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넘으면...
창세기 34:1~4
‘이빨 자국 하나로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한 말입니다. 사건이 있었습니다. 원숭이 한 마리가 개를 공격했습니다. 개 주인이 원숭이를 막았습니다. 그것을 본 다른 원숭이가 개 주인을 물었습니다. 원숭이에게 물린 상처가 감염이 되었습니다. 개의 주인은 1920년 감염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습니다. 그 개의 주인은 그리스의 국왕 알렉산더입니다. 당시 알렉산더는 상징적 통치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상징적인 개인적인 일이 점차 커져 민족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기어코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으로 25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만약 알렉산더 왕이 죽지 않았더라면 전쟁은 잃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알렉산더 왕이 원숭이에게 물리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원숭이가 왕을 문 것이 25만 명 사망의 원인이 됩니다.
야곱에게 있었던 많은 일들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외삼촌 외사촌과의 문제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20년 동안 야곱을 짓누르고 있던 형 에서와의 문제가 잘 처리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편한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일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야곱에게 어떤 어려운 일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야곱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 디나가 읍내에 나갔다가 세겜의 추장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야곱에게 어쩌다 그런 날벼락 같은 일이 생겼을까요? 그러나 날벼락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우연은 없습니다. 다 필연입니다. 언젠가는 있어야할 일, 언젠가는 와야 할 일이 온 것 뿐 입니다.
요나의 풍랑이 그러했습니다. 요나가 배를 탔습니다. 맨 밑바닥에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 배가 무서운 풍랑을 만나 깨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한평생 선원 삶을 살았던 선원들 모두 다 예삿일이 아니다, 이 정도 재앙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 재앙을 불러온 사람이 이 배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기 위해서 배를 탔기 때문에 그 배에 무서운 폭풍이 불어 닥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요나서 1장 4절은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돌아올 것은 돌아옵니다.
야곱에게는 특히 더 했습니다. 아주 그대로였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사람 라헬을 위해서 7년간 고생한 끝에 마침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기겁할 일이 생깁니다. 잠에서 깨어보니 옆에 있는 사람이 7년간을 기다렸던 사랑하는 라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한 일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인 것 같이 외삼촌이 야곱을 속였습니다. 야곱이 어머니와 공모한 것 같이 외삼촌이 야곱의 처형 레아와 공모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 눈이 깜깜한 것을 이용한 것 같이 외삼촌도 깜깜한 밤을 이용했습니다. 야곱이 자기가 다른 사람을 속인 그대로 자기도 속게 되었습니다.
외삼촌이 자기를 속인 그 일에 대해서 야곱이 분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야곱은 그 일 덕분에 사랑하는 여인 라헬 이외 라헬의 언니 레아도 아내로 얻었고 라헬의 여종, 레아의 여종도 아내로 얻었습니다. 또 그 네 아내가 낳은 열 두 자식까지 얻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자식 많은 것이 큰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챙겼습니다. 모든 일을 다 챙기셨습니다. 2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자식들과 아내들을 챙겼고 재산까지 챙겼습니다. 또 외삼촌과의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일도 챙겼고 20년 전부터 자기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 에서와의 위기상황도 챙겼습니다. 그야말로 신묘막측한 방법,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챙겼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야곱에 관한 어떤 문제도 안 챙기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챙기셨습니다. 지키시고 보호하고 공급해주셨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야곱을 잘 챙기신 하나님께서 야곱의 사랑하는 외동딸은 왜 안 지켜주셨는지 큰 의문입니다.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하나님, 지금까지 야곱을 지키시고 챙기신 것을 보면 그 정도야 작은 새끼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하나님께서 딸 디나가 그렇게 몹쓸 일을 당하는데도 왜 안 챙겨주셨는지 이 의문이 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도를 넘었습니다. 그동안 야곱을 보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형을 피해서 도망갈 때 벧엘동산에서 하나님께 서원을 했습니다. 그 서럽고 버림받은 마음, 두려운 마음, 막막하고 답답했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이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 너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닥다리 위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5)
이 약속을 받고 야곱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야곱도 약속, 서원을 했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28:20-22)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당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일이 생겼을 때 야곱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길을 지도하셨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창31:2).. 외삼촌의 안색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31:3) 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이렇게 길을 지도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생각도 하지 않고 묻지도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일을 했습니다.
