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 대로
창세기 29:21~30
성을 점령한 적국의 장군이 성에 포고를 내렸습니다. 성 내의 부녀자와 어린이는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 한 가지씩만 가지고 자정 안으로 성을 떠나라는 포고였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은 통곡을 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자신들의 남편과 아버지가 처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울면서 성을 나가는 모두가 자기 소중한 것 하나씩 들고 나가는데, 그 중에서 한 여인이 남자 하나를 업고 나가려고 합니다. 성문 병사들이 제지를 하면서 누구인지 묻습니다. 남편이라고 답하자 죽으려고 작정했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장군님께서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 하나를 들고 나갈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에게는 내 남편이 가장 소중한 나의 보물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보고가 장군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한참 생각하던 장군은 허락했습니다.
야곱이 못된 짓을 하고 먼 길 떠나서 외삼촌 집에 도착했습니다. 한 달을 외삼촌 집에서 함께 있으면서 외삼촌 일을 도왔습니다. 외삼촌이 보기에 야곱이 쓸 만했던 것 같습니다. 야곱에게 정식으로 일하자는 말과 함께 월급 액수를 정하라고 제의했습니다. 야곱이 아주 희한한 말을 했습니다. “외삼촌의 작은 딸을 저에게 아내를 주시시오. 그 대가로 7년간 일하겠습니다.”
계약을 맺었습니다. 7년이란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게 됩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모든 남편 분들이 야곱의 심정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년이 아니라 70년을 살면서도 똑같이 아내를 사랑하고 그 세월이 마치 며칠 지나는 것처럼 보낼 수 있는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최고 행복이 무엇인지 아닙니까?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별 것 다해보아야 소용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드디어 7년이 지나고 꿈에 그리던 결혼할 날이 다가왔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잔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첫날밤 지난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이 눈을 뜨고 보니 자기 곁에 있던 아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둘째 딸이 아니라 첫째 딸이었습니다.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16-17절)
외삼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뒤통수 얻어맞은 야곱이 외삼촌에게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외삼촌은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26절).. 이 동네 풍습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설명을 했습니다. 7년 전에는 몰랐던 일도 아니었을 텐데 외삼촌은 그렇게 변명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7년을 더하면 네가 사랑하는 둘째도 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대신 7일만 지나면 결혼을 먼저 시켜주겠다는 제안에 야곱의 마음이 누그러져 그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서 세상이 참 묘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야곱 자기가 한 짓과 자기가 당한 일이 너무도 닮았습니다. 야곱이 늙은 아버지가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했습니다. 외삼촌도 어둠을 이용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했습니다. 동생 야곱이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언니가 동생을 속이고 동생의 첫날밤을 빼앗았습니다. 야곱이 형 대신 장자의 축복을 받는 사기극 주범은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동생 첫날밤을 가로 챈 주범도 언니가 아니라 아버지 즉 야곱의 외삼촌이었습니다. 그 모든 일에는 야곱의 어머니가, 야곱의 외삼촌이 전적으로 기획하고 연출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한 짓 그대로 외삼촌을 통해서 돌려받았습니다.
여기서 눈 크게 뜨고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에 당한 그 기가 막힌 일은 외삼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너 그렇게 못되게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가슴 아프게 했으니 너도 그대로 한 번 당해봐라.”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바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체험하시고 느껴보시고 그것이 확실한 여러분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사는 것이 달라집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조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겁나는 것이 없어집니다.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고 또 그렇게 간절한 소원도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모습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성경은 그것을 ‘감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서 15장 3절은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1편은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시11:4)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보는 것 정도가 아니라 하나하나 불꽃같은 눈으로 보십니다. 감찰입니다. 다 기록해놓으십니다. 역대하 16장은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대하16:9)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온 땅을 감찰하시면서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는지 잘 보시고 그것에 따라서 여러분들에게 보응하십니다.
오바댜 1장에서는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화가 돌아갈 것이라’(옵1:15) 라고 말씀하시고, 이사야 3장에서는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3:10-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65장에서 하나님은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사65:6) 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라고 말씀하시고,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17) 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심판하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권세를 가지고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와서 심판할 때에 각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대로 내가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보응하시되 악한 사람은 악한 것으로 선한 사람은 선한 것으로 보응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보응은 절대로 착오가 없습니다. 오류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열왕기 21장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왕상21:1) 아합이 나봇에게 ‘네 포도원이 왕궁 곁이 가까이 있으니 네게 주어 채소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왕상 21:1-2)라고 말하자 나봇이 아합에게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21:3) 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한 이 말로 말미암아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그의 아내 이세베이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왕상21:4-5) 라고 물었습니다. 아합은 아내 에세벨에게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언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하기 때문이로다’(왕상21:6)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세벨은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왕상 21:7) 라고 말했습니다.
