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힌 재주?
창세기 30:31~43
제가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나 가진 것을 모두 다 드리고, 그대 앞에 그냥 홀로 서리라
피어있는 이 마음 그냥 그대로, 오직 그대만을 바라보리라
낙엽은 지고 비바람 불어와도, 기다리는 봄날이 꿈에 있듯이
한 송이 꽃보다 고운 이야기, 그대 품속에 안겨 주시리라
나 있는 것을 모두 다 비우고, 그대 앞에 그냥 홀로 서리라
열려있는 이 마음 그냥 그대로, 오직 그대만을 바라보리라
햇살은 그토록 눈부시게 오고 또 와도 꽃이슬 여전히 맺혀 있듯이
아름답고 눈부신 사랑이야기, 나를 위해 남겨 두리라』
임긍수의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을 노래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 사람에게 슬픔이 있는 것, 사람에게 고통이 생기는 것, 이것은 사랑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흔히 사랑이 있다고 하면서도 슬프고 고통이 있고 불행한 것은 진정한 사랑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 참사랑이 있으면 아프지 않습니다.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불행하지 않습니다. 슬픔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냥 행복합니다.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14년간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그 14년의 머슴살이는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위한 사랑의 대가였습니다. 14년의 머슴살이가 끝난 뒤에 야곱이 이제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외삼촌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외삼촌은 14년 전에 야곱에게 했던 제안과 똑같은 제안을 합니다. 내 집에서 일을 좀 더 해 달라. 그러면 자네가 말하는 대로 다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그 제안에 야곱도 14년 전에 했던 것처럼 또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지방의 양들은 대체로 흰색입니다. 그리고 염소는 대체로 검은색입니다. 흰색 이외 다른 색 양은 돌연변이이고, 검은색 이외의 다른 색 염소는 돌연변이입니다. 돌연변이는 극히 드뭅니다. 야곱은 오랫동안 양을 쳤기 때문에 그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앞으로 정상적인 양 말고 돌연변이 양이나 염소가 태어나면 그것만 일한 대가로 받겠다는 아주 바보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외삼촌은 양과 염소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알고 있습니다. 외삼촌은 얼른 야곱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계약은 즉각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부로 야곱은 지금까지 키우고 있던 양과 염소 중에서 돌연변이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사흘 길 멀리 떼어놓았습니다. 이제부터 돌연변이가 태어날 때 그것만 야곱의 것이 됩니다. 이 바보같은 계약을 한 야곱이 희한한 재주를 부립니다. 돌연변이 양과 염소가 정상적인 것보다 훨씬 많이 태어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돌연변이 양과 염소는 그렇게 튼튼하지 못하지만 어떻게 재주를 부렸는지 돌연변이가 더 튼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야곱은 큰 부자가 됩니다.
당초에 외삼촌이 그 제안을 했을 때 야곱이 한 그 대답은 외삼촌이 보기에 정말로 바보같았습니다.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외삼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외삼촌은 이제 별 힘을 들이지 않고 재산을 늘릴 수 있고, 야곱은 아무리 힘써봐야 품삯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확실했습니다. 한 마디로 한다면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야곱을 거의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들이 내가 생각하는 틀 속에 있지만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아는 것이 전부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착각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겸손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릴 수 있고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야곱은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바보 같은 계약을 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비밀을 하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돌연변이 새끼를 낳게 하는지 그 방법을 알았습니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산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37-39절)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41-42절)
야곱이 이렇게 재주를 부리자 그대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43절).. 거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재산을 많이 모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수천 년 전의 야곱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상 살면서 돈을 벌 방법이 있다면 이렇게 살겠는지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그것이 정의인가, 바른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결과가 그렇게 해서 돈을 버는 것이 과연 잘 될 것 같은가?’ 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기독교 신자들이 반드시 생각하여야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절대규범입니다. 세상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절대규범, 절대기준이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 신자들, 진실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꼭 생각해야하는 규범과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최고의 계명입니다. 서기관 한 사람이 예수님께 “선생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명쾌하게 답을 주십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더 큰 규범이 없고 더 큰 기준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 살아갈 때 가질 확실한 절대 규범, 절대기준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기독교신자들이 어떤 일에든지 간에 갖다 대어야할 잣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을 생각해봅니다. 야곱이 그 기막힌 재주를 부려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기준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 외삼촌을 사랑하는 것인가? 사랑입니다.
야곱이 한 그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양떼나 염소 떼에 페인트칠한 것도 아닙니다. 태어난 그대로 키웠을 뿐입니다. 단지 새끼 밸 때에 재주 조금 부렸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제대로 살았는데 단지 요것만 조금 했습니다.” 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한 그 일은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계명, 절대 기준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아닌 정도가 아니라 해를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도둑질이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야곱도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도둑질이었습니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이 도리이다 때에 나의 공의가 내 대답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것이나 점이 없는 것이나 양 중에 검지 아니한 것이 있거든 다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33절) 다 도둑질 한 것으로 생각하라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과연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도둑질이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창31:1) 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결과적으로 외삼촌 라반의 재산은 크게 줄어들었고 야곱의 재산은 크게 늘었습니다. 돈을 벌더라도 이런 식으로 벌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재산을 모았다 할지라도 외삼촌에게 손해는 끼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야곱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바르게 살아야한다, 이것이 이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런 짓은 절대로 할 것이 아닙니다.