야곱이 또 외삼촌으로부터 위기가 닥친 일이 있었습니다. 도망간 지 일주일 만에 잡혀서 곤욕을 치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막아주셨습니다. 잡히기 전날 하나님께서 외삼촌에게 나타나셔서 ‘너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말씀입니다. 그렇게 외삼촌과의 그 위기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또 형 에서와의 문제도 해결해주셨습니다. 당시 야곱은 형 에서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먼저 에서를 찾아가셨습니다. 당신의 사자, 당신의 군대를 보내셔서 에서에게 ‘너 동생에게 꼭 그렇게 해야만 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을 챙기신 것이 보입니다. 혹 죽이지는 않을지라도 동생을 제대로 손보겠다고 마음먹었던 에서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에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기적적으로 그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야곱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어야 했습니다.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굳게 맹세했던 서원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4명의 아내를 얻는 동안, 그 아내들에게서 열두 명의 자식을 낳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한 번도 제대로 찾지 않았습니다. 이해하려고 마음먹는다면 외삼촌 집에서는 머슴살이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삼촌과의 일, 형 에서와의 일이 끝난 뒤에는 하나님을 찾았어야했습니다. 벧엘로 올라갔어야 했습니다.
사실 야곱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두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31:13) 그런데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급한 불이 꺼졌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벧엘로 가지 아니하고 숙곳으로 갔습니다. 1~2년이 아니라 10년 가까이 되도록 숙곳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20년 동안이나 머슴살이 했으니 좀 쉬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형 에서와의 문제는 너무 힘들어 수일간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긴장이 풀려 좀 쉴 수도 있었을 곳입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10년은 너무 길었습니다.
그 후 숙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도 벧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세겜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이 아주 좋았든지 세겜에서는 아예 집지을 땅까지 샀습니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이 받단 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창33:16-19)
아예 여기서 눌러앉아 오래 살겠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에는 정도가 있습니다. 지켜야할 정도가 있을 때는 그 정도를 지켜야합니다. 아무리 몰라도 모르는 데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몰라도 모르는 정도가 있어야하고 넘어가도 넘어갈 수 있는 정도가 있고 더 이상 넘어가면 안 되는 정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정도를 넘게 한 것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일, 나에게 돌아오는 일도 정도가 넘게 됩니다.
야곱은 너무 심했습니다. 20년 동안 한 번도 하나님을 찾지 않은 야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야곱을 잊지 않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야곱을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보고 계시다가 위기를 당하자 즉각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외삼촌과의 문제, 형과의 문제도 해결하셨습니다.
야곱은 자기 앞을 지나는 하나님의 사자가, 하나님의 군대가 왜 가는지 몰랐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가는데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그렇게 챙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은혜를 받고서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정도를 넘는 사랑을 받고서도 야곱은 정도를 넘어도 너무 넘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너무도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너무도 뼈아픈 배신을 주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대하12:5)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26장에서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레26:23-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역대하 24장은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대하24:20)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잘 하지 않고 대강만 해도 형통하게 살 텐데 왜 나의 마음을 거스리는가? 나의 말씀을 거역하는가? 이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어서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대하24:20)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안 지켜주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사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건강을 위해서 아무리 애를 쓴다할지라도,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해도, 경제문제를 이렇게 챙기고 저렇게 챙겨도 하나님께서 안 지켜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편 127편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127:1-2)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아무리 무엇을 세우려고 해도 무엇을 지키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고민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 마음을 너무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온 몸에 힘이 빠지십니다. 더 이상 야곱을 지킬 힘이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키지 않으시니까 야곱에게 돌아온 것은 처절한 아픔이었습니다. 가도 거기까지 가면 안 됩니다. 절대로 거기까지 가면 안 됩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 도를 넘으면 여러분에게 돌아오는 일도 도가 넘게 돌아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장막에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텐트 속에 계셨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안정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보니 우리는 이렇게 좋은 집에 사는데 하나님이 임시처소인 텐트 속에 사시는 것은 아니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집을 짓자고 제의했고 하나님의 종도 허락하여 성전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불허하셨지만 다윗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자 하나님께서도 도를 넘는 약속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만일 너의 아들이 죄를 범하면 내가 너 앞의 왕 사울에게 한 것처럼 그 왕 자리를 빼앗지는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은 불공평입니다. 하나님이 이럴 수 있습니까? 사울이 잘못했을 때 왕의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아니고 다윗 아들이 사울과 똑같은 잘못을 할 때에도 왕 자리를 빼앗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아십시오.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습니까?
결과가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정도를 넘어서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을 하나님도 도를 넘어서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대단한 권세를 자랑하던 로마의 백부장이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 당시 백부장은 대단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아직은 젊은 랍비였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은 목적은 당시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던 종의 병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그 일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로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거기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서 고쳐주신다고 했을 때 ‘어떻게 선생님 같으신 분이 저 같이 모자라는 사람을 찾아올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사양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자 백부장은 또 ‘그렇게 힘쓰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이시라면 여기서 한 마디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백부장은 정도를 뛰어넘는 존경과 사랑 그리고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도를 넘는 인격자였습니다.
이 백부장을 두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7: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가라, 당신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씀하셨고 그 즉시 하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최고의 칭찬, 최고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려면 이렇게 믿으십시오.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도를 넘는 사랑, 도를 넘는 믿음에 도를 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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