이세벨은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그 인을 치고 봉하여 그의 성읍의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왕상21:9-10) 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봇이 사는 성읍 장로 귀족들은 이세벨이 편지로 지시한 그대로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자 불량자 두 사람이 들어와서 백성들 앞에서 “이 사람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무리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하늘 아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선량한 백성에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많은 경우 그런 일이 우리 눈에는 그대로 끝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나봇의 그 일도 그대로 끝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잘 아십시오. 우리는 잘 알지 못하고 우리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일들을 보고 계시고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그것만 보고 그 뒤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부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왕상 21:20-)
이세벨에 대해서도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왕상 21:23) 라고 말씀하셨고,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21:24) 라고 아주 무섭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거기서 왕 아합은 최후를 맞이합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든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왕상 22:34-35)
유살에 맞아 하루 종일 전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아합의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왕상21:37-38)
아합 왕은 그렇게 죽었지만 상당한 세월이 지나가도록 나봇 사건의 주범인 왕후 이세벨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왕이 바뀌어 또 다른 사람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 세월 계속해서 이세벨은 태후의 자리에서 온갖 호강을 누렸습니다. 그 세월이 나봇 사건으로부터 14년입니다. 정말 그대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확인하십시다. 사람은 잊어버려도, 기억하지 못해도, 눈으로 아무것도 보지 못해도 심판주 하나님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는 사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14년째 되는 어느 날 나라에 반란이 일어납니다. 반란군 대장이 이세벨의 아들 왕을 살해한 후 태후 이세벨을 찾아갑니다. 그 일에 대하여 성경은 열왕기하 9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세벨의 아들이 죽는데 어디서 죽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의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 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왕하9:21) 즉 나봇 사건, 그 악한 사건이 일어난 그 장소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그가 병거 가운데에 엎드러진지라 예후가 그의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가져다가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의 아버지 아합을 쫓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그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이 밭에 던질지니라 하는지라’(왕하9:24-26)
이세벨이 죽기 전에 그의 아들이 먼저 죽었습니다. 아들이 죽은 자리가 바로 부모가 범죄한 현장입니다. 그 다음 드디어 이세벨 차례입니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이르되 가서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 그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는 찾지 못한지라 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왕하9:30-37)
개들이 다 먹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처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응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
남편 이삭, 큰 아들 에서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 어머니 리브가,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남편이 당했던 아픔, 큰 아들이 당했던 아픔이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거기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영영히 못 보는 생이별을 하게 되는 아픔까지 돌아왔습니다. 리브가는 이렇게 하는 것이 가정을 위해서, 자식들을 위해서 더 좋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돌아온 것은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고 슬픈 이별, 가슴 아픈 일들만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외삼촌을 봅니다. 자기로서는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시집을 못 보낸 큰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 불과 몇 시간 만에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쓸만하고 똑똑하고 일 잘하는 야곱을 14년이나 부려먹을 수 있는 기찬 묘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악한 묘책이 과연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좋지 않습니다. 악한 일은 악한 일대로 보응 받고 선한 일은 선한 것으로 보응 받습니다. 눈여겨보시고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예例가 히스기야의 일입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얼마 살지 못하니 정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간절하게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전해듣게 됩니다. 15년 후에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받습니다.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히스기야가 벽을 쳐다보며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왕하20:3) 라고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들으시고 즉각적으로 그렇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사람은 선한대로 보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의 예로 직접 말씀하신 것이 마태복음 25장에서 최후의 심판을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25:31) 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인자는 예수님 당신입니다. 최후의 심판대위에서 재판장으로서 심판하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바입니다. 마태복음의 이 내용은 잘 아시겠지만 기회 있을 때마다 다시 확인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라고 말씀하시자 의인들이 우리가 언제 이런 일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렇게 선한 일, 좋은 일, 아주 귀한 일을 하면서도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 심판대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하나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마25:41-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한 일들이 최후의 심판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는지 물었습니다.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간에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각각 어떻게 살았는지 그대로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대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 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냉수 한 그릇도 잊어버리지 않고 다 갚아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직은 젊은 야곱에게, 아직은 좋은 얼굴로, 아직은 좋은 말로, 말씀하십니다. “야곱,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이제 보았지? 너 어떻게 살았는지 그대로 너에게 다 돌아간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중이 있다. 그리고 그 나중 그 다음 나중이 또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9장에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마지막 성경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 22절에서 나중에 이 세상, 우리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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