돼지에 기생하는 이들이 돼지털 사이에서 열심히 돼지의 피를 빨아먹습니다. 그 이들이 하도 열심히 돼지 피를 빨아먹어서 돼지가 날로 말라갑니다. 돼지의 피를 빨아먹던 이들이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들 중 한 마리가 다른 이들을 다 모아놓고, 우리가 돼지 피를 빨아먹더라도 적당하게 빨아먹어야하지 않을까? 돼지가 죽으면 우리가 먹고 살 것이 없을 것이니 돼지를 죽게는 하지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말에 모든 이들이 다 동의했습니다. 그랬더니 돼지도 살고 이들도 살았습니다.
우리가 피곤하면 입술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기는 일이 있습니다. 헤르페스라는 바이러스 때문인데, 이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수천 년 되었습니다. 수많은 바이러스가 생겼다가 없어지고 또 생겼다가 없어졌는데 헤르페스는 그렇게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헤르페스는 유일한 숙주가 인간 밖에 없습니다. 다른 동물에게 헤르페스는 기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르페스는 유일한 숙주인 인간에게 절대로 치명적인 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숙주 인간이 죽으면 자기네들만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다른 바이러스는 생겼다 없어지지만 헤르페스는 지금까지 오래도록 살아남아 있습니다.
야곱은 ‘어떻게 하면 외삼촌의 양과 염소를 더 많이 태어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외삼촌의 재산을 더 많이 불릴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재주를 부리면 외삼촌의 양과 염소를 내가 더 많이 가질 수 있을까? 여기에만 골몰했습니다. 야곱이 한 짓은 미물인 벌레나 병균들도 하지 않는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그것이 대단히 똑똑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기를 망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남에게 끼치는 해는 결국은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부디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을 일어서게 하고 다른 사람을 잘 되게 하고 절대로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다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도움을 주는지 잘 알지 못한다면 성경말씀처럼 흘러가는 강물에 빵을 던지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몇 날 후에 도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몇 날 후에 내가 너희들에게 다시 돌려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이 연못에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여름 날, 연못 속에 살던 붕어 두 마리가 서로 싸웠다.
그 중 한 마리가 죽었다.
죽은 그 붕어 살이 썩어 들어가서 물도 따라 썩었다..
연못 속에는 이제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다.』
한 마리 붕어를 싸워서 죽인 그 붕어도 결국 자기도 못살게 되었다는 노래입니다.
같이 살아야합니다. 살아도 같이 살아야하고 잘 살아도 같이 잘 살아야합니다. 나만 행복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같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도 결국 다 망합니다. 저 사람이 먼저 망하고 내가 그 뒤에 망하든지 아니면 내가 먼저 망합니다. 함께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특히 인간에 대해서는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야곱이 그 좋은 머리, 그 좋은 재주를 가지고 외삼촌의 재산을 더 늘렸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외삼촌도 잘 되고 자기에게도 좋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내 실력으로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바보처럼 사는 것이 낫습니다. 우직하게 그냥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7-10)
좀 매정합니다. 조금은 가혹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주인이라면 주인이 너무 하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데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선생님, 우리들에게 큰 믿음을 주십시오.” 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제자란 사람들은 밭 갈고 양치고 시중드는 그 모든 충성을 하면서, 오늘날로 말한다면 찬양대원으로, 교회학교 교사로 수고하고 안내를 하고 이런 저런 수고를 많이 하면서 그 대가를 사람에게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대가는 하나님에게 받는다,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조금 하고 나서 대가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무엇을 받고 누리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믿음이 있는 제자라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던져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들어보십시오. 만약 여러분들에게 그런 믿음이 있다면 내가 하는 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모든 충성을 다하고 난 뒤 ‘하나님,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저에게 복을 주십시오.’ 라고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런 권세를 주겠다, 내가 복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진짜 복은 사람에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잔재주 부리지 마십시오. 내가 재주를 부려서 더 많이 모으려고 아등바등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세상과 씨름하지 마십시오. 옛날 어른들 이야기입니다. 밤새 죽으라고 씨름했답니다. 아침이 되어서 겨우 끝났답니다. 누구와 씨름했는지 보니 썩은 빗자루몽둥이 밖에 없더랍니다. 세상과 씨름하면 그렇습니다. 사람과 씨름하면 그렇습니다. 사람과 하지 마십시오. 세상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씨름하십니다. 부디 하나님과 하십시오. 하나님을 붙드시고 씨름하십시오. 진짜 복은, 참된 복은 위로 하늘의 하나님께로부터만 올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1:17)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하고 왜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 라는 뒷 말씀을 덧붙이십니까?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모든 좋은 선물, 모든 좋은 은사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을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말씀, 당신의 약속을 바꾸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약속하신대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씨름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마시시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십니다. 다시 하나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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