 사닥다리 꿈으로 꿈은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땅 위에 세워져있던 사닥다리가 하늘 저 높이까지 걸려있는 것이고, 사닥다리 위에서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갔다가 땅으로 내려왔다가 하는 광경도 보게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그 사닥다리 위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꿈이었습니다. 꿈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말씀을 받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13-15)
잠에서 깨어난 야곱 마음에 두 가지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깨달음입니다. 또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한없이 사랑하지만 그렇게 두려운 하나님, 늘 믿는다고 했지만 그렇게 두려운 하나님인지 새롭게 알게 됩니다. 두렵다는 것은 무서움과는 다릅니다.
야곱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의 하나님이 되어주십시오. 저를 인도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야곱의 이 일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을 생각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생각하시고 찾으시고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을 오늘 성경에서 하십니다.
야곱은 욕심이 많았습니다. 적당한 욕심은 발전도 있지만 너무 많았습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야곱이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말씀입니다. 천성적으로 욕심이 많았다는 말씀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사람 눈에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도 좋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여러 군데에서 말씀하십니다. 야고보 1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십시오.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괴롭고 슬프고 외로운 것이 사실은 다 욕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근원을 찾아서 들어가 보면 사실이 그렇습니다.
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라고 말씀하십니다. 꼭 육체의 생명이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 살다가 죽음과 같은 일들이 사실은 욕심에서 출발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심이 잉태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4장 2절에서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씀하십니다. 욕심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결국 살인까지 할 정도로 욕심은 무섭습니다. 이것 때문에 자기도 망하고 다른 사람들, 가족들도 힘들게 하는 일이 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욕심 많은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시편 106편 13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란 일반적인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이전에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시고 복을 주셨는가?’ 라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잠시는 고맙고 감사하다고 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처럼 합니다만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시106:13-14)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주실 때가 되면 주실 텐데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욕심을 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이어서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시106:15) 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이런 저런 것을 간구합니다. 때로는 간절하게 요구하면 주실 수도 있습니다. 큰 것은 아닐지라도 작은 것이라도 주십니다. 그러나 자주 하나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것이 욕심으로부터 나왔을 때 주시기는 주시는데 그것과 함께 아픔을 함께 주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욕심이 너무 많았습니다. 믿음이라도 좋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야곱에게는 좋은 믿음이라고는 한 구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야곱도 믿음의 자녀이기 때문에 믿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에 하나님을 제대로 찾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냥은 찾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기도할 때 같이 기도는 했을 테지만 자기가 제대로 하나님을 찾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잘 아십시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서 정말로 아내를 생각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말뿐입니다. 무늬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틈 날 때마다 아내를 생각하고 아내를 위해서 무엇을 할지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말로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것은 겉으로는 그가 어떤 신앙인이었는지 몰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늘 그랬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I love you’ 라는 말이 입에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만큼 진실로 사랑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 이십이다.’ 라고 말로는 고백을 잘했지만 지독하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들이 하는 말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망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선지자 에스겔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호6:1)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옆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돌아가자고 에스겔이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 뒤에도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레미야애가 3장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애3:40-41)
그 동안 하나님께 손은 들었는데 육체의 손은 들었을지 몰라도 마음의 손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손을 함께 아울러 하나님께 들자고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을 찾지 않았는지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1장에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2:18) 라고 말씀합니다. 만나서 같이 이야기 좀 해보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2:18)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찾아가야합니다. 찾아가면 어떻게든 해주시지만 찾아가지 않으면 도리가 없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아무리 하나님께 미운 짓을 했어도 하나님은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만 하면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어도 아무리 길이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나한테 오기만 하며 길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속여서 소위 사기축복으로 집안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집에서 쫓겨나면서 까지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런 야곱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 눈에 예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그런 야곱을 하나님께서 먼저 찾으셨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야곱을 찾으신 것은 야곱이 하나님께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본래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야곱만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보다 더 큰 죄를 짓고 잘못을 했고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찾으시듯이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은 너희들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단 하나 선악과만큼은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그 당부를 그들은 정면으로 어기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면목이 없어서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그런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먼저 찾으셨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도 그랬습니다. 동생과 함께 제사를 지냈는데 하나님께서 동생 제사는 받아주셨지만 자기 제사는 안 받아주셨습니다. 이쯤 되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봐야하는데 그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살기만 가득했습니다. 그때에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가인아, 네가 왜 그렇게 분해하느냐? 왜 그렇게 안색이 울그락불그락 하느냐?” 그러나 가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기어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 가인을 하나님은 또 찾아가셔서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본래 이런 하나님입니다.
야곱의 집에서 오늘 본문에 야곱이 유숙하고 있는 들판까지는 85Km정도가 됩니다. 집 떠난 지 나흘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실 때가 이런 때였습니다. 지금 야곱이 어떤 상황입니까? 자기가 집안을 풍비박산을 내고 말았습니다. 출발 때 이미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쳤습니다. 그런 몸과 마음으로 나흘이나 걸었으니 얼마나 힘들고 지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야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실 때가 이런 때가 많습니다. 힘들고 괴롭고 실패했을 때 찾아오십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찾아오셔도 오신 그 하나님을 여러분이 만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것을 잘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본즉’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야곱이 자다가 ‘꿈에 본즉’(12절) 꿈에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12절 말씀 가운데 ‘또 본즉’이라고 말씀하시고 13절 첫머리에도 ‘또 본즉’, 세 번이나 ‘본즉’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은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이어져있는 사닥다리를 보았고, 사닥다리 위해서 천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고, 그 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확실히 보고 확실히 만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꿈이라도 괜찮습니다. 속된 말로 개꿈이라도 괜찮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비몽사몽이라도 좋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뵙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확실히 보고 확실히 만났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있습니다. 깨달음 그리고 두려움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16-17절)’
이 깨달음, 이 두려움이 있는 것이 그냥 꿈과 계시의 차이입니다. 그냥 꿈을 꾸어도 좋습니다.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깨달음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으면 됩니다. 다른 날 없었던 깨달음이 있고 다른 날 하지 못했던 하나님을 만나면 이것이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계시를 받고서 어떤 사람은 그냥 꿈으로 지나쳐버리고 말고 어떤 사람은 계시로 받습니다.
야곱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은 그 꿈을 계시로 받았습니다. 야곱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그것을 그대로 현실로 이어나갑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18절)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20-22절) 라고 서원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늦은 밤에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지나가다 큰 풍랑을 만납니다. 풍랑에 익숙한 뱃사공 제자들이었지만 그날은 워낙 거셌습니다. 노를 젓는데 너무 힘들어 주님을 찾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 살면서 두려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 힘들고 괴롭고 외롭고 고달플 때가 있습니다.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고달픔, 괴롭고 힘들고 어떤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은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특히 여러분이 힘들고 괴롭고 속상하고 답답할 때, 실패해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까?’ 그럴 때 더 가까이 오십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고 난 뒤 너무 힘들었습니다.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있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만난 하나님을 확실히 붙들었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는 성경 전체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고,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백전백승을 이룬 최고 형통한 인물로 남